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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딤후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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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침례파의 역사(2)

  • 관리자 (ehompy0429)
  • 2014-05-23 15: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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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유럽은 프로테스탄트(루터파, 스위스의 개혁파 등)와 로마 카톨릭으로 양분되었다고 하지만 어느 측에도 가담하지 않고, 초대교회처럼 성경의 가르침을 준수하려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의 숫자는 아주 많아서 프로테스탄트나 카톨릭 양측은 자기들의 세력이 위험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런 중요한 운동이 역사에서는 아주 소홀히 취급된 것은 국가와 기존 교회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그 운동이 거의 분쇄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추방당하거나 미약한 단체로만 남았기 때문이다. 또한 탄압 세력은 많은 양의 문서를 폐기 처분하였고 역사를 기술할 때 자기들이 비난하는 주장으로 왜곡시켰다.
1527년 샤틀러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의 주관으로 바덴에서 회의가 개최되었다. 거기서 다음 사항이 합의되었다.
첫째, 믿는 사람만이 침례를 받아야 한다.
둘째, 교회에서는 치리(治理), 즉 권징(勸懲)이 행해져야 한다.
셋째, 성만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목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넷째, 교회구성원은 세상과 교류하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가르치고 권면하는 등의 의무는 교회의 목자들의 임무이다.
여섯째, 그리스도인은 무력을 행사하거나, 자신들의 문제를 가지고 세속 법정에 가서는 안 된다.
일곱째, 그리스도인은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샤틀러는 여러 지역에서 활발하게 말씀 사역을 하면서 1527년 봄에는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뷔르템베르크로 갔다. 그러나 그는 로텐부르크에서 체포당하여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법정의 선고에 따라 수족을 절단 당한 채 시내로 끌려 다니면서 극도의 수치를 당한 후, 성문에 매어 달렸다가 시신은 불태워졌다.
그의 아내와 다른 몇몇 그리스도인 부녀들은 강물에 익사당했으며 그와 함께 감옥에 있던 많은 형제들도 목이 잘렸다. 이런 일들은 로렌부르크에서 있던 일련의 끔찍한 처형 중의 첫 번째 사태였다.
아우그스부르크에서 있었던 큰 회의도 동일한 방법으로 해산되었다. 첫 번째 순교자는 교회의 장로였던 류폴트였는데 그는 87명의 형제들과 함께 회의 중에 체포되어 목이 잘려졌다(1526).
그는 죽기 전 감옥에서 찬송가를 한 곡 만들었다. 이 찬송가는 고난 중에 있던 성도들에게 빠른 속도로 전해져서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이 일이 있고 난 두 주일 후에는, 재능 있던 랑겐만텔이 네 명의 형제들과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추방령을 받았고 이마에 십자가 낙인이 찍힌 사람의 수도 많았다.
그러나 보름스에서는 믿는 자들의 수효가 너무 많아서 그들을 해산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모임은 비밀리에 존속되었다.

필립 공과 오덴바흐

헤센의 필립 공은 당대의 통치자들 가운데 예외적인 존재였다. 그는 스페이어 의회에서 찰스 5세가 내린 칙령에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파생되는 모든 결과와 과감히 맞서려고 하였다.
황제의 칙령은 “… 재침례를 주거나 받는 자는 남자나 여자나 노소를 가리지 말고 잡아다가 불과 칼 또는 각자의 형편에 맞는 방법으로, 종교재판을 기다릴 것도 없이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명하였던 것이다.
이 칙령에 따르면 자녀들이 침례 받는 것을 막지 못한 부모들도 똑같은 형을 당했고, 도망가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자기 집으로 받아들이거나 숨겨주거나 체포를 방해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루터측 신학자들의 조언을 들은 삭소니의 선제후는 필립 공에게 침례교도들을 추방시키거나 투옥시키라고 명령했으나 그는 그 이상의 조치, 즉 사형은 일절 시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필립은 잘못이 있는 사람은 가르침으로 교정을 받아야지 강제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루터교도들 측보다도 ‘광신자’라 불리우는 사람들 사이에 더 좋은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사형을 시킬만한 충분한 이유가 없으면 신앙 때문에 처형하거나 처벌하지 않았다.
하이델베르그와 알제이 그리고 크로이쯔나흐 등의 팔라틴에서도 1529년에만 350여명이 처형당했다. 특히 심한 박해에 대항해 오덴바흐가 항의문을 써서 명성을 얻었다. “재침례파라 불리우는 알제이의 가련한 사람들을 재판하도록 임명받은 사람들에게”라는 제목의 항의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불쌍하고 무지하고 학식 없는 당신들은 진정한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분의 도우심과 지혜와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당신들은 세상의 제왕과 군주들이 누구를 재판하라고 명령하더라도 무죄한 자의 피로 경솔히 손을 더럽혀서는 안됩니다. 침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갇힌 이 가련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저주하실 만큼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생명을 박탈당할 만큼 극악무도하게 행동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침례 혹은 두 번째의 침례를 받았다고 하여서 어떤 사람이 구원되거나 저주당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침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요, 세상에 대하여 죽었고, 사망에 대하여는 원수가 되었고,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표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침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육체와 죄와 사단에 대하여 부단히 싸우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들 재판관들 중에서 결박되고 고문을 당한 채 심문을 받는다면 어떤 침례가 옳고 그른지 말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침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어야 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재침례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사형인의 손으로가 아니라 성경의 말씀으로 없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땅 위에 행악자들이나 소돔 사람들보다 심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지 않으려면 그분께 속한 권리를 침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당신들은 감옥에 있는 이 사람들보다 도둑이나 살인자나 깡패를 오히려 관대하게 취급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훔치지도 아니하였고 살인하지도 아니하였으며, 방화나 모반도, 수치스런 죄악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런 악행에 대항하여 싸웠고 진지하고 단순한 의도를 가지고 조그마한 실수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다시 침례를 받았을 뿐이요 어느 누구도 해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과연 그 때문에 그들이 목이 잘리고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당신들의 마음이나 양심이 허락합니까?
만일 당신들이 그리스도인 재판관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대로 그들을 다룬다면, 그리고 복음으로써 그들을 훈계하는 방법을 안다면, 사형 집행인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을 정죄하는 성직자들도 길 잃은 양들을 그리스도의 품으로 인도함으로써 그들에게 호의와 형제애를 베풀고, 향기로운 복음의 가르침으로 그들을 회복시키고 위로하며 보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 가련한 사람들을 사형에 처하는 속임에 넘어가지 마시오. 당신들은 잘못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므로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 두려워하고 몹시 고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불쌍한 영혼들이 ‘우리는 성경에서 더 좋은 가르침을 원하며 복음으로부터 올바른 길이 제시된다면 기꺼이 순종하겠습니다.’ 하고 말할 때 건성으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잘못 때문에 당신들이 받게 될 영원한 수치를 잘 생각해 보시오! 이 가련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할 때 일반 사람들이 보인 분노와 비방을 생각해 보시오! 그렇게 되면 ‘이 경건한 사람들이 얼마나 큰 인내심과 사랑과 경배심으로 죽었는지 보라. 그들은 얼마나 고귀하게 세상에 항거하였던고!’ 하는 말이 나올 것입니다.
아, 우리도 그들처럼 하나님 앞에 순전하게 시험에 지지 않고 모욕을 견디어 낼 수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선교자가 아닌가? 모든 사람들은 당신들이 내리는 사형 선고가 가련한 재침례파들의 잘못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한 복음과 하나님의 순수한 진리를 파괴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 항의문의 결과로 몇 몇 재판관들은 신앙문제에 관한 재판을 거절하였다.

쯔빙글리와 형제단

쯔빙글리는 그의 위대한 개혁사업을 주로 스위스의 독일어권에서 행하였다. 쮜리히 시와 그 주변에서 그는 지배적인 권위를 행사하게 되었다. 1423년에는 국가교회 체제를 쮜리히에 도입하여 시 위원회가 교회와 교리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에 대한 결정권을 갖게 되었다. 그러자 곧 그 권위를 형제단을 박해하는 데 사용하였다.
뮐러라고 불리우는 한 신자는 시 위원회 앞에 끌려와서 얘기하기를, “신앙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요 아무도 방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므로 나의 양심을 억압하지 마시오. 하나님의 신비는 가리워져 있어서 주의 성령이 나타내주시지 않는다면 마치 당신들에게 간구하노니 나를 믿는 바대로 버려두시오.”라고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탄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새로 생긴 국가 교회는 카톨릭이 행하던 대로 ‘이단자’들에 대해서는 투옥하거나 심지어 죽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쯔빙글리는 초기에 형제단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다. 그는 침례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유아세례에 관하여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개혁운동을 추진하는 일을 공권력에 의존하면서부터는 형제단과 필연적으로 소원해지게 되었다.
형제단의 숫자는 쮜리히에 많았고 활동도 적극적이었다. 그 중에 특히 유명한 사람으로는 한때 쯔빙글리의 절친한 친구였던 그레벨이 있었다. 그는 쮜리히 시 위원회의 자제로서 파리와 비엔나 대학에서 두각을 나타낸 후, 쮜리히에 돌아와서 그곳에 있는 형제단 모임에 적극 가담하게 되었다. 또 다른 유명 인물로는 뛰어난 히브리어 학자인 만쯔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도 역시 자기 집을 모임 장소로 개방할 정도로 열렬한 그리스도인이었다. 또 한때는 수도사였다가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고 로마 교회를 뛰쳐나온 블라우라크도 있었다.
이들 세 사람은 지치지도 않고 이 집 저 집을 다니면서 설교와 권면을 하였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침례를 받아 교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쮜리히에서는 침례가 공개적으로 베풀어지기도 했으며 떡 나누기라고 불리우던 주의 만찬을 위하여 믿는 자들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기도 하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참된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들의 모임이라 부르면서 개혁교회나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구별되어 있었다. 이때 시 위원회는 형제단의 모든 활동을 금지시키고 공개적인 토론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시 위원회가 결정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녀들을 팔일 안에 세례를 받도록 하고 형제단이 베푸는 침례는 엄벌에 처해지리라는 명령이 떨어지게 되었다. 그레벨과 만쯔, 블라우라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더 활발히 활동하였고 사람들은 수백 명씩 말씀을 들으러 와서 침례를 받았다. 블라우라크는 억제할 수 없는 열정으로 이따금 교회로 뛰어들어가서 관권과의 갈등이 빠른 속도로 격화되어서 많은 형제단측 신자들이 엄한 벌을 받았다. 이에 블라우라크는 서슴없이 쯔빙글리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친애하는 쯔빙글리여,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것은 모든 게 쓸모없다는 말로 교황주의자들과 맞서 싸웠소.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지도 않고 하나님과 합하지도 않은 많은 것들을 당신이 스스로 얘기하고 있소. 파베르 주교와 다른 무슨 수도사들과 대항했던 권세 있는 말씀은 지금 어디로 갔소?”
드디어 이들 세 명의 설교자들과 여섯 명의 여인을 포함한 다른 15명이 투옥되어서 물과 빵과 지푸라기만 주어진 채 죽어서 썩어지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침례를 베풀거나 받는 사람들은 익사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졌다(1526). 감옥에 갇힌 사람들은 여러 방법으로 탈출하여 많은 동조자를 얻기도 하였으나 박해는 더욱 가혹해졌다. 교회를 박멸하려는 쮜리히 시 당국의 노력에 베른과 세인트 갈렌도 가담하게 되었다. 베른 주에 34명이 처형되었고 비일로 도망쳤던 사람들도 거기서 똑같은 운명을 당했다. 야밤에 숲 속에서 은밀하게 모였던 집회도 발각되어 해산되었으므로 새로운 모임장소를 물색해야만 하였다. 이때 그레벨은 흑사병으로 죽고(1526), 블라우라크는 체포되어 온 몸이 발가벗긴 채 시내로 끌려나가면서 피가 철철 흘러내리도록 매질을 당한 후 추방되었다. 만쯔 역시 결박되어 수장형을 당했다.
이 모든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들의 성장은 막을 수 없었다. 오히려 박해를 피한 이들이 가까운 오스트리아의 티롤 지방으로 몰려가서 복음을 증거함으로써 그 지방에 빠른 속도로 교회가 서게 되었다. 이런 활동을 한 사람 중에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에 감화를 받아서 믿는 자들의 수가 증가하고 말씀을 널리 전하는 데 열심을 내었다. 블라우라크와 그의 동료였던 랑게거는 오랫동안 추적당한 끝에 클라우젠에서 체포되어 화형을 당하였다(1529).

계속되는 박해

같은 해에 인스부루크에서 주의 복음을 증거하던 키르쉬너가 공개리에 화형을 당하였다. 한편 블라우라크를 따라 위험한 예배 의식을 드리던 후터가 있었는데 그도 역시 떡을 나누는 집회 중에 군인들에게 발각되었다. 여기서 14명의 형제 자매들이 체포되었는데 후터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탈출에 성공하였다. 계속되는 위험 속에서도 그는 교회 내의 의견을 조정하고 고난당하는 자들을 격려하며 말씀을 전하면서 떠돌아 다녔다. 박해의 강도는 더해져서 많은 사람들은 모라비아로 도망을 가서 한때 자유를 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도망을 막기 위하여 국경지역에는 엄격한 검문이 행해졌다. 한 때는 오스트리아 전역에 복음이 확장되어서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으나, 이제 박해 때문에 오랫동안 고난을 당한 후 흩어져서 분쇄당할 지경에 이르렀다. 티롤과 괴르쯔에서는 천여 명의 사람들이 화형이나 참수형 또는 수장형을 당하였다. 잘쯔부르크에서는 한 목회자의 집에서 열리던 집회가 발각되어서 16명이나 죽임을 당하였다. 그 속에 포함되어 있던 한 소녀는 동정심을 청하였지만, 그녀가 신앙을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형 집행인이 그녀의 팔을 잡고 물이 담긴 여물통에서 익사시킨 후 시신을 불에 태워버렸다. 린쯔의 스피텔메이어는 적극적으로 복음을 증거 하여 많은 열매를 얻은 후 뉘렌베르크에서 순교를 당하였다. 린쯔의 교회에는 브란트후버 같은 충성스런 장로가 있었는데, 그도 70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형을 당하였다(1528). 이렇듯 이곳 저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전파자로 주의 증인들이 세움을 입었고 문자 그대로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이들을 찾으려고 파송된 많은 군인들이 이런 이단자들을 재판도 없이 처형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비록 재침례파라고 불리우기는 하지만, 그만큼 고통을 당하도록 그들에게 용기를 준 것은 침례의 형식이 아니었다. 그들은 주님과 교통하는데 사람이나 종교적인 형식이 아니라, 구세주와의 직접적인 교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속에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분이 세상에 대하여 거두시는 승리에 동참하였다. 그들은 주님과 동행하는 공통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과 연합하여 교회 안에서 있어야 할 성도의 교제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는 시작이 다르고 역사가 다르며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성격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을 지녔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본래의 교회 형태에 집착하려는 소망만은 모두가 공유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종교개혁가들마저 묵인하던 유아 세례를 배격하였고, 기성 교회들이 그것 없이는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었던 모든 세상적인 도움을 거절하였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그들 신앙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그들은 성경을 자기들을 인도하기에 충분한 드러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의지함으로써 성경에 따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런 길을 걸으면서 어떤 사람들은 갖은 유혹을 당하여 육신적인 욕망이나 정치적인 목적 또는 탐욕에 굴복하여 심하게 타락하기도 하였으나, 훨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신실성을 훌륭하게 증거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습을 그들은 “모든 믿는 자들이 성령의 인도로 모이고 그리스도의 순수한 가르침으로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연합하여 주님께 마음으로부터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모임”이라고 얘기하였다. 그들은 또 “이 교회에 들어와서 하나님 집의 구성원이 된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 안에서 생활하고 걸어가야 한다. 이 교회 바깥에 있는 자는 모두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유아 세례를 배척하였으므로 종종 일찍 사망하는 어린이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 그들은 일찍 사망하는 어린이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영원한 생명에 동참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 E. H. 브로우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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