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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딤후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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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똑같다

  • 관리자 (ehompy0429)
  • 2014-05-23 15: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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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락크만의 이단 교리를 경계하라]
 
 
 
신약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구약에서 또 한 가지 배울 점은 구원의 방식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스코필드 참고 성경(Scofield Reference Bible)에서 대략 설명해 놓은 7가지 기본 율법을 믿지만, 오히려 스코필드는 여러 가지 율법이 구원받는 방법에서도 차이가 난다고는 믿지 않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 4: 3과 갈라디아서 3: 6에 창세기 15: 6("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를 인용하여 아브라함이 율법 앞에서 구원받은 방식과 똑같이 우리도 구원받았음을 보여 주었다.
 
또한 로마서 1: 17에 하박국서 2: 4("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를 인용하고 로마서 4: 6-8에는 시편 32: 1-2("허물의 사(赦)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福)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를 인용하여 율법 시대에 그 구원 방식이 똑같음을 보여 주었다.
 
또한 바울(로마서 10: 13)도 베드로(사도행전 2: 21)도 요엘 2: 32("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를 인용했다. 이 구절은 환난받는 성도들을 묘사하고 있으며, 그 사람들이 그 당시 구원을 받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지금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알고 있던 성경이 능히 디모데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였다고 하는데 그 성경은 곧 구약 성경이다. (디모데후서 3: 15).
 
이와 마찬가지로 영광스러운 진실은 다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로마서 4: 23-24
 
로마서 10: 11에 인용된 이사야 28: 14
 
고린도후서 6: 2에 인용된 이사야 49: 8
 
갈리아서 3: 8에 인용된 창세기 12: 3
 
갈라디아서 3: 10에 인용된 신명기 27: 26
 
히브리서 10: 37-38에 인용된 이사야 26: 20 및 하박국서 2: 3-4
 
 
구약 시대에는 희생의 큰 요구 조건이 큰 진리 두 가지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 진리는 (1)죄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피를 흘리고 죽을 필요가 있다는 것과 (2)지금까지 완전한 희생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발꿈치가 부상을 당하고, 또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분을 찾고 있었다. (창세기 3: 15). (브루스 래키, 「귀하는 성경을 믿을 수 있습니까?).
 
 
1996년 3월 4일 우리는 근본주의 침례교 뉴스 서비스를 통해 앞의 논문을 출판했다. 이 논문이 출판된 바로 그날 우리는 편지를 받았는데 목사의 친구가 이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도전한 것이었다. 그 분이 제기한 요점은 괜찮았으므로 먼저 개인적으로 그 분에게 회신을 보내고 다음에 그 내용을 추가로 출판하기로 했다. 논쟁을 하자는 것이 우리의 목표는 아니다. 이 주제에 대해 우리가 정확히 믿고 있는 바에 대해 추가 정보를 제공해 주려 할 뿐이다. 우리는 서로 이해해야 한다. 먼저 편지의 어떤 발췌 문장에는 도전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도전은 친절하고 부드럽게 제기되고 있었기에 우리는 그 점에 대해 깊이 감사드린다. 그 글에서 개인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우리 입장과 관련이 없는 부분은 필자가 삭제했다.
 
 
먼저 저는 구원이 이 시대에 그리스도가 행위를 마무리할 때 은혜에 따라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지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라고 밝혀 두겠습니다. 반면에 나는 구원이 구약에서든 신약에서든 같다는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런 입장을 취하면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라는 강요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받은 논문에서 귀하가 언급한 여러 가지 구약이나 신약의 구절과 관련된 논쟁에 대해서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담과 이브 시대에도 있었고 그 뒤로도 시대를 거듭하며 계속 존재했습니다. 저는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로 계시됨은 이 시대에는 알 수 있을지 몰라도 사전에 알 수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구절과 사례가 제 입장을 '입증'해 줄 수 있는지는 귀하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교리를 예시해 줄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사례에 접하고 나서 저는 구원이 이 시대에 옳다고 통용되는 것과는 다르다고 확신했습니다. 귀하는 '우리는 환난받는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옳다고 생각한다. 그 성도들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것인데(요한계시록 7: 14), 어떤 죄인이라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발판은 그것 뿐이다.'라고 기술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7: 14대로 환난받은 성도들이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것이란 점에 대해서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렇습니다! 역사 전체의 환난기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피로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제 졸견(拙見)으로 볼 때 그 성도들이 구원을 받고 머물러 있으려면 '그대로 지켜나가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곧 요한계시록 14: 11-12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저는 환난받은 어느 성도가 짐승의 표(標)를 받았다면 구원받지 못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0: 4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標)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니."
 
또한 마태복음 24: 13에서는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5: 31-46은 구원이 그리스도를 믿는 일뿐만 아니라 훌륭한 행위를 함에 따라서도 조건적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우리 교회 시대의 구원받는 자에게 강요하려면 구원은 어느 시기에도 똑같다는 신학 내용을 성도들에게 주입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예는 요한계시록 마지막 부분의 구절(22: 14-15)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을 보면 저의 구원과는 생소한 그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생명 나무에 나아가기 위해 그렇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일을 하지 않고도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빌레몬서를 통한 사도행전 참조). 이 구절은 분명히 이 환난 시기가 아닌 시기의 다른 개인 집단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와 달리 해석하면 그 본래 의미와는 다른 뜻을 강요하게 되는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형제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믿지 않는다고 하여 비난하려는 불합리한 입장을 취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것이 아주 불합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입장이 다른 성도들을 무신론자라느니 이단이라느니 배교자라느니 하면서 매도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저 그 사람들이 잘못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이상입니다. 대단한 말은 아닙니다.
 
어쨌든 저는 귀하의 목회 업무를 지원해 주고 있는 친구의 한 사람으로 저를 간주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다음은 클라우드(Cloud) 형제가 이 분에게 보낸 회신이다.
 
 
귀하가 관심을 보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제 입장은 아주 간단합니다. 또한 반드시 귀하가 동의해 주길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귀하를 이해시키도록 하고는 싶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의 깊게 보아주시길 바라겠습니다.
 
 
Ⅰ. 저는 귀하의 입장이 어느 것이나 신약에서 구원에 대해 명백히 말하고 있는 내용과 모두 상반된다고 봅니다.
 
성경은 문맥 속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곧 앞뒤의 문맥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의 문맥도 고려해야 하고 성경이 그 특정 교리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내용도 모두 고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안식일 예수 재림교(Seventh-day Adventists)가 어떤 구절에서는 영혼의 수면을 가르치고 있다는 주장을 하도록 허용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성회(Assembly of God)가 다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은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주장을 하도록 허용하거나, 아니면 카톨릭 교회가 성경에서 사도의 계승과 진정한 존재를 찾도록 허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입니다.
 
 
다만 저는 환난받는 성도들이 믿음과 행위의 결합으로 구원된다든지, 또는 피와 믿음은 은혜와 행위가 서로 배타적이라는 교리하고 하는 성경의 가르침만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11: 6). 이 구절은 단순히 이 시대의 구원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거슬러 올라가 구약을 가리키기도 하고 미래를 향해 이스라엘의 구원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문맥입니다. 이는 로마서 4장의 문맥이기도 합니다. 거기에서는 구원이 행위 없이 은혜로 이루어진다고 평범하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구절은 거슬러 올라가 율법 이전(1-5절) 및 율법 시기(6-8절) 동안의 구약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구약의 성도 아브라함이 어느 시기에 있어서나 구원의 전형이 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4: 9-25).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롬4:16). 저는 귀하가 이를 교회 시기의 성도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귀하는 "이 구절을 우리 교회 시대의 구원받는 자에게 강요하려면 구원은 어느 시기에도 똑같다는 신학 내용을 성도들에게 주입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행한 바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Ⅱ. 귀하가 인용한 구절이 반드시 영원한 구원은 어떤 행위나 믿음 유지로 얻을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귀하가 인용한 구절 가운데 두 구절만이 환난당하는 자의  구원은 행위로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귀하는 "환난당하는 자로 어느 성도가 짐승의 표(標)를 받으면 구원받지 못할 것"으로 믿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 명백히 말하고 있는 구절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귀하는 요한계시록에서 3부분을 인용했지만, 어느 구절도 그 점에 대해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그 구절들은 모두 인내와 행위는 구원의 증거임을 가르치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구원은 잃어버릴 수 있음을 가르치기 위해 아르미니안이 사용했던 여러 구절에서는 실제로 인내가 구원의 증거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히3: 14, 6: 9, 10: 38-39 등). 이 구절들은 귀하가 인용한 구절들을 가르치는 데 아주 근접해 있습니다. 제가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곧 이 구절들은 다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이 구원을 잃을 수 있음이 다른 곳의 여러 구절에서는 명백히 달리 언급하고 있는 사실이라고는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성경의 개별 구절을 성경 전체의 문맥에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귀하가 인용한 구절에 제가 접근하는 방식입니다.
 
요한계시록 14: 11-12는 어떻습니까? 저는 그 구절에서 행위에 따른 구원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그런 교리를 구절 속에 읽어 넣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그 자체는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구절들은 그저 성도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인내하는 것이 진정한 성도다움과 진정한 믿음의 증거임을 뜻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 성경 구절은 많습니다.
 
 
요한계시록 20: 4는 어떻습니까? 이 구절도 그 성도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짐승을 숭배하지 않음으로써 구원을 얻었다고 명백히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짐승을 숭배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행위가 구원에 도움이 되었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22: 14-15는 어떻습니까? 이 구절도 명령을 행함이 생명의 나무에 나아가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명령을 행함과 생명의 나무로 나아감은 분명히 관련이 있긴 하지만 반드시 직접적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증거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사도가 로마서 내에서 기술한 구원의 교리와 부합합니다.
 
마태복음 24: 13은 어떻습니까? 이 구절에서 구원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저는 그 말이 행위나 인내에 따른 구원을 가리킨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그 말은 이 주제에 대해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고 있는 내용과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추측하기로는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또한 이 구절이 일종의 인내에 따른 구원을 가르치고 있다고 믿을 필요도 없습니다. 인내는 아주 쉽사리 구원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 구절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0: 27, 고린도전서 15: 2, 골로새서 1: 22-23, 히브리서 3: 14, 6: 9, 10: 38-39, 요한일서 3: 3 등입니다. 또한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구원이 언제나 영원한 구원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2: 15, 4: 16, 히브리서 5: 7, 11: 7, 야고보서 5: 15, 베드로전서 3: 20, 베드로후서 2: 5, 유다서 1: 5 등). 마태복음 24: 13에 언급된 구원은 환난 시기 동안의 육체적 생활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25: 31-46은 어떻습니까? 민족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한 태도로 증명할 수 있듯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란 사실을 바탕으로 평가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귀하의 견해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귀하가 표명해 주신 관심과 태도에 감사드립니다. 어째서 한 마음이어야 할 성도들이 서로 친절할 수 없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래키(Lackey) 박사의 논문에 제가 다시 추가한 글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그 글에서 저는 제 입장을 분명히 표명했으며, 귀하가 편지를 보내면서 제 개인적 입장을 진정으로 전달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형제님! 주의 축복이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귀하는 진정 친구이며 그렇게 주께 기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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