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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와 제롬의 순교

  • 관리자 (ehompy0429)
  • 2014-10-12 17: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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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존 폭스

죤 후스의 순교

 

보헤미아에서 교회개혁을 처음으로 시도한 지도자로 유명한 죤 후스는 1369년경 훗세니츠에서 태어났다. 부모들은 농민 계급에 속했지만 아들의 비상한 재주를 알아보았다. 집에서 자라는 동안 그를 당해 낼 가정교사가 없었다.
나이가 차자마자 그는 프라하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후스는 여기서 곧 유명해졌고, 졸업한 지 2~3년 뒤에 베들레헴 교회의 목사로 뽑혔다.

이 예배당은 프라하의 몇몇 경건한 신자들이 건축하여 바친 것이였다. 보헤미아 언어로 인기 있는 설교를 제공하는 예배당으로 건축한 것이었다.
이 목사직은 이례적인 성공을 거두게 하는 직분이었다. 후스는 많은 청중들에게 큰 감화를 끼쳤다. 목사직은 후스 자신의 활기찬 신앙생활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후스는 독자적인 성경연구에 몰두하였다.
얼마 동안은 로마교회와 마찰을 빚지 않았다. 몇년 동안 그는 로마교회의 대주교와 맞먹는 일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훗스는 너무 열열한 개혁주의자였으므로 로마교회의 견책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사제직에 있는 사람들과 교리논쟁에 들어갔다.
이윽고 프라하 시의 성직자들은 대주교 앞에서 그를 비난하였다. 대주교는 그의 직분을 빼앗고, 프라하에서는 성직자의 일을 후스가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위클리프의 작품의 영향

영국의 위대한 종교개혁자요 성경번역가인 죤 위클리프는 종교 개혁의 횃불을 밝히고 영국 이외의 다른 여러 나라에까지 그 빛을 비추었다.

위클리프의 저서는 죤 후스와 그의 친구 제롬에 의하여 프라하에 소개되어 크게 인정을 받고 널리 보급되었다.대주교는 새 교회의 보급에 경악하면서 그 판매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 조치는 위클리프의 저서의 인기를 감소시키지는 못했다. 정말로 그 책은 오히려 더 많이 팔리는 것 같았다. 마침내 대학에 다니는 거의 모든 학생들은 그의 저서들을 탐독하였고, 많은 학생들이 위클리프의 사상에 대하여 뜨거운 지지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대주교는 로마에 사람을 보내어 보헤미아에서 위클리프의 책을 읽지 못하도록 하는 권리를 부여하는 교황의 대칙서(대칙서)를 받아 가지고 왔다.
이 칙서에 따라 그는 몇 권의 위클리프 작품의 복사판을 옮겨 적어서 전파하려 했던 네 사람의 신학 박사들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설교를 금지시켰다. 죤 후스와 그의 동지들 몇 사람은 대주교의 선언에 대하여 항의하고 백성들에게 호소하며 다녔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로마 교황은 후스로 하여금 로마교회의 법정에 출석하여 답변을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출석 요구에 대해 왕 윈세슬라우스와 왕비와 귀족과 대학이 후스를 위해 탄원서를 올렸다.

그만큼 그는 보헤미아에서 사랑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고향 훗세니츠로 안전하게 물러가 있었다. 그러나 거기 있는 동안 그는 교회의 비행에 항의하는 책을 교황이 읽지 못하도록 할 권리가 없다고 하는 글을 썼다. 그는 또 삼위일체에 관한 위클리프의 책을 옹호하였고 교황과 추기경과 그 당시 부패한 시대의 성직자들의 악덕을 대담하게 지적하였다.
그러나 음침한 박해의 망령이 그 피로 얼룩진 손가락을 영국을 향해 뻗기 시작했고 곧이어 독일과 보헤미아에 달려들었다. 프라하의 후스와 제롬은 로마교회의 진노의 특별한 희생자로 선택되었다.
그러나 위험을 잘 알았으므로 그들은 프라하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그들을 잡아내기 위해서는 술책이 필요했다. 계락으로 후스를 체포할 기회는 곧 왔다.
교황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셋 있었는데, 그들 사이에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독일의 콘스탄스에서 종교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들 세 사람은 이태리 사람들의 추천을 받은 죤과 프랑스 사람들의 추천을 받은 그레고리와 스페인 사람들의 추천을 받은 베네딕트였다.
죤 훗스는 이 회의에 출석하라는 소환령을 받았다. 그가 갖게 될 의구심을가라앉히기 위하여 그들은 독일 황제가 서명한 안전 통행권을 보내왔다. 그가 자유롭게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가도 좋다는 허가서였다. 그 자신의 이단 혐의를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고 말하고 총회에서 그렇게 할 기회를 갖게 되었으니 이제는 기쁘다고 하였다.

 

콘스탄스로 출발하는 후스

 

그리하여 후스는 보헤미아의 귀족 두 사람을 데리고 콘스탄트를 향해 출발하였다. 그들은 후스의 제자들로서 존경과 애정으로 후스를 따르고 있었다. 프라하를 떠나기 전에 후스는 프라하시에 있는 모든 교회의 문에다가 대자보를 써 붙였다. 그 내용은 후스에 대하여 조작한 이단 혐의에 대하여 대대답하기 위하여 총회에 간다는 광고였다.
그는 또 지나가는 도시마다 그는 지금 콘스탄스에 변호하려 간다고 하고 그의 원수들이 자기를 총회에 초대했다고 광고하였다. 가는 중에 그는 백성들로부터 온갖 존경과 사랑의 표시를 받게 되었다.

지나가는 거리마다 도로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붐볐다. 도시마다 법석을 떨며 사람들이 모여들며 그를 환영하였다. 사실 그는 개선 장군처럼 독일로 들어갔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버림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향 뿐 아니라 곳곳에 나의 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다.
후스는 콘스탄스에 도착하여 한적한 곳에 숙박하였다. 잠시 후에 그를 죽이려고 이리저리 엿보면서 성직자들과 약속을 해 두었던 스테반 팔렛츠가 도착하였다. 팔렛츠는 로마의 종교 법정의 한 모퉁이에서 마카엘 드 카시스를 만났다.
이들 두 사람은 그들 스스로 후스의 고발자로 자처하고 후스를 치기 위해 위법 사실을 항목별로 작성하여 교황을 위시하여 고위 성직자들이 모인 총회에 제출하였다.

종교회의의 결의로 후스를 체포함

이제 원수들은 그들의 검은 속을 내보였다 . 콘스탄스로 왕래하는 안전통행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체포되어 지하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가 이렇게 갇혀있는 동안 종교회의에서는 위클리프와 그의 저서에 대하여 유죄 판결을 내리고 얼마전에 세상을 떠난 영국의 종교개혁자 위클리프의 시체를 파내어 불태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런 일이 진행되는 동안에 후스의 친구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보헤미아와 폴랜드의 귀족들은 관심이 온통 후스에게 쏠려 있었다. 그들은 최소한 후스의 유죄판결을 막아보자고 애를 썼다. 우선 그렇게 하기 위해서 뽑은 위원들을 보내어 그들의 뜻을 전하였다.
그를 심문하기 전에 그의 적들은 프란체스코 수도회 회원인 수사 한 사람을 고용하여 후스에게 보내어 몇 말씀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그로부터 증거를 잡아내려는 것이었다. 그의 제자가 되려는 학생으로 위장하고 그는 어느날 후스를 찾아갔다. 후스의 교리를 배우고 싶어한다는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후스는 그를 의심하고 그의 태도는 겉보기에 아주 단순한 것 같지만 그의 질문은 무식한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깊이와 의도를 감추고 있다고 말했다. 이 사실이 발각된 후에 그는 롬바르디의 유명한 수도사 중의 한 사람의 디다케의 행세를 하였다.
드디어 후스는 종교회의 앞에 끌려나갔다. 그에 대한 범죄 사실이 낭독되었다. 그 수효는 40가지나 되었고 주로 그의 저서에서 발췌한 것이었다. 그가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그를 화형에 처하기로 회의에서 결의하였다.
그후 그는 어둡고 더러운 지하실에 갇혔다. 낮에도 다리에 무거운 차꼬를 채워서 거의 움직을 수도 없었다. 밤에는 손에도 쇠고랑을 채우고 벽에다 매달았다.
이렇게 비참한 형편으로 며칠 동안 지난 후에 보헤미아의 많은 귀족과 국민들이 그를 석방해 달라고 종교회의에 탄원서를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마지막으로 네 사람의 주교들과 두 사람의 변호사들이 후스에게 철회를 설득하기 위하여 파송되었다. 그러나 그는 정통교회의 신앙에 위반하는 어떤 것도 설교했거나 글을 쓴 적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증인이라고 하였다.
그때 그들은 종교회의의 권위를 후스가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에 후스는 대답하기를 “종교회의가 유명한 회원들을 나에게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토론하여 나에게 확신을 심어준다면, 내가 잘못되었다고 시인을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후스는 토론 없이 종교회의에 항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설득하러 온 사람들은 그의 확고 부동한 태도에 심히 놀라면서 그를 떠났다.

 

후스가 사형선고를 받다

 

후스는 마침내 마지막으로 재판장 앞에 끌려나왔다. 긴 심문을 마치고 그에게 그의 주장을 철회하라고 권하였다. 이를 그는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리고 나서 로디의 주교가 설교를 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죄인은 죽어 마땅하고 이단자를 죽이는 것은 정의로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설교가 끝나면서 재판도 끝났다. 종교회의는 후스를 완고하고 고칠 수 없는 이단자로 단죄하고 형을 확정지었다. 그의 사제직은 박탈하고 그의 책들은 공개적으로 불태우며 행정관서에 넘겨 처형시킨다는 것이였다.
후스는 형을 받고도 조금도 두려워 하는 기미가 없었다. 재판을 끝내고 그는 무릎을 꿇고 눈을 하늘을 향해 뜬 채 앞서 간 모든 순교자들처럼 외쳤다. “무한 자비하신 하나님이시여, 나의 원수들의 불의함을 용서하소서.”
종교회의에서 임명한 사람들이 그의 사제복을 벗기고 사제직을 박탈하였다. 그의 머리에는 종이로 된 띠를 두르게 하고, 머리 띠에는 악령의 그림과 “이단자들의 괴수”라는 글을 써 넣었다. 이렇게 모욕을 하고 불명예스런 옷을 입혔지만 후스를 체념과 위엄을 갖추고 의연히 대처하였다.
파면 의식이 마치고 주교는 죄수를 황제에게 넘겨주었다. 황제는 그를 바바리아 공작에게 맡겼다. 그의 책들은 교회의 대문 앞에서 불살랐다. 그는 처형장이 있는 콘스탄스 성 밖으로 끌려 나갔다.
거기에 도착하자 마자 그는 무릎을 꿇고 하늘을 계속해서 쳐다 보면서 “내 영혼을 주께 맡기나이다.”라고 기도했다.
후스 주위에 장작이 쌓였을 때에 바바리아의 공작은 마지막으로 그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권하였다.
“안돼.” 하고 순교자는 확고하게 대답하였다. “나는 거짓 교리를 가르친 적이 없다. 내가 나의 입술로 전파한 것을 이제 나의 피로 증거하려고 하는 것이다.”
장작더미에 불이 붙였을 때 그는 나무 타는 소리와 군중들이 떠들어대는 소리에데 불구하고 크고 명랑한 소리로 찬송을 불렀다. 마침내 불꽃에 의해 목소리가 막혔을 때 그의 목숨도 끝났다.
이 사건은 1415년 7월에 일어났다. 그후 곧 이어 그 같이 무서운 사건들이 계속되었다.

 

프라하의 제롬 이야기

 

보헤미아의 죵교개혁의 씨를 뿌린 후스의 친구며 동시에 같은 순교자인 제롬은 프라하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공부를 마치고 그는 유럽 지역을 두루 여행하였다. 여러 곳의 배움의 전당을 찾아가 보았다. 특히 파리대학, 하이델버그 대학 콜로그네 대학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을 방문하였다.
옥스포드에서 그는 위클리프의 글을 접하게 되었고 그것들을 모국어로 번역하였다. 프라하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공공연하게 위클리프의 교리를 고백하였고, 후스가 이미 그것들을 보헤미아에 소개하였음을 알고 그는 종교개혁 사업에 후스의 후원자가 되었다.
후스가 체포되어 콘스탄스 감옥에 투옥된 후에 몰래 그곳에 숨어 들어가서 그를 도피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자기가 친구를 돕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위험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고 콘스탄스를 떠났다. 그는 조금 떨어진 촌락 이베르링으로 갔다.
거기서 제롬은 황제께 호소문을 썼다. 만일 황제께서 자기에게 안전 통행증만 주신다면 총회 앞에 자신이 출석할 수 있다고 밝혔지만, 이 제의는 거절당했다.
그 후 그는 콘스탄스에 있는 공공장소에다, 특히 추기경의 집 대문에 대자보들을 써 붙였다. 그 내용은 지금까지 그의 인물됨과 교리에 대하여 많은 오해를 해 왔던 부분에 대하여 자진 출두하여 증거하겠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에게 과오가 입증된다면 그는 주장을 철회할 것이라고 하였다. 다만 그의 개인 신변에 대하여 안전을 종교회의가 보장해 주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하였다.
이들 대자보에 대한 답을 받지 못하고 보헤미아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는 미리 조심을 해서 콘스탄스에 있는 여러 명의 보헤미아의 귀족들의 서명을 받은 신분보증서를 몸에 지니고 떠났다. 그가 동원할 수 있는 권한 안에서 온갖 신중한 조치를 다 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슐츠바하의 공작의 저지로 도중에서 멈추었다. 공작은 그를 자기 성 안에 가두었다. 공작은 종교회의의 인정을 받을만한 일을 함으로써 그들의 호의를 얻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그가 제롬이라는 사실이 판명되자 그는 만족해 했다.

 

제롬이 형틀에 매달리다

 

종교회의는 즉시 제롬을 체포한 공작에게 감사하였다. 그리고 그를 지체 없이 포박하여 보내 줄것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제롬은 위험스런 형사범처럼 쇠고랑을 차고 종교회의 집무실로 끌려갔다. 조사를 마친 후에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두 발은 형틀에 채워졌다.
거의 반 죽을 때까지 다리를 형틀에 끼워 넣은 채 머리를 거꾸로 하고 매달려 있었다. 나중에는 좀더 심한 벌을 내리기 위하여 간수들은 그를 형틀에서 풀어주고 다시 지하감옥에 가두었다.
제롬은 그의 친구 후스가 순교할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후 종교 회의 앞에 다시 끌려나왔을 때 그가 로마교회에 대하여 말하고 글을 쓴 모든 것을 취소하기를 거절한다면 후스와 같은 형벌을 받는다고 위협하였다.
후스의 끔찍한 형벌이 두려워져서 제롬은 결심을 잊고 한순간 마음이 약해져서 위클리프와 자기 자신은 이단이며, 후스는 당연히 죽을 죄로 죽었다고 고백하였다.
그 결과 그는 잠시 동안 좀 더 친절한 대우를 받았다.

 

제롬이 심문을 받고 유죄판결을 받음

 

그러나 제롬의 원수들은 그의 진실성을 의심하였다. 그가 고소당한 모든 이단 혐의를 아주 강력한 어조로 공공연하게 시인하고 자기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그는 종교회의 앞에 끌려나갔다.
모든 사람들이 놀란 것은 그가 앞서 고백한 모든 것을 취소하고 자신이 기소된 이유에 대해서 변호할 기회를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요구는 거절되었고 그는 교황의 위엄을 조롱한 죄, 교황의 반대자, 추기경 및 고위 성직자들의 원수, 기독교를 미워하는 자 등의 죄로 기소되었다.
이들 죄에 대하여 제롬은 놀랄만한 웅변과 논리정연한 말로 대답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다시 감옥에 수감되었다. 제롬은 다시 한번 종교회의 앞에 끌려나와서 강퍅한 마음들을 녹일만한 설득력을 지닌 그의 웅변이 정의를 위해서 한 번 법정을 울렸다.
그러나 그것도 아무 소용없었다. 잔인하고 편협하며 고루한 자들이 그날도 지배했다. 그는 먼저 순교당한 고국의 친구 존 후스가 당한 것과 같은 형벌이 그에게 부과되었다. 그가 자기 주장을 철회할 것을 예상하고 이틀 동안은 그의 형 집행이 보류되었다. 클로렌스의 추기경은 그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허사였다. 제롬은 자기의 주장을 피를 흘려 확고히 하기로 결심하였다.
화형장으로 가는 도중에 즐거운 표정을 나타냈었다. 화형장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무릎을 끓고 기도하였다. 그후 그는 조용히 화형 기둥에 접근하였다.
형 집행자들이 그의 뒤로 가서 장작에 불을 붙였다. 그때 그는 소리쳤다. “이리 와서 내 눈앞에서 불을 붙여라. 불을 두려워했던 나는 이미 여기에 없다.”
제롬은 매력적인 용모와 풍채를 지닌 사람이었다. 화형을 당할 때에도 활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불꽃과 연기로 사람들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용기 백배하여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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