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분별

진리를 알게 하리니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요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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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에대한 질문과 답변

  • 관리자 (ehompy0429)
  • 2014-05-26 13: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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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W. Cloud
 
 
회개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영접식 기도주의’의 오류를 노출시킨 필자의 논문에 대해 친구들과 반대파들이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다음은 가장 많이 제기되었던 문제들에 대한 답변이다.
 
 
질문: 회개에 대해 설교할 필요가 있다면 어째서 요한복음에는 그것이 언급되어 있지 않은가?
 
 
답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네 가지 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성경의 어느 부분도 그 나머지 부분과 분리시켜 보아서는 안 된다.
 
 
요한복음에서는 동정녀 수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동정녀 수태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초대 교회 사도들이 복음을 어떻게 전도했는지에 대해 기술해 놓았으며, 회개에 대해 설교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내 준다(사도행전 2:38, 3:19. 5:31, 8:22, 11:18, 13:24, 17:30, 19:4, 20:21, 26:20). 누가 성경의 가르침을 분리시켜 본다고 할지라도 이로써 충분히 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교리나 의식 행위 등에 관한 문제를 성경의 어떤 특정한 부분에 바탕을 두고 보려고 하면서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무시하는 태도가 거짓 교사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식이다.
 
 
둘째, 요한복음에서 ‘회개’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어도, 회개라는 개념은 사용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구원을 얻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 있다고 하면서도 성경의 ‘믿음’이라는 용어에는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의미 이상의 뜻이 담겨 있음을 분명히 설명해 주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요 1:11, 12).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이란 구세주이자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받아들임을 뜻한다. 요한은 또한 구원이란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요6:35).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감이란 죄를 짓고 우상숭배하는 생활을 저버림을 뜻한다.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은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살전1:9)”라는 구절로 설명하고 있다. 구원이 그 이상이라고 주장한다면 신약성경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는 내용을 무시하는 셈이 된다. 요한복음 2:23-25에서는 주 예수께서 ‘당신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 모두에게 의탁하지 않았다고 하고 있다. 어째서인가? ‘믿는’ 사람들 가운데는 구원의 길로서 믿음을 찾는 사람들은 적었고, 대다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적을 행하는 자, 음식물을 제공해 주는 자, 정치적 압박에서 구해주는 자로만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요 주로 믿는 구원의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 요한복음 2:23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었던’ 사람들이 요한복음 6:66에서는 그리스도에게서 많이 물러갔다. 요한복음에서는 또한 구원은 언제나 개인의 삶에서 변화를 만들어 낸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며 살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구원자임을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고 한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요 8:31).”
 
 
또한 요한은 구원이란 ‘다시 태어남’이라고 했다(요한복음 3). 이는 아주 극적인 표현으로서, 구원이 개인의 삶에서 극적인 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요한은 또한 첫 번째 서한에서 구원에는 언제나 삶의 변화가 따른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서 구원의 3대 특징, 곧 순종(요한복음 2:3-4, 3:3), 사랑(요한일서 3:14), 진리(요한일서 2:20-27)을 들고 있다. 요한의 영감을 받은 저작물에는 ‘영접식 기도주의’란 없으므로, 성서에 근거하지 않은 의식 행위를 옹호하는 데 요한복음을 활용한다면 큰 잘못이다.
 
 
셋째, 회개에 대해 설교하지 않음을 정당화하려는 주장이 많지만, 그 기본 바탕은 성경이 공공연히 고백된 회개에 대해 설교하고 있다는 것이다.
 
 
회개가 오로지 믿음으로 귀결된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째서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고 설교하셨겠는가(누가복음도 요한복음과 마찬가지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또한 베드로는 어째서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행 3:19)”라고 했으며, 바울은 어째서 “하나님이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 17:30)”,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행 26:20)”고 설교했겠는가? 회개에 대해서도 설교해야 하고 믿음에 대해서도 설교해야 한다는 것이 그 답변이다. 이 교리는 긴밀히 연관되어 있지만 똑같지는 않다. 성경의 구원에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행 20:21)’이란 두 가지 점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것이 주의 사도들이 가르친 바이며, 그것만이 우리에게 오류 없는 지침이 되고 있다.
 
 
넷째, 구원을 위한 성경상의 회개와 성경상의 믿음은 너무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서 적절히 이해만 된다면 어느 쪽이 다른 쪽을 대신할 수도 있다.
 
 
그 두 가지는 똑같지 않더라도 사실상 분리시킬 수가 없다. 1925년 남부 침례교 회의의 침례교 신앙과 메시지에서는 “우리는 회개와 믿음이 신성한 의무이며 분리시킬 수 없는 은총임을 알고 있다”라고 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회개적인 믿음을 지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J. Frank Norris는 이것을 ‘참회하며 순종하는 믿음’이라고 표현했다. A.C. Dixon은 1915년 런던 메트로폴리탄 예배당에서 연설을 통해 “회개와 믿음은 ‘몸이 함께 붙어 있는 쌍둥이와 같다.’ 이 둘을 분리시키면 죽는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있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증거이며, 죄로부터 돌아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간다면 회개하고 있다는 증거이다.”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을 비롯한 신약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내용이다. 곧 성경상의 믿음에는 회개가 포함되어 있으며 성경상의 회개에는 믿음이 포함되어 있다.
 
 
신약성경 150구절 이상에서 믿음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고, 30구절 이상에서 신앙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고 있지만, 회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에서 필수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궁극적으로는 회개와 믿음이 하나이며 동일한 행위라는 말도 옳다고 할 수 있다. “너희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살전 1:9).” 회개는 믿음에 포함되어 있지만, 회개는 믿음이 아니고 믿음도 회개가 아니다. ‘믿고 있음’이란 ‘회개하고 있음’을 뜻한다. ‘회개하고 돌아감’이란 ‘믿음이 있음’을 뜻한다. 회개와 믿음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행 20:21).” “뉘우쳐 믿지 않았도다(마 21:32).”
 
 
회개는 거부하는(부정적인) 것이요, 믿음은 승인하는(긍정적인) 것이다. 회개는 내부를 바라보는 것이며, 믿음은 위를 바라보는 것이다. 회개는 우리의 불행을 바라보고 있지만, 믿음은 우리의 구원자를 바라보고 있다. 회개는 굶주림이고, 믿음은 열린 입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살아 있는 양식이다. (복음주의자 James A. Stewart의 「복음주의」49쪽)
 
 
복음주의자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ewart)는 오늘날 회개라는 말이 요한복음에 언급되어 있지 않은 만큼 회개에 대해 설교하는 일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보다 회개와 믿음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질문: 목사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이 많은데도 이른바 ‘영접식 기도주의’를 장려하는 오순절 잭 힐스 목사와 같은 사람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겠는가?
 
 
답변: 영접식 기도주의를 장려하는 목사들을 통해 사람들이 구원받는 일이 가끔있는 것은 사실이다. 필자도 개인적으로 그런 사람들을 얼마간 알고 있으며, 어떤 사람의 목회 활동을 통해 순수하게 구원받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주님을 찬양하고 있다. 또한 이런 사람들의 삶과 목회 활동에서 발견되는 그밖의 좋은 것들을 위해서도 주님을 찬양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필자를 보통 적으로 생각할지 몰라도, 필자는 그런 사람들을 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 잘못을 지적해 내는 것은 실제로 친절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아마 어떤 기독교 생활 영역에서는 필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행위를 발견해 낼지도 모르며, 필자도 그 점을 하나님 앞에 선뜻 인정한다. 하지만 인간의 삶과 목회 활동에서 선한 일들은 잘못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이는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을 옹호하는 사람들이나 ‘기독교적 록 음악’을 장려하는 사람들이 제기한 주장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에큐메니칼적인 복음주의나 복음적인 록 음악회를 비판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 행위들을 통해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혀 타당하지 않은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우리가 범사를 헤아리고(살전 5:21), 말과 행위마다 성경과 비교해 보고(행 17:11), 예언하는 자를 분별해야 한다(고전 14:29)고 요구하고 있다. 바울은 베드로가 선한 행위를 했는데도(갈 2) 베드로의 위선과 잘못을 공공연하게 비난했다. 그 하나님의 예언자는 여호사밧 왕이 선행을 했는데도 그 왕의 신성하지 못한 동맹을 비난했다(대하 18:2). 성경의 어느 구절에서도 선행을 했다고 해서 비난을 면하도록 해 주지는 않는다. 더욱이 어느 기독교 지도자의 목회 활동을 비판할 때에는 사적으로 그 문제에 대해 접근할 필요는 없다. 기독교 지도자의 공적 목회 활동을 다루는 것은 교회 신도들끼리 모여 문제를 다루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게 모여 있을 때에는 마태복음 18절에 따라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공공연하게 설교하고 기도를 드린다면, 역시 공공연하게 판단을 받아야 한다. 바울의 경우를 회상해 보라. 바울은 베드로의 위선을 공공연하게 비난하지 않았던가? 바울은 또한 디모데전서와 후서에서 여러 사람들을 비판하고 비난하면서 경고를 주었다. 하지만 바울이 그 사람들을 사적으로 다루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문제: 회개는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따라 인생도 변화하게 된다고 함으로써 ‘주인의 권한에 따른 구원’을 설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답변: ‘주인의 권한에 따른 구원’이란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그 말이 자신의 생명을 100%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면 필자는 그 ‘주인의 권한에 따른 구원’을 믿지 않겠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렇게 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영접해 주길 바라며 그렇게 하는 행위는 가장 사악한 구원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적어도 어떤 진정하고 분명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자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수백 번이나 ‘주’로 표현되어 있다. 사도들은 모두 예수를 ‘주’라고 불렀다(행 4:33). 나무형틀에 달린 도둑조차도 예수를 ‘주’라고 불렀다(눅 23:42).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죄와 우상숭배 행위를 뉘우치지 않은 것이다. 성경에서는 구원에는 섬기는 사람을 바꾸는 행위까지 포함된다고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주인의 권한에 따른 구원’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런 사람들에게나 관련된 일이다.
 
 
독립 침례교회의 활동을 전체적으로 고찰해 볼 때 복음 설교에서 회개가 강조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우려가 된다. 이따금 언급되고는 있다고 하더라도 사도들의 설교에서처럼 강조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영접식 기도는 강조된다. “이번 주 회합에서 교도소에 있는 80명이 구원을 받았다”라든지 “지난 해 우리 교회에서 857명이 구원을 받았다”라고 하는 것처럼 영접식 기도는 구원 행위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말들이 무엇을 뜻하는가? 일반적으로 여러 사람들이 죄인을 위해 기도를 드렸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 자체가 구원 행위인가? 그것이 회개인가? 그렇지 않다. 주의 이름을 부르며 회개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기도 중에 주를 부르는 사람들 가운데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필자가 ‘영접식 기도주의’를 추적해 본 결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뿐이었다. ‘구원을 받았다고’ 여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교회에 가서 침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라고 말한다면 감정이 상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 ‘새로운 개심자’에게 “하지만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이자 구세주로 영접하기 위해 기도를 드렸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말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에게는 구원을 위해 교회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회개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또한 대중들이 구원을 확신하고 있을 때 그것을 승인하도록 하는 구원 계획이 있다면, 그 어느 계획도 성서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독립 침례교회 목사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어떻게 우리의 운동에 그토록 깊이 스며든 ‘영접식 기도주의’의 오류를 지적하지 않았는지 필자는 이해할 수가 없다. ‘주의 권한에 따른 구원’이란 말이 어떤 완벽한 제자가 됨을 의미한다면 필자는 그 구원을 믿지 않겠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는 모두 마찬가지로 멸망하리라”라는 구절과, 회개는 하나님과 죄에 대한 마음의 변화로서 삶의 변화까지 가져온다는 말에 대해서는 믿는다. 회개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태도를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행위이므로, 회개하는 사람에게 그런 태도 변화가 없다면 회개하고 있지 않은 것이며 구원받았다고 할 수도 없거니와 ‘영원한 보장’을 받고 있다고도 할 수 없다. 이 점이 아주 중요한데, 보통 간과되기 쉽다. 또한 ‘주의 권한에 따른 구원’은 가공의 인물에 대해 사용된다.
 
 
성급히 결론을 내리건대, 기독교도는 세속적일 수 없으며, 그리스도가 개인의 삶을 완벽히 통제하지 않거나 그 개인이 의심을 품고 있는 한 그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일부 근본주의 침례교도들이 가르치고 있는 구원의 교리를 필자는 받아들일 수 없다. 되풀이해서 말하건대, 죄인이 구원을 받거나 자신의 구원 행위를 내보이기 위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행위는 불가능하며, 그 행위는 지금까지 마련된 구원의 방식 가운데 가장 심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위험한 교리에 따라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예수의 피 흘리심을 전적으로 믿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경험을 검토해 보게 된다. 우리는 구원이 개인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으므로, 대담하게 이에 관해 설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은 구원을 받았지만 그것을 전혀 증명할 길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기만당하고 있는 것이다(고후 5:17, 딛 1:16). 그러나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판단하기 위한 근거로서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계속 검토해 보는 행위는 아주 위험스럽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알기로 인간 가운데 가장 독실한 신도였던 사도 바울도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8)”라고 했다. 새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마다 모두 바로 그런 경험을 한다. 낡은 육체는 구원을 받은 뒤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필자는 영원한 구원을 받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기에 오늘날 구원을 받고 주님을 따르고 있다. 그 까닭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라고 했기 때문이다. 필자의 믿음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지, 필자에게 있지도 않거니와 필자의 변화된 삶이나 기독교적 경험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필자의 경험은 성경이 요구하고 있는 내용에 비추어 볼 때 기껏해야 저급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거룩함의 온전함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필자가 이 온전한 기준에 맞추어 살아왔다고는 할 수 없다. 영광스러운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속에 있는 입장에서만 온전하다고 할 수 있다. 거룩한 하나님이 필자를 받아들이고 있음은 필자가 ‘사랑하는 자 안에’ 있기 때문이다(엡 1:6). 필자의 입장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에 계속 마음의 초점을 맞추고 있지 못하면 필자는 아주 낙담하게 된다. 곧 파도에 떠다니는 병과 같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하면 ‘영혼의 닻’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구원을 그렇게 알고 있어야 하며, 그것이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확신이다(히 6:19).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활의 어느 영역에서나 절대적인 주로 섬겨야 한다는 ‘주인의 권한에 따른 구원’을 설교하는 것은 그런 입장과 의식 행위, 의롭다고 인정받음, 성화(聖化)를 혼동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의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믿는 오순절 교회나 카리스마파 교회의 오류와 유사하다. 이러한 거짓 가르침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작고한 Harry A. Ironside가 「거룩함: 거짓과 진실」이라는 저서에서 생생하게 증언해 놓았다(이에 대해서는 말세의 배교자 데이터베이스 가운데 카리스마파의 웹사이트 Way of Life, 곧 http://wayoflife.org/~dcloud 참조).
 
 
아이론시드(Ironside)는 젊은 목사로서 처음에는 구세군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때 그 목사는 ‘제2의 축복’이라는 경험을 하면, 그에 따라 자신의 오래된 천성을 완전히 조절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진실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 모두 그렇듯이 이 목사도 그런 경험을 몹시 갈망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죄악과 영적 불완전성에 대해 고뇌에 빠졌다. 그래서 ‘축복’, 기도, 단식, 소리쳐 울기, 분투, 희생, 믿음 등을 열심히 추구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그런 경험’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 뒤 증언회에서 이 목사는 자신이 그 ‘경험’을 얻었으며, 자신의 죄악에 대한 투쟁은 끝났노라고 즐겁게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물론 얼마 뒤에는 자신이 기만당했으며 죄악에 대한 투쟁이 자신의 내부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너무 낙담한 나머지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옛 애인에게 돌아가려고 결심했다. 그러나 병원에서 성인과 같은 기독교인들을 만나 성경에 바탕을 둔 성화(聖化)에 대해 가르침을 받게 되었고, 그 진실의 전도를 통해 그 목사는 그리스도에게 돌아가 오랫동안 알찬 목회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여러 독립 침례교회 모임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음과 성화(聖化), 입장과 의식 행위에 관한 건전한 가르침이 진정으로 결여되어 있음을 강조했다. 그런 가르침이 없으면 새로운 회심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지니게 되는 입장에 따른 안정감과 승리를 적절히 이해함이 없이 육신과 싸우게 된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주인의 권한에 따른 구원’이 어떤 형태로든지 완벽한 제자가 됨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믿지 않겠다. 그러나 성서에 바탕을 둔 회개가 죄인의 삶에서 오래된 주인 역할을 하고 있는 죄와 자신을 새로운 주인 예수 그리스도로 교체하는 죄인 마음의 변화라는 점은 믿는다.
 
 
질문: 회개가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마음의 변화라고 주장함으로써 ‘행위’에 따른 구원을 설교하고 있지 않은가?
 
 
답변: 회개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이다(행 11:18, 딤후 2:25). 더욱이 회개 자체는 기독교인의 삶에서 선한 행위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위의 원인이 된다. 이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행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엡 2:8-10, 딛 3:4-8).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도 행위에 따른 구원을 믿지 않는다. 구원은 행위나 거룩한 의식없이도 은혜만으로,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만으로도 얻을 수 있다. 구원은 전적으로 주님께 달려 있다(요 1:12-13).
 
 
질문: 아무도 단번에 즉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믿는가?
 
 
답변: 필자는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는 것만큼 빨리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곧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는다. 이는 전적으로 주님께 달려 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기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복음주의자인 필자가 하는 일은 사람들의 삶에서 움직이며 확신과 회개와 믿음을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손을 찾는 것이다. 구원은 즉각적이다. 구원은 탄생이다. 그러나 구원에 앞서 이해와 확신이 있어야 한다.
 
 
질문: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고 믿는가?
 
 
답변: 그렇지 않다. 고백이나 기도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구원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다(사도행전 20:21). 구원이란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믿는 것이다(로마서 10:9-10). 마음속으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서도 공공연하게 머리만으로도 그리스도에 대해 고백할 수도 있다.
 
 
질문: 죄인의 기도를 믿지 않는가?
 
 
답변: 죄인이 기도를 정확히 사용한다면 복음에 대한 도움으로 기도함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죄인이 기도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는 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구원이란 하나님께 대한 회개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라고 가르쳤다(행 20:21).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해 주신 것을 전적으로 믿으며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 드리면서 회개하는 죄인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믿음도 없고 진실한 동기도 없이 회개하지 않은 채 기도를 드리는 죄인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 기도만으로는 아무도 구원을 얻지 못한다. 누가복음 18장의 세리(稅吏)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함으로써 구원을 얻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발설함으로써만 구원을 얻은 것은 아니다. 자신의 죄와 가치 없음을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회개하는 태도와 믿음으로 자신을 낮추었기에 구원을 얻은 것이다. 그 곁에 있던 어떤 사람이 세리처럼 회개하지도 않고 믿음도 없이 똑같이 기도를 드리려고 했다면, 그런 단순한 기도를 통해서는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필자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다가가도록 할 목적으로 죄인의 기도에 대해 언급하려 한다면 반대하지 않겠다. 필자가 구원을 받을 때는 공식적으로 죄인의 기도를 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주님을 부르며 죄악에서 구원해 달라고 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하시길 믿었다. 하나님은 플로리다 주 데이토나 해변에서 그날 밤 기록된 말씀을 통해 삶에 대해 회개를 하도록 해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께 향한 필자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사고를 결정할 때 죄인의 기도를 아주 유용하게 활용한다. 죄인의 기도는 죄인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도달하도록 도와 주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회개와 믿음과 뉘우침이 없이 죄인의 기도만 있다면 그 사람의 삶에서 하나님의 구제력은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어떤 면에서 거듭나기 전의 죄인의 기도는 헛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렇지만 로마서 10:13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그러나 그 구절은 문맥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 문맥을 살펴보면, 죄인은 제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제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다(9절). 또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리라(10절)”고 했다. 그러고 보면 구원은 마음의 문제이다. 죄인을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외치는 행위는 마음으로 믿는 회개자에게서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죄인이 하루 종일 하나님께 외쳐 보아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예수님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여도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마 7:21-23). 야고보서에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어도 구원받지 못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야고보서 2).
 
 
질문: 회개는 믿음과 같지 않은가?
 
 
답변: 회개가 믿음과 같다는 생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짐으로써 답변하겠다.
 
 
(1) 회개와 믿음이 동일하다면 어째서 성경에서는 그토록 명백하게 구분을 해 놓고 있는가?
 
 
그 구절은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 20:21)”이다. 사실 회개와 믿음은 반드시 그때마다 분리시켜 볼 필요는 없다고 하더라도 별개의 행위로 보아야 한다. 회개란 자신의 죄와 하나님께 대한 거역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죄를 짓는 행위에 대해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회개란 하나님께 대한 항복이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용서해 주실 것을 믿는 것이다.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해 인간이 반응할 수 있는 두 가지 측면이다.
 
 
(2) 회개와 믿음이 동일하다면 어째서 신약성경 설교자들은 회개를 찬양하는가?
 
 
회개에 대해 설교하지 않음을 정당화하려는 주장은 많지만, 그 기본적인 바탕은 성경이 회개를 찬양하고 있다는 데 있다. 회개가 전적으로 믿음과 동일하다면 어째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고 했겠는가? 또한 베드로는 어째서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행 3:19)”라고 했겠는가? 또한 바울은 어째서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행 17:30).” 또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행 26:20)”라고 했겠는가?
 
 
(3) 회개와 믿음이 동일하다면 어째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회개가 대사명(大使命)이라고 했겠는가?
 
 
곧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누가복음 24:47)”이라는 구절이다. 그 답은 회개에 대해서도 설교하고, 믿음에 대해서도 설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긴밀히 관련되어 있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성경의 구원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포함된다. 곧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사도행전 20:21)”이라는 구절을 보라. 이것이 바로 사도들이 설교한 바이며, 이것만이 우리의 절대적인 지침이다.
 
 
질문: 회개가 죄로부터 돌아섬을 의미한다면, 죄인이 완전하게 돌아설 수는 없기 때문에 결국 회개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답변: 회개가 죄로부터 완전무결하게 돌아섬이라고 정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군가가 그렇게 했다면 잘못이다. 믿는 사람이라도 낡은 본성은 여전히 남아 있게 마련이므로 세속에 있는 한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요한일서 1:8-10). 믿는 사람이 자신이 죄가 없다고 한다면 자기 기만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이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의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한일서 2:3-4). 회개한다고 해서 죄로부터 완벽히 돌아선다는 뜻은 아니다. 생활 방식에서 죄로부터 돌어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주인을 바꾼다는 뜻이 들어 있다. 곧 주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삼고 죄와 자기 의지로부터 돌아선다는 뜻이다. 그런 변화의 증거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요한일서 2:3-4 및 요한일서 3:3의 구절을 부정하는 셈이 되고 만다.
 
 
질문: 죄인이 저주를 받아야 한다면 믿지 않는 죄밖에 없지 않은가?
 
 
답변: 회개란 믿지 않음에서 믿음으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지옥에 빠지게 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므로 죄인이 회개해야 할 것은 믿지 않은 죄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인간이 지옥에 빠지게 되는 데는 믿지 않는 죄만이 아니라 다른 죄도 모두 포함된다. 로마서 5:12에서는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고 했다. 아담의 죄는 믿지 않았던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지 않았던 데도 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롬 5:19)”란 구절을 보라. 에베소서 5:6과 골로새서 3:6에서는 음행, 탐심, 사욕, 우상숭배와 같은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고 했다. 곧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엡 5: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5:6)”란 구절을 보라. 요한계시록 20:12-15에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의 행위대로 불못에 던지울 것이라고 했으며, 21:8에서는 믿지 않는 죄야말로 인간을 영원한 하나님의 도시 밖으로 내쫓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行淫者)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硫黃)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성서에 바탕을 둔 회개에는 인간의 죄에 대한 회개, 곧 믿지 않는 죄뿐만 아니라 그밖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에 대한 회개까지 모두 포함된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계2:22).”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계16:11).”
 
 
회개는 하나님 자신, 전반적인 삶이나 특정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역할과 관련된 마음자세를 바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누구인가? 내가 하나님인가? 내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누구인가? 힌두교도들이 처음 복음을 들으면 하나님을 다른 신들과 마찬가지로 여기려 한다. 일반 미국인들도 바로 그렇게 하려고 한다. 일반 미국인들은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자신의 죄를 저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순종하려 하지 않는다. 복음에서 책망하는 내용을 참고 들으려 하지 않는다. 천국행 티켓만을 원하며 문제점을 도와주기만 바란다. 회개에는 회개하려면 내버릴 것도 있어야 한다. 인간은 일생 동안 오로지 한 가지 길, 곧 죄악과 자기 고집에 찬 길만을 가게 된다. 그러나 회개하면 하나님의 길을 가게 된다. 생활 양식에서 진정으로 눈에 띄는 변화가 없다면 어떻게 그처럼 회개할 수 있겠는가? 결코 가능하지 않다.
 
 
질문: 성경 어느 구절에서 인간은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거나 회개는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라고 하고 있는가?
 
 
답변: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옹호한 선지자 에스겔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에스겔 18:30에서 회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침례 요한은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마 3:8)”라고 요구하면서 회개에 대해 설명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다고 하면서 회개에 대해 설명하셨다(마 12:41). 우리는 요나가 행한 설교의 극적인 결과에 대해 알고 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했다. 사도 바울은 진정한 회개는 순종의 열매를 낳는다고 하며 회개에 대해 설명했다(행 26:20, 고후 7:10, 딤후 2:25-26). 사도 요한은 회개는 순종을 낳는다고 하며 회개에 대해 설명했다(계 2:5, 21, 22, 3:3, 19, 9:20, 21, 16:9, 11).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계2:22)”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卜術)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계9:20, 21)”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계 16:11)”
 
 
질문: 귀하는 ‘영접식 기도주의’를 저주하는데, 그 말은 구원이 복잡하며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단순히 믿을 수가 없는 뜻인가?
 
 
답변: 우리는 분명히 구원이 복잡하지 않다고 믿는다. 필자는 1966년 「회개와 주인의 권한에 따른 구원」이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필자는 ‘영접식 믿음주의’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원은 쉬우며 ‘믿음’이 있으면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David Cloud, 「회개와 주의 권한에 따른 구원」, O 디모데, 13권, 7호, 1996)
 
 
또한 필자가 1992년 저술한 소책자 「영접식 기도주의와 성경의 복음주의」에서 다음 구절을 참고해 보라.
 
 
“오늘날 교회에는 복음주의적 방법론이 나돌고 있다. 이는 복음에 바탕을 둔 설교처럼 보이지만 역병이나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쉬운 믿음주의’라고 하지만, 필자는 그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믿음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요구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에베소서 2:8-9).’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구원이란 믿음이 있으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 쉽도록 만들어 놓으셨다. 어린이도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 마음이 약한 자도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 구원은 죄인이 자신을 낮추고 회개해야 하는 일만 제외하고는 어렵지 않다.
 
 
이 문제를 더 정확히 표현하면 ‘영접식 기도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사람들이 기도를 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방법이다. 필자가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길 바란다. 필자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로마서 10:13)”고 한 구절을 믿는다. 회개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구원을 요청하는 자는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필자는 구원을 찾기 위한 기도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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