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딤후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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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침례파의 역사(1)

  • 관리자 (ehompy0429)
  • 2014-05-23 15: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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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기쁨에 넘쳤다. 일부가 물에 빠져서 죽음을 당하는데도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찬송을 부르면서 다음에 있을 자기의 죽음을 기쁘게 기다렸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는 진리에 굳게 섰고 하나님께 받은 신앙을 굳게 지켰다.

잘못 인식된 재침례파

1524년, 초기 형태대로 남아있던 독일과 기타 여러 나라의 형제 교회들은 1467년 로타에서 한 것과 동일한 행동을 취하였다. 믿는 자들의 모임은 독립적이고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을 준행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전번에 로타에서 행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믿는 자로서 아직 침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물 속으로 잠기는 의식을 치렀다. 이로써 그들은 ‘다시 침례 받는다’는 뜻으로 ‘재침례파’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이는 그들이 새로운 교파를 만든다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어 주기 위하여 모욕적으로 붙여진 것으로 정작 당사자들은 싫어하는 호칭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질서와 도덕을 뒤엎으려는 공산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과격한 부류의 사람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그것은 형제단을 박해하던 사람들이 마치 위험한 무질서 세력을 억압하는 것인 양 정당성을 얻고자 그러한 명칭을 사용한 것에 불과하였다. 초대교회 때 일어났던 것과 똑같은 일이 16세기에 반복되었다. 그 당시의 종교적 논쟁기에 흔히 일어나던 일처럼 절제되지 않은 언어의 폭력을 감안하여 보면, 그들이 손수 남긴 저작물이나 그들에 관한 기록을 직접 살펴보는 일이 무엇보다 중하다고 할 수 있다.
쾰튼 대주교가 주재한 회의에서 ‘재 침례파 운동’에 대하여 찰스 5세 황제에게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재침례교도들은 스스로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 역사와 법률이 증명해 주듯이 천년 이상 동안이나 그들의 선조들이 지켜왔던 대로 자기 것을 주장하지 않고 물건을 통용하는 공동체를 소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스페이어 의회가 해산될 즈음, ‘새로운 재침례교도’는 기실 수 백년 전부터 정죄를 당해왔고 ‘관습법으로 금지되었다’는 말도 있었다. 사실 신약성경에서 가르치고 기록한 대로의 침례를 베푸는 일이 1200년 이상 동안이나 법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사형으로 다스려 왔던 것이다.
르네상스 시기의 전반적인 분위기 덕분에, 박해를 피하여 지하로 숨었던 많은 믿는 자들의 모임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리용의 어떤 형제단을 향하여 발표되었던 종교회의의 칙령에는 “왈도의 잿더미에서 불씨가 되살아났으므로 가혹하고 무거운 형벌로 본떼를 삼을 필요가 있다.”는 구절이 있다. 또한 스위스의 계곡 지역에도 많은 믿는 자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불렀고, 순교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는 게 아니라 수 세기 동안 이단으로 박해당해왔던 사람들의 증거를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박해를 받는 신자들이 종종 상인동업조합이 제공해주는 안전한 곳으로 도피할 수 있었던 데 비해, 스위스의 경우에는 대부분 산악 지역으로 피신하였다. 종교 개혁기 동안 이 지역에는 많은 신자들이 모여들었는데 기존의 교회들과 연합하거나 새로운 교회들을 세워서 로마 카톨릭이나 루터 교회와 같은 국가 교회들을 놀라게 하는 행동들을 하였다. 이 모임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이 흐름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어떤 사람은 쓰기를, “1526년에 새로운 단체가 생겨나 신속히 확산되었는데 그들의 주장은 곧 전국적으로 번져가서 하나님께 열심을 가진 많은 성실한 사람들이 그 운동에 가담했다.”고 하였다. 그들은 사랑과 믿음 그리고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고난 중에도 겸손하게 인내하며 연합과 사랑의 표시로 서로 떡을 나누었고 신실하게 서로를 도왔다. 그들은 단합된 힘으로 급속한 성장을 이룩하였으므로 혁명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많은 지역에서 혹독한 박해를 당했지만, 혁명적인 사상과는 결코 무관하였다.

휩마이어와 그의 사역

형제들은 성경만 따르고 인간적인 지배 아래에는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한편 지도자가 되기에 합당한, 성령의 은사를 갖춘 사람들을 장로와 감독으로 존중하였다. 이렇게 인정받은 사람 중에 유명한 사람이 휩마이어였다. 그는 프라이부르그 대학에서 수학하였고 잉골슈타트 대학의 신학교수로서 왕성한 활동을 한 사람으로, 레겐스부르크 대성당의 설교자로서 임명받았을 때(1516) 많은 청중들이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3년 후에 그는 빌드슈트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그는 루터의 가르침을 받아 영적인 변화를 체험하였고 또한 ‘보헤미아 이단’이라 불리우는 보헤미아 형제단의 가르침에도 영향을 받았다.
1524년 1월 11일, 그가 자기 집에 초대한 모임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각자의 성경을 들고 참석하였다. 그는 모임의 목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제함으로써 서로를 도와 그리스도의 양들을 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함이라고 설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사역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도들은 함께 모여서 신앙에 관한 어려움을 다루기 위하여 의견을 모으는 관습이 사도시대부터 있음을 상기시켰다. 이 모임에서 제기된 많은 문제들은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 그 성경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고 그는 역설했다. 또한 휩마이어는 참석자들에게 형제애에서 우러나온 식사를 정성껏 대접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신의 생각과 교훈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거룩하고 우주적인 교회란 한 목소리로 한 분 주님, 즉 한 분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의 믿음을 가지며 한 가지의 침례를 받는, 경건하고 믿음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요, 성도들의 교제이다.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거할 수 있는 곳은 그리스도인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성별된 공동체이다.”
그리고 그는 “교회에는 두 종류 즉 우주적 교회와 지역 교회가 있다.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지역교회란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 보이는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 우주적 교회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또 휩마이어는 물건을 통용하는 공동체의 목적은 어려움을 당하는 형제들을 항시 도와주는 데 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청지기로서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는 죄 때문에 권세가 세상의 정부에게 위임되었고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거기에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류의 모임이 바젤에서 자주 열렸는데 거기에서 휩마이어와 그의 친구들은 성경을 열심히 참고하여 제시된 질문에 대답하였다.
당시 바젤은 커다란 영적 활동의 중심지였다. 이곳의 인쇄공들은 이단으로 낙인찍힌 책들을 아무 두려움 없이 인쇄해 내었으며 여기서 인쇄된 마르시글리오나 위글리프의 책들은 전 유럽으로 퍼져갔다. 또한 성경을 연구하는데 휩마이어와 동역했던 사람들 중에는 놀라운 재능과 능력을 가진 형제들이 있었다. 그 중에 특히 로이블린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전에는 들어볼 수 없었던 아주 건전하고 놀라운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해 내어서 청중을 끌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때 그는 바젤에서 사제 생활을 하기로 했는데 그때에도 그는 성체절기의 행렬에서 성체 안치기 대신 성경을 들고 가기도 하였다. 그는 침례를 받고 쮜리히 가까이에 살았을 때 당국으로부터 추방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독일과 모라비아에서 계속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바젤에는 외국으로부터 오는 형제들도 있었는데 이들을 통하여 바젤의 교회는 다른 나라의 교회들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외국에서 온 사람 중 영국 출신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크로쿠스라는 지식인과 기타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온 다른 많은 사람들도 있었다.
1527년 또 다른 형제단 회의가 모라비아에서 개최되었을 때 휩마이어도 거기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는 레온하르트 백작과 한스 백작의 보호를 받았는데 레온하르트 백작은 이 모임에서 휩마이어로부터 침례를 받았다. 휩마이어도 여기에서 2년 전에 로이블린으로부터 침례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119명이 침례를 받았고 나중에는 휩마이어에게 또 다른 300명이 침례를 받았는데 그 중에 발드슈트 시민의 딸인 그의 아내도 있었다. 그렇지만 휩마이어와 그의 아내는 오스트리아 군대에 쫓겨 모든 것을 버린 채 쮜리히로 도망을 하였고 거기서도 쯔빙글리파에 의해 발각되어 투옥되고 말았다.
당시의 쮜리히는 독일의 루터보다 먼저 스위스에서 종교개혁을 시작했던 쯔빙글리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그 때는 루터의 가르침과는 약간 다른 스위스 개혁가들의 주장이 스위스의 많은 지방들과 멀리는 독일 지방으로까지 퍼져 가는 중에 있었다.
쮜리히의 시 의회는 휩마이어와 쯔빙글리 사이에 논쟁을 주선하였는데 감옥으로부터 막 나온 휩마이어는 강력한 상대자에게 압도당하였다. 황제의 손으로 인도될까 두려워서 그는 자신의 가르침 중 일부분을 철회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곧 사람을 두려워했던 데 대하여 통회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고 회복시켜 주시도록 간구하였다. 그 직후 그는 쮜리히를 떠나 콘스탄스로, 다음에는 아우구스부르크로 가서 거기에서 한스 뎅크를 만나 침례를 베풀었다. 그는 니콜스부르그와 모라비아에서 약 16권의 책을 펴내는 등 저술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 지역에 잠시 머무는 동안에도 약 6000명의 사람들이 그를 통해 침례를 받았고 교인들의 숫자는 15000명으로까지 증가하였다. 그러나 형제단 내에는 모든 문제들을 한 사람이 결정하게끔 되어 있지는 않았다. 열정적인 설교가였던 한스 후트가 니콜스부르크로 와서 신자가 국가나 자신의 안전을 위해 무기를 들거나 전쟁비용을 위해 세금을 내는 것은 비성경적이라고 가르쳤을 때 휩마이어는 그 견해에 반대 의사를 나타내었다. 1527년에는 마침내 그는 고문을 당하고 처형을 당한다는 위협을 받았지만,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그가 굳게 서도록 격려하였고 드디어 몇 달 후 그는 시장 광장에 세워진 화형대로 끌려가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
“오,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여, 저에게 순교할 수 있는 인내심을 주옵소서! 오, 나의 아버지시여, 당신께서 오늘 이 고통의 골짜기로부터 저를 건지심을 감사하나이다. 오,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 양, 어린 양이시여! 오, 나의 하나님, 당신 손에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
그리고 불꽃 가운데서 “예수님! 예수님!” 하는 그의 외침이 들려왔다. 사흘 후에는 그의 용감한 아내도 목에 돌이 매달린 채로 다뉴브 강으로 던져져서 죽임을 당했다.

한스 뎅크와 주변 상황들

종교개혁의 흐름이 고조되었을 때 교회를 인도하였던 형제단의 인물 중, 영향력이 가장 컸던 사람은 한스 뎅크였다. 바바리아 태생인 그는 바젤에서 유명한 학자들 및 출판인들과 교류를 가졌다. 그는 1523년에는 뉘렘베르크에 있는 유명한 학교의 책임자로 임명을 받아 그리로 옮겨갔다. 그런데 그 곳에는 이미 젊고 재능 있는 오시안더가 이끄는 루터교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25세로 역시 젊은 나이였던 뎅크는 이 새로운 신앙 운동이 사람들에게 도덕성을 각성시키고 정의와 경건한 삶을 가져다주기를 기대하고 희망했다. 하지만 기대대로 되지 않는데 실망하여 루터교의 주장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그는 루터교의 가르침 내에 어떠한 결함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루터교는 행위와 관계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주장을 하여 카톨릭 교회에 만연했던 많은 부정을 제거할 수는 있었지만, 진실한 믿음의 본질인 순종이나 자기 부인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필요성은 소홀히 여기고 있었다. 이 사실을 점점 깨닫게 된 뎅크는 비덴베르크에서 출발한 루터의 가르침이 사람들을 얼마나 ‘안일하고 부주의하게’만들었는지는 경험이 입증된다고 피력하였다(1551년). 그는 말하기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본성적인 욕망을 거스리는 엄격한 도덕적 요구로 속박당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 생각되기를 좋아하고, 우리가 비록 악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심으로 우리는 의롭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의는 우리 안에 있지 않다고 가르치는 위선자들의 말을 기꺼이 듣는다. 그러한 가르침에 따르면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들은 죄악 된 길을 계속 걸어가는 사람들은 경건하다고 간주될 수 없다고 설교하는 사람들에게는 저주를 퍼붓는다. 우리가 보고 경험하였듯이 이런 얘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분을 발하여 그런 설교자들을 쫓아내려 하거나 심지어 죽이려고 든다. 대신 위선적인 설교가들에게는 칭찬과 위로의 말을 하며 선물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들을 보호하여 자기들이 걸어가는 길을 거침없이 고집하면서 진리가 아무리 분명하게 드러날지라도 조금도 개선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거짓된 성도가 있는 곳에 위선적인 설교가가 있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오시안더가 뎅크를 도시의 관리들에게 고발함으로써 뎅크는 루터교측에 속한 여러 반대자들 앞에 나서야 했다. 거기에서 벌어진 논쟁에서 그는, 반대편에 섰던 어떤 말을 인용한다고 해도 “너무 유능하여서 입술의 말로써 그와 다투는 것은 쓸데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는 일곱 가지의 주요 논점에 관해 서면으로 신앙적인 신념을 제출토록 요구받았는데 여기에 대해 오시안더가 기꺼이 뎅크의 그러한 서면 응답서에 대하여 뎅크가 꼼짝 못하도록 다시 서면으로 답하겠다고 언명하였다. 그러나 막상 뎅크의 대답이 제출되자, 뉘렘베르크의 설교가들은 오시안더가 답장을 보내는 일이 현명치 못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신념에 가득 찬 뎅크를 감당하기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시 위원회에 뎅크의 답변을 제출하였다. 그 결과 뎅크는 당장 순종하겠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감옥에 갇히게 되리라는 위협도 아울러 받았다. 그 이유는 그가 비기독교적인 주장을 하고 그것을 옹호하려 하며 아무런 가르침도 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 그의 답변은 너무나 왜곡되어 있고 교묘하여 그를 가르치는 일은 분명 쓸모없는 일이라는 설명이 추가되었다. 그래서 다음날 뎅크는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고 도시를 떠남으로써 그의 나머지 생애동안 계속된 방랑의 길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가 쓴 “고백록”에서 뎅크는 자신의 상태가 비참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으나, 반면에 죄에 대항하고 생명과 축복을 향한 소원을 일깨워주는 무언가가 자신 속에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이런 것을 믿음을 통하여 얻을 수 있지만 믿음이란 단지 듣고 읽은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 이상이란 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성경을 읽는 데 거스리는 본성을 그것을 하도록 재촉하는 양심의 소리로써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가 자신의 마음속에 계시된 분과 일치됨을 깨달았다. 또한 그는 성경은 단지 피상적으로 읽음으로써가 아니라, 성령께서 마음과 양심에 계시해 주심으로써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뎅크를 추방했던 루터파 성직자들이 작성한 기록을 보면, 뎅크는 “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생각과 의도는 기독교적인 이해에 근거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루터교회의 통합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를 추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뎅크가 도착한 곳에서는 또 다른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향하여 온갖 비난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그는 다시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뎅크는 그를 적대하는 사람들에게 대응하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의 풍습대로 가장 거친 비난이 그에게 쏟아졌지만, 뎅크 자신은 그런 비난을 공격하지 않았다. 가장 심한 욕을 들었을 때도 뎅크는 “어떤 사람들이 나를 오해하여 심하게 비난을 가하므로 나는 온화하고 겸손하게 행동하려 해도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했고, 이어서 “내가 많은 사람들과 불화하다는 사실이 슬프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을 그들도 섬기고 내가 경배 드리는 성부를 그들도 경배 드린다는 사실로만 보아도 우리들은 서로 형제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가능한 한 나의 형제를 원수로, 성부를 재판자로 삼고 싶지 않고 나를 적대하는 사람들과 화해하기를 원한다.”고 얘기하였다.
뎅크는 세인트 갈렌에서 한 형제의 환대를 한동안 받았으나 거기서도 떠나야 했다. 그 형제가 당국과 마찰을 빚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친구의 도움으로 아우그스부르크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그 곳에서는 루터와 쯔빙글리파와 카톨릭 사이에 각각 분쟁이 있었을 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도덕이 타락하여서 심각한 문제가 되어 있었다. 뎅크는 방황하는 많은 영혼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껴서,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하는 시민들과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다. 아직 뎅크 자신은 침례파 또는 재 침례파로 불리 우는 사람들과는 결합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침례파들이 여타 지역에서 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인트 갈렌에서는 뎅크 자신이 직접 보기까지 했던 침례를 이제는 자신이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즉, 그는 휩마이어 박사를 만나게 되었을 때 형제단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결단을 하고 침례를 받게 되었다. 뎅크가 도착하기 전에도 아우그스부르크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으므로 뎅크가 속한 교회는 급격히 성장하였다. 교회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했지만, 부유하고 지위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랑켄만텔이라는 사람의 열정과 그의 저술에 대해 큰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최상층 시민의 자제로서 14회나 시장을 역임하였고 고위관직을 차지한 경험이 있었다. 1527년에는 교인의 수가 약 1100명으로 성장하여 그들의 활동으로 여러 인접 지역에 교회들이 세워지고 강화되는 도움을 입었다.
당시의 사료를 잘 알고 있는 어떤 저술가는 이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단이라는 상호 비난으로부터 상처를 입었으므로 사람들은 모든 분파주의로부터 떠나 조용히 가르침을 받는 데서 도피처를 찾으려 하였다. … 재침례파 중에서도 순수했던 신자들의 눈앞에 늘 어른거린 것은 교회의 아름다운 이상이었다. 그들은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다니면서 교회들을 세우고, 거기서 믿는 이들이 한 몸의 지체로서 서로 사랑하며 모이기를 힘썼던 영광스러운 시대를 흠모하였다.”
이 때에는 믿는 자들의 믿음과 간증을 표현한 찬송가들이 많이 씌어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특히 뎅크에 대하여 또다시 박해가 시작되었으므로 그는 많은 재침례파들이 있는 스트라스부르크로 대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의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로는 유능한 두 사람, 즉 카피토와 부써가 있었다. 그들은 쯔빙글리와 스위스의 개혁가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지만, 비텐베르크와 쮜리히 측과는 특별한 관련을 맺고 있지 않았다. 카피토는 이 두 부류의 개혁파들과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으며 자신이 둘 사이의 관계를 연결하는 교량이 되고자 했다. 그는 침례 문제에 관하여는 확고한 입장을 갖지 못하였으나, 많은 형제단 사람들에게 우호적이었다. 형제단의 모임에는 아주 극단적인 사람들도 있었는데 형제단이 그들을 제거하지 못하자, 이는 어떤 사람들이 형제단 모임에 가담할 수 없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쯔빙글리가 교리 문제에 있어서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 중벌을 내리기로 하자, 그와 카피토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게 되었다. 뎅크가 스트라스부르크에 도착했을 때는 형제단의 숫자가 많고 영향력이 있어서 그곳의 종교생활에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던 것처럼 보였다. 뎅크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카피토와 관계를 맺었는데 그의 경건함과 능력 그리고 고결한 성품이 카피토의 주목을 끌었던 것이다. 곧 그는 재침례파로 알려졌던 형제단 사람들 뿐 아니라 혼란한 상황 속에서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다른 많은 사람들의 진실한 지도자가 될 자질을 갖춘 자로 부각되었다. 그런데 그 도시의 또 다른 지도자였던 부써는 이런 상황을 좋게 보지 않았다. 그는 공권력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집단은 미래가 불투명하다가 판단하고서 쯔빙글리와 연합하여 시 위원회에 영향력을 행사한 지 몇 주 되지 않아서 뎅크에게 추방명령을 내리는 데 성공하였다. 당시에는 뎅크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기 때문에 그가 추방당하지 않도록 저항할 수도 있었으나, 뎅크는 당국의 결정에 순종한다는 그때까지의 원칙을 고수하여 스트라스부르크를 떠나게 되었다(1526).
큰 위험을 겪으면서 뎅크는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많은 신자가 있었던 보름스에 한동안 머물렀을 때는 헤쪄와 함께 번역한 예언서를 출간하기도 하였다(1527). 이 번역판은 3년 동안에 3판이나 나왔다. 초판은 첫 해에 다섯 번이나 인쇄되었고 다음해에는 여섯 번 더 간행되었다. 아우그스부르크판은 아홉달 사이에 5판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 직후 뎅크는 각지에서 온 형제단의 회의를 아우그스부르크에서 주관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점차 심해지는 박해에 대항하여 무력을 사용하자는 주장을 하였으나 그는 여기에 반대 의사를 나타내었다. 여기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이 회의는 ‘순교자 회의’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그 이후에 뎅크가 바젤에 도착했을 때는 오랜 방랑과 고생으로 인해 건강이 많이 상해 있었다. 거기서는 외콜람파디우스라고 불리우던 그의 오랜 친구인 개혁가 하우스샤인을 만나게 되었다. 하우스샤인은 친구의 쇠약한 모습을 보고 안전하고 조용한 거처를 마련해 주고는 그로 하여금 평화스럽게 마지막을 맞이하게 하였다. 뎅크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나는 정처가 없었으므로 힘들고 괴로웠다. 그러나 더 힘들었던 것은 나의 노력이 아무런 열매와 결과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받은 사람이건 침례를 받은 사람이건 누구나 한마음을 가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 이외의 열매를 내가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신다. 나는, 어떤 형태로건 이 세상적인 요소와 의식에 하나님의 왕국을 지나치게 속박시키려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판이한 생각을 지니고 있다.”
관용이 거의 베풀어지지 않던 시대에 그는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교리에 관한 논쟁에서는 항상 한쪽이 진리를 수호하고 다른 쪽이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종종 한 쪽이 진리의 한 측면을 강조하고 다른 쪽이 진리의 다른 측면을 강조하기 때문에도 불일치가 생긴다. 그럴 때 사람들은 각자 자기편을 뒷받침해주는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상대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구절은 무시하거나 조그맣게 취급한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서는 어떤 결론도 나올 수 없고 성경은 믿을만한 안내자가 되지 못한다고 비난한다. 그렇지만 오히려 성경의 이러한 특징이 성경의 완전성을 드러내준다. 성경은 편향되어 있지 않고 진리의 모든 측면을 골고루 보여준다. 따라서 선한 행위 없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도 명백히 옳은 것이지만, 반면에 믿음의 결과와 증거로서 선행이 필요하다는 가르침도 옳은 것이다. 또한 타락한 인간에게는 어떤 선한 것도,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어떤 선한 동기나 의지도 없으므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의존한다고도 할 수 있으나,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빛과 말씀에 호응하여 죄를 배척하고 의를 인정하는 양심, 즉 구원의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실로 성경에 나타난 모든 위대한 가르침은 대조되는 진리를 가지고 있으며, 진리의 전체를 아는 데는 양 측면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데, 창조 사역 속에는 빛과 어둠, 하늘과 땅, 동물과 식물 등 대조되는 요소들이 결합되어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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