공지사항

우리는 나무에 달려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때문이니,(고전2:23)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공지사항

케이스글라스 선교사

  • 관리자 (ehompy0429)
  • 2014-05-26 14:29:00
  • hit1624
  • vote0
  • 1.245.98.13

   1) 한국의 첫 웩 선교회 선교사, 케이스 글라스
한국 교회의 실상을 직접 보면서 받은 충격은 놀만 그랍 회장의 마음에 깊이 파고들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국을 다녀간 이후 그는 한국을 잊을 수 없었다. 그토록 열심히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면서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 교인들의 모습이 그의 눈 앞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런던의 한 교회에서 놀만 그랍 회장을 강사로 초청했다. 놀만 그랍 회장은 평상시처럼 웩 선교회에서 훈련 중인 선교학생들(웩 선교회는 영국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 자원하는 선교사들을 모집하여 2년 정도 훈련한 후 세계 곳곳으로 파송했다.)을 데리고 가서 말씀을 전하기 전 간증을 시켰다. 그날 저녁 한 선교학생이 나와 자기의 구원 간증을 했다.

  “저는 네덜란드에서 개혁 교회 장로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며 열심을 냈지만, 자라면서 짓는 죄 때문에 고민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참 감사하게도 주님께서 제게 거듭난 분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분은 미션 스쿨 교장으로 제게 복음을 전해주셨는데, 그때 제 모든 죄를 해결 받고 저도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제 마음에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 웩 선교회에 선교 지망을 했고, 지금은 네팔에 선교를 떠나기 위해 비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학생의 이름은 케이스 글라스(Kays Glass, 한국명 길기수)였다. (당시 그의 친구로, 후에 ‘복음은 철의 장막을 뚫고’ 라는 책의 저자이며, 공산화된 동유럽에 1955년부터 선교를 시작하여 ‘복음의 밀수꾼’으로 유명한 브라더 앤드류도 그와 함께 웩 선교회에서 훈련을 받았다.) 케이스 글라스의 간증은,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간절하던 놀만 그랍 회장의 마음을 움직였다. 복음 없는 교회에서 고통스럽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구원 받은 그야 말로 종교적 열심에만 빠진 한국 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합당한 사람이라는 마음이 든 것이다. 그래서 간증이 끝난 후 강단에 서자마자 놀만 그랍 회장은 “지금 간증한 학생은 네팔이 아닌 한국으로 갈 것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했고, 그때 케이스 글라스 학생은 물론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런데 얼마 후 네팔 정부는 공산주의를 채택한 이유로 케이스 글라스의 비자를 거부했고, 그 후 한국을 향한 놀만 그랍의 마음을 받은 케이스 글라스 학생은 한국의 첫 웩 선교사로 1956년에 한국에 발을 내딛게 된다.
     1) 한국의 첫 웩 선교회 선교사, 케이스 글라스
한국 교회의 실상을 직접 보면서 받은 충격은 놀만 그랍 회장의 마음에 깊이 파고들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국을 다녀간 이후 그는 한국을 잊을 수 없었다. 그토록 열심히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면서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 교인들의 모습이 그의 눈 앞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런던의 한 교회에서 놀만 그랍 회장을 강사로 초청했다. 놀만 그랍 회장은 평상시처럼 웩 선교회에서 훈련 중인 선교학생들(웩 선교회는 영국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 자원하는 선교사들을 모집하여 2년 정도 훈련한 후 세계 곳곳으로 파송했다.)을 데리고 가서 말씀을 전하기 전 간증을 시켰다. 그날 저녁 한 선교학생이 나와 자기의 구원 간증을 했다.
  “저는 네덜란드에서 개혁 교회 장로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며 열심을 냈지만, 자라면서 짓는 죄 때문에 고민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참 감사하게도 주님께서 제게 거듭난 분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분은 미션 스쿨 교장으로 제게 복음을 전해주셨는데, 그때 제 모든 죄를 해결 받고 저도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제 마음에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 웩 선교회에 선교 지망을 했고, 지금은 네팔에 선교를 떠나기 위해 비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학생의 이름은 케이스 글라스(Kays Glass, 한국명 길기수)였다. (당시 그의 친구로, 후에 ‘복음은 철의 장막을 뚫고’ 라는 책의 저자이며, 공산화된 동유럽에 1955년부터 선교를 시작하여 ‘복음의 밀수꾼’으로 유명한 브라더 앤드류도 그와 함께 웩 선교회에서 훈련을 받았다.) 케이스 글라스의 간증은,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간절하던 놀만 그랍 회장의 마음을 움직였다. 복음 없는 교회에서 고통스럽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구원 받은 그야 말로 종교적 열심에만 빠진 한국 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합당한 사람이라는 마음이 든 것이다. 그래서 간증이 끝난 후 강단에 서자마자 놀만 그랍 회장은 “지금 간증한 학생은 네팔이 아닌 한국으로 갈 것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했고, 그때 케이스 글라스 학생은 물론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런데 얼마 후 네팔 정부는 공산주의를 채택한 이유로 케이스 글라스의 비자를 거부했고, 그 후 한국을 향한 놀만 그랍의 마음을 받은 케이스 글라스 학생은 한국의 첫 웩 선교사로 1956년에 한국에 발을 내딛게 된다. 

게시글 공유 URL복사
댓글[0]

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