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딤후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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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침례파의 역사(3)

  • 관리자 (ehompy0429)
  • 2014-05-23 15: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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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주변의 교회 상황

오스트리아-헝가리 지역에 있던 재침례파의 어떤 연대기 작가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사도들은 신앙의 토대를 여러 나라에 세워놓았다. 그러나 압제와 거짓된 가르침 때문에 많은 타격과 장애를 입은 교회는 종종 심하게 위축되어서 존재 여부마저 의심스러울 때도 있었다. 엘리야가 말했듯이 성전은 훼파되었으며 선지자는 살해당했던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가 아주 소멸되도록 버리시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한 교회와 성도들의 한 교제가 있음을 믿노라’는 신자의 신앙고백의 한 문구가 거짓으로 판명되었을 때라도 주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따라 그들과 함께 해 오셨고 그들이 무심하게도 그리스도의 선하심을 잊어버릴 때는 그들에게 주셨던 은사들을 거두셔서 다른 지역에 있는 진실한 사람들을 일깨우셔서 은사를 주시고 다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를 세우게 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왕국은 사도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이 나라 저 나라를 거쳐서 우리에게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는 계속하여 기록했다.
“어떤 나라에서는 여러 증인들이 목숨을 바쳐서 때로는 풍성한 결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로마 교회의 압제로 거의 모든 것이 희미하게 되어 버렸다. 단지 파카르드파와 왈도파만이 어느 정도의 진리를 보존하였을 뿐이다. 찰스 5세의 통치 초기에는 주님께서 다시 빛을 보내셨다. 루터와 쯔빙글리는 번개처럼 바벨론의 해악(인간 중심으로 전락한 로마 카톨릭의 타락상을 가리킴)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것을 아무 것도 세우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권력을 잡게 되자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믿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시작은 좋았으나 진리의 빛은 다시 어두워졌다. 그것은 마치 낡은 주전자의 구멍을 막으려고 시도했다가 결국에는 상태만 나빠진 것과 비슷하다. 그들은 과감히 죄를 짓는 백성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양측, 즉 루터와 쯔빙글리의 가르침이 옳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가담하였으나,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싸움을 함으로써 의심할 바 없는 구원을 얻기도 하였다.”
이 사람은 이어서 쮜리히에서 침례문제로 쯔빙글리와 다투었던 사실을 기록하면서, 어떻게 쯔빙글리가 애초에는 유아세례가 성경의 분명한 하나님 말씀으로 증명되지 않는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믿는 자를 침례 주는 일이 잘못되었고 용납될 수 없는 행위라고 강단에서 가르쳤는지, 또한 어떻게 쮜리히 등 여러 지역에서 침례 받은 사람들이 추방되어야 했는지를 얘기해 주었다. 이에 덧붙여 그는 박해로 인해 많은 그리스도의 종들이 흩어져서 말씀을 전하면서 오스트리아로 가게 된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오스트리아와 주변 지역에서 교회는 놀랍도록 성장하였다. 고난을 당하고 사형을 당한 사람들의 수는 엄청났지만 복음 전도자와 장로라는 위험한 직무를 기꺼이 담당하려는 사람은 끊어진 적이 없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은 죽음에 이르러서도 기쁨에 넘쳤다. 일부가 물에 빠져서 죽임을 당하는데도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찬송을 부르면서 다음에 있을 자기의 죽음을 기쁘게 기다렸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는 진리에 굳게 섰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신앙을 굳게 지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순교자들의 굳센 믿음에 대해 사람들은 찬탄을 보내면서 그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여기기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의 힘으로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다고 했으나, 로마 카톨릭 측과 개혁주의 측의 교회 지도자들은 그 힘이 일반적으로 나온다고 하였다.
그런데 재침례교도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 곧 생명의 샘으로부터 흐르는 물을 마셨다. 이로부터 사람의 마음이나 이해력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심장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자기들이 스스로의 십자가를 질 수 있고 죽음의 쓰라림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거처는 이 땅 위에 있는 것이 아니요 영원한 곳에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믿는 바에 대한 토대와 확실성을 얻게 되었다. 그들의 신앙은 백합화요, 그들의 충성은 장미꽃과 같으며, 그리고 그들의 경건과 의는 하나님께서 심으신 아름다운 꽃과 같다. 주의 천사가 그들 앞에서 창으로 보호하시기 때문에 아무도 구원의 투구, 즉 다윗의 황금방패를 그들로부터 빼앗을 수 없다. 그들은 시온에서부터 들려오는 나팔소리를 들으며 그것을 알아본다. 이 때문에 온갖 고통을 참아내면서 두려워하지 않는다. 거룩한 성품에 참여케 된 그들은 더 좋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세상에서 가치 있게 여겨지는 것들을 한낱 그림자로 여겼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훈련을 받음으로써 영원하고 하나님께 속한 것들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도, 추구하지도, 바라지도,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들을 괴롭히는 적들보다도 더 많이 인내할 수 있었다."

페르디난드의 박해와 후터

스페인의 찰스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드 1세는 광란적으로 형제단을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많은 관원들은 마지못하여 그의 잔인한 박해의 도구가 되어주었다. 그렇지만 않았더라도 그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페르디난드는 계속해서 칙령과 훈령을 발하여 더 포악하게 박해를 가하도록 하고 약간의 틈만 보이면 위협하곤 했다. 그래서 어떤 사료(使料)에 보면, 티롤 지방의 관리들이 유약하게 행동한다는 질책을 그 잔인한 군주로부터 받자 다음과 같은 변명의 글을 쓴 것을 볼 수 있다.
“2년 동안 재침례교도 문제가 법정에 나오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티롤의 여러 관할 지역에서만 해도 700명 이상의 남녀가 처형과 추방을 당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재산이나 심지어 자식마저 버려 두고 비참하게 도망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폐하에게 이런 사람들이 보여주는 어리석음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형벌 받는 것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갇혀있는 사람들에게로 가서 자신들이 그들의 형제요 자매임을 드러냅니다. 이 때문에 관리들로부터 고발당할 때 그들은 고문을 당할 필요도 없이 기꺼이 사실을 시인합니다. 그들은 훈계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잘못으로부터 돌이키는 사람은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조속히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국왕 폐하께서 저희의 이 진실한 보고를 보시고 저희들이 결코 임무를 태만히 하는 것이 아님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페르디난드가 보헤미아의 왕위도 겸임하게 되자 그 지역과 모라비아에 있던 형제단의 피난처가 위험해지게 되었고 이제 숨을 곳이 없어지게 되었다. 재침례교도를 관청에 밀고하면 점점 많은 상금을 받게 되었다. 처형당한 사람들의 재산은 몰수되어서 일부는 박해 비용으로 쓰여지기도 하였다. 아이를 밴 여인은 출산할 때까지 감옥에 있다가 처형을 당하였다. 실리안의 사를링거라는 관리는 16세와 17세 된 두 소년을 처형시키기가 너무 괴로워서 좀더 심문을 하도록 처형을 연기하는 어려운 결정을 하였다. 그래서 이 소년들은 재침례교도에서 몰수한 재산으로 18세가 될 때까지 로마 카톨릭 식의 교육을 받으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때가 되어서도 뜻을 굽히지 않는다면 처형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 상황하에서 열 여덟 번째 생일을 기다려야만 하는, 주님을 사랑하는 이 소년들을 한 번 머릿속에 상상해 보라!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갔으나, 후터는 숲이나 외딴 집에서 모임을 계속했고 형제 자매들은 목숨을 무릅쓰고 그를 맞아들였다. 그러나 세인트 조지에 있는 한 집에서 성찬식을 하던 후터와 40여명의 동료들은 군인들에 의하여 급습을 당하여 그 중에 7명이 체포되었다. 후터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일단 도망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포상금을 노린 어떤 사람의 밀고로 곧 체포되고 말았다. 그가 은신해 있던 집을 야밤에 둘러싸서 그와 그의 아내, 딸 그리고 연로한 집주인을 체포하였던 것이다. 그는 진리를 말하지 못하도록 입에 재갈이 물려진 채 인스브루크로 송치되었다. 후터가 잡히기까지는 국왕이 관리들에게 휴식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체포 소식에 환호가 일어났다. 국왕은 그 소식을 접하자마자, 그가 입장을 철회하든 안하든 죽음을 당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사실 후터는 그럴 사람도 아니었다. 실로 그는 왕과 교황 그리고 성직자들의 행위를 격렬히 비난했다. 추종자들 사이에 폭동이 일어날까 염려했던 관리들은 비공개 처형을 요구했지만 공개리에 처형해야 한다는 페르디난도의 주장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인스브루크에서 공개적으로 화형을 당했다.(1536)

한스 맨들

형제단 모임에서 후터가 지녔던 위험한 자리는 이제 맨들이라는 지도자가 대신하게 되었다. 그는 온화하지만 용기를 지닌 인물로서 너그러움과 재능과 헌신적인 봉사로 모든 사람들의 사랑과 신뢰를 받았다. 티롤에서 그는 400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그는 여러 번 투옥되기도 하였으나 그를 개종시키기 위해 파견된 성직자들이 불평할 정도로 관리들이 그를 부드럽게 다루었다. 그가 종종 탈출한 것을 보면 그를 체포한 사람들 중에도 그에게 호의를 품은 사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번은 탈옥한 직후 숲 속에서 천여명이 모이는 형제 자매들의 모임에 편지를 보냈다가 곧 다시 체포되기도 하였다(1560). 이번에는 인스브루크에 있는 한 탑의 깊은 토굴 속에 다른 두 형제와 함께 갇히게 되었다. 이 토굴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적었다.
“나는 사랑하는 형제 리브리히가 오랫동안 누워있는 탑에 갇히게 되었다.… 그 형제는 아주 깊은 곳에 있으나 위쪽에 나는 고문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받아들였다. 그 사람들은 나를 3일 동안 심문한 뒤에 탑으로 도로 데려왔다. 나는 때때로 벽에서 벌레소리를 들었고 밤에는 내 주위에 박쥐가 날아다니기도 하였다. 생쥐가 무언가를 갉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편안하게 생각하도록 해주셨다. 그분은 나에게 진실하심으로, 사람들이 겁을 내는 허깨비조차도 나에게는 부드럽고 유용하도록 사용하셨다.”
그의 동료인 메이어와 같이 심문을 받을 때, 그는 무엇이 당신네들로 하여금 침례를 받도록 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맨들은 “우리는 이러한 신앙을 갖기 전에 후터라는 사람이 인스브루크에서 어떻게 화형을 당했는지를 들었습니다. 또, 그가 인스부르크로 끌려올 때는 진리를 말하지 못하도록 입에 재갈이 물려졌다는 얘기도 아울러 들었습니다. 이외에도 클라우젠에서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고 신실하다고 생각되던 뮐러가 후터와 동일한 신앙 때문에 어떻게 처형되었는지를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나는 슈타이나흐에서도 이러한 신앙 때문에 화형을 당하는 사람을 직접 보았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나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굉장한 번민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 결과, 나는 이들을 죽기까지 안내하도록 만든 굳건한 이 신앙은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내가 듣거나 본 이 순교자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질문들을 성경 말씀으로 고요하게 답변했는데 그 답변은 조금도 흠잡을 데 없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우리들의 관찰과 그에 따른 믿음이, 우리들로 하여금 재침례를 받게 한 이유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시 맨들은 말하기를 “지금은 우리들에게 확실한 거주지가 없고 어느 곳에서나 박해를 당하지만 머잖아 백배나 보상받을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은 흔히 얘기되던 대로 ‘저주받을 종파’가 아니며 ‘주모자’도 없습니다. 다만 나 맨들은 내가 속하고 있던 모임의 형제들로부터 교사요 인도자로 선출되었을 뿐입니다.”라고 답변했다.
배심원으로 선전된 열두 명의 사람이 이들을 심판하기 위해 인스부르크의 인근 지역으로부터 왔다. 자신들의 판단에 따른 결정을 내리겠노라는 통상적인 선서를 한 후, 또 다른 선서, 즉 죄인들을 판결할 대 황제의 칙령을 인정해야 한다는 선서를 취하도록 요구받았다. 거기에는 죄인들을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것을 거절했다. 이에 대해 당국은 극도로 분노하였으나 이제 황제가 된 페르디난도는 자신에 대한 반항 분위기가 고조될까 두려워 그들을 아주 거칠게 다루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논쟁을 거친 후, 이들 중 아홉 명은 위협에 굴복하여 요구에 순종했고 이를 거부한 나머지 세 사람은 투옥되었다. 그러나 며칠 후에는 이들도 굴복을 하여서 모든 배심원들이 재판이 벌어지기도 전에 판결을 내리는 선서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맨들은 화형을, 다른 두 사람은 참수형을 당하도록 판결되었다. 그 직전에 이 사람들은 감옥에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형제단에 보냈다.
“이 편지를 통해 우리는 그들이 성제절 후에 우리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날은 주님께 거룩한 날이기 때문에 우리는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이 있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 중에는 한 때 구교 측 성직자였다가 이제는 형제단의 일원이 된 닥스도 있었다. 사형을 당하러 나가는 사람들은 전혀 두려움이 없이 인사를 하였고 옥중의 형제들은 이에 큰 격려를 받았다. 맨들을 비롯한 세 사람은 군중들에게 큰 소리로 회개하라고 외치며 진리를 증거 하였다. 그들은 선고문이 읽혀졌을 때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관리들과 배심원들을 책망하고 황제의 강압에 의해 행동한다고 이들을 비난하였다. 맨들은 외치기를 “오 눈이 먼 세상이여, 각 사람은 자신의 마음과 양심에 따라 행동해야 하거늘 당신들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우리를 유죄로 판결하는구나!”라고 했다. 맨들은 목이 쉴 때까지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한스 맨들, 멈추시오!”라고 관리가 얘기했으나 맨들은 계속해서 “내가 가르치고 증거하는 바는 하나님의 진리이다!”라고 말하였다. 아무도 그들의 소리를 제지할 수 없었고 그들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소리쳤다. 그들 중 한 사람은 몸이 아주 불편하여 처형되기도 전에 죽을까 염려되어 먼저 참수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다음 사람이 사형집행인에게로 몸을 돌려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나는 믿음과 진리를 위하여 아내와 아이들과 집과 농장과 육체와 생명을 버리노라”고 외치고 무릎을 꿇고 머리를 내밀었다. 마지막으로 한스 맨들도 사다리에 결박되어서 이미 두 사람의 시체가 타고 있는 불덩이 속으로 산 채로 던져졌다.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 중에 렌쯔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모든 일들로 괴로워하다가 얼마 후 경멸당하던 형제단에 가입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었다.

모라비아의 공동체

어떤 지역 특히 모라비아 지역에서는 많은 형제들이 동일한 지침 아래 한 커다란 가족으로서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가 생겨났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도피처를 마련하기 위하여 박해를 피하여 도망친 사람들이 안식을 누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또한 이것은 초대교회 때의 예루살렘 교회를 본받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모든 성도가 한 군데서 생활하고, 회당에서 모두 함께 교제를 나누며, 서로 물건을 통용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신 표시이기도 하지만, 교회전체에 부과된 명령은 아니었다. 여러 지역으로 교회가 흩어진 경우에는 이것이 불가능했고 신약성경에도 예루살렘 밖에서는 시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모라비아와 다른 지역에 있었던 공동체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최상의 상태일 때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풍성한 영적 체험을 경험했고 농장일과 여러 수공업을 열심히 하여 부유해지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아주 불편한 일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자녀를 교육시키는 일은 그리스도의 가정에서보다 공동체에서 더욱 힘들었다. 그리고 공동체에는 침울한 분위기가 감돌기도 하였다. 또한 교회를 연약하게 만든 여러 분파적 요소도 있었다.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물자가 집결되어 비교적 번영을 누리던 공동체 내에는 군인들이 몰려들었고, 이것이 공동체가 파괴된 원인 중에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뮌스터 사건으로 인하여 와전된 역사

이 시기에 뮌스터에서는 그리스도의 모임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전에 일어났던 어떤 일보다도 그들의 입장에 해를 입히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처럼 흥분이 고조되었을 때에는 불안정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기 쉬운 법이다. 죄가 없으면서도 오직 신앙 때문에 잔혹하게 취급되던 사람들을 보고서 아직 믿음을 갖지 못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분노가 일어났고, 교회 내의 지도자요 장로인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살해당함으로써 극단적인 행동을 자제시킬 사람들이 제거된 셈이 되어, 한층 더 열등한 사람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가 많아지게 되었다. 잔인한 박해와 살해의 광경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종말이 왔고 구속의 날, 압제자들에게 보복할 날이 가까웠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고 예언자라고 자처하면서 그리스도의 왕국이 설 날이 가까웠다고 말하는 사람도 일어났다.
뮌스터는 주교령의 중심지로서 주교에게는 종교적인 권한만이 아니라 세속적인 권한도 부여되었다. 그는 조세를 거두고 모든 중요한 자리에는 성직자를 임명하였다. 따라서 일반 시민들은 계속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로드만이라는 젊고 날카로운 신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루터를 만나기도 하였고 스트라스브루그에서 만난 카피토와 슈뱅크펠트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바 있었다. 그는 좋은 설교자로서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 강한 공감을 느꼈고 개인적으로는 금욕적인 기질을 갖고 있었다. 그가 뮌스터로 오자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많은 청중이 몰려들었고 그의 설교에 흥분한 어떤 사람들은 성 모리스 교회에 있는 성상을 공격하여 박살을 내었다. 주교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질서를 바로 잡으려 하였으나 헤센의 공작이던 필립이 개입하여 뮌스터는 복음주의 도시로 선포되고 프로테스탄트 연방의 집결체인 슈말갈텐 동맹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주위의 카톨릭 측 지방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뮌스터를 피난처로 생각하여 몰려들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의 성격은 아주 다양하여 그 중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박해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성도들도 있었으나 반면에 무질서하고 광란적인 사람도 있어서 도시의 평화를 위협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빈털털이로 왔으나 로드만의 가르침과 그의 모범적 행동 덕택에 극진할 정도로 친절한 환대를 받았다. 이주자 중 어떤 사람은 로드만에게 유아세례가 어긋난다는 점을 설득시켜 그로 하여금 양심에 입각하여 유아세례의 실행을 거절하게끔 만들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도시의 행정관들은 로드만의 설교직을 박탈하였지만 로드만의 인기가 시민들 사이에서 아주 대단하였기 때문에 침례문제에 관한 공개적인 토론에서 로드만이 자신의 입장을 변명할 수 있었다. 외부에서 온 또 다른 어떤 재침례파 설교가는 아주 강한 설교로 폭동을 야기시켰는데 관리들이 그를 체포하려 하자 길드 조직이 그를 구출하기도 하였다. 이제는 그를 체포하려던 관리들이 관직을 박탈당하여 그들 자리에 재침례교도 평의회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 동안에 주교는 군대를 모아 도시를 포위하고 물량 공급을 차단하였다. 도시 내에 있던 많은 피난민들은 배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 조치는 치명적이었다. 그런데 유입된 사람들 중에 두 사람의 화란인, 즉 라이덴의 죤으로 통상 알려지던 재봉사 보켈손과 마티스가 뮌스터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키가 크고 당당한 용모를 가지고 있던 마티스는 웅변으로 군중들을 사로잡았고 스스로 예언자로 행세하였다. 그는 어떠한 극단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었던 광란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들의 신념에 진지하였기 때문에 더더욱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는 평의회를 완전히 장악하고는 세상과 분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침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어느 누구도 받아들여질 수 없을 것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뮌스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며칠 내에 침례를 받든지 아니면 도시를 떠나거나 죽든지 하는 선택을 강요당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침례를 받았으나 차라리 도시를 떠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것은 사악하고 광란적인 조치이기는 했으나, 전 유럽에 걸쳐서 수 세기동안 유아세례를 믿지 않던 사람들에게 잔인한 죽음을 선고했던 가톨릭 측의 형태만큼 심하지는 않았다. 그런 방법으로 ‘불신자들’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에서 뮌스터 상황은 급속히 변하여 갔다. 더욱이 도시가 포위되었으므로 서로 물건을 통용하는 제도가 쉽게 도입되었다. 모든 날이 동일하다고 주장되면서 주일을 지키는 일이 폐지되었다. 주의 만찬이 때때로 설교와 함께 공식적으로 베풀어지게 되었다. 마티스는 자기가 임명한 집사들과 함께 음식과 기타 필수품을 분배하였는데 이것으로 또 다 른 갈등이 생겨나게 되었다. 뤼셔라는 이름을 가진 한 구두 제조공이 원래의 뮌스터 시민의 우두머리로 자처하고 나서서 타지방 사람들이 도시의 행정을 장악하는 데 대한 분노와 염려를 나타내게 되었다. 곧 대성당 마당에서 대중 집회가 개최되어 마티스는 즉각 뤼셔에게 사형을 언도했고 뤼셔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이러한 부당한 처사에 대하여 세 사람이 용감하게 나서서 저항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투옥을 당한 뒤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여 도망을 쳤다. 며칠 후에는 상처를 입은 뤼셔가 다시 끌려나와 마티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로써 평의회의 권위는 유지되었다.
이 동안에도 주교의 군대와 계속 싸움이 진행되어 도시의 생활 필수품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어느 날 저녁 마티스는 친구 집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중에 깊은 생각에 잠긴 듯이 보였다. 그는 잠시 후 일어서더니 “아버지여,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입을 맞추고 아내와 함께 자리를 떴다. 다음 날 그는 20여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적진으로 나아가서 맹렬한 공격을 하였다. 많은 적들과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었는데 수가 부족했던 마티스 측 군인들은 한 사람씩 죽어갔고 최후까지 남았던 마티스는 죽을 때까지 결사적으로 항전하였다.
뮌스터 시민들은 이 모습에 경악하고 동조되었으나 곧 보켈손이 권력을 잡고 질서를 되찾았다. 그는 평의회가 인간이 만든 제도이기 때문에 폐지되어야 된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열두 명의 장로를 임명하고는 자기를 보좌하도록 하였다. 그는 설교자의 권위에다가 조직의 권위까지 결합시켰다. 이에 ‘새 예루살렘’에 적합하도록 새로운 법률이 도입되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특별히 받고 있으며 뮌스터는 진정한 교회라고 믿었다. 뮌스터에서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은 때가 되면 점차 통치하게 될 전세계에 적용될 모델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뮌스터에는 남자들의 수는 적었는데 비해 여자들의 수는 그 몇 배가 되었고 어린이의 수는 그보다도 더 많았다. 그래서 1534년에 보켈손은 로드만을 비롯한 설교가들과 열두 명의 장로들을 시청으로 모이게 하고는 놀랍게도 일부다처제의 도입을 주장하였다. 거기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종교심이 깊었기 때문에 그러한 제안은 아주 의외로 생각되었다. 몇 주전에만 하더라도 다른 주제와 함께 결혼에 대한 주제를 다루면서 결혼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신성하고 영속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라는 소책자가 뮌스터에서 발간된 터였다. 그래서 보켈손의 주장은 설교가들과 장로들에 의하여 반박을 당하고 거부되었다.
하지만 그는 8일 동안이나 물러서지 않고 온갖 언변과 능력을 다하여 자기 주장을 펼쳤다. 그는 성경이 마치 일부다처제를 용인하기라도 하듯이 구약시대의 선한 사람들의 실패담을 이용하였다. 같은 이유에서 논리를 편다면 그는 어떤 죄악도 옹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주된 논거는 뮌스터 시에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의 주장은 동의를 얻는 데 성공하고 말았다. 설교가들은 대성당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일부다처제를 옹호하는 설교를 닷새 동안이나 하였다. 마지막 날에 로드만은 모든 젊은 여자는 결혼을 하여야 한다는 법을 반포하고, 나이가 든 여자들은 몇몇 남자들의 보호를 받도록 하였다. 보켈손은 즉각 미모와 학식을 갖춘 마티스의 미망인 디바라와 결혼을 하였는데 아마도 이러한 욕망 때문에 그가 일부다처제를 강력히 주장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세력도 만만치 않아서 포위된 도시 속에서 내란을 일으키려고 시도하였다. 수공업자인 묄렌베커는 저항 세력을 이끌고 시청을 점령하여 만약 이전 형태로 돌아가지 않으면 적군에게 성문을 열겠다고 협박하였다. 보켈손 정부가 곧 붕괴될 듯이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으나 그 옆에는 아직도 설교가들이 있었고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를 지지하였으므로 반란군은 수적으로 밀려서 곧 진압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새로운 법이 가져다 준 해악도 아주 심하여서 그 해가 다하기도 전에 그 법은 폐지되고 말았다.
이런 내부적인 혼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뮌스터는 강력히 방위되고 있었다. 적군과의 싸움에서는 중대한 승리를 얻기도 하였다. 외부로부터 원조가 올 가능성도 아직 있었다.
그런데 보켈손이 왕으로 선포되었을 때 뮌스터의 장래에는 새로운 양상이 나타났다. 보켈손의 옆에는 전직 금은 세공이었던 예언자가 있었는데, 그가 보켈손을 모든 왕의 왕으로 선포하고 새로운 시온의 왕으로 선포하였던 것이다. 곧 대관식이 시장에서 베풀어져서 사람들로부터 거둔 금으로 왕관과 다른 국왕의 상징물을 만들었다. 디바라는 여러 부인 중에서 왕비로 간택되었다. 왕과 호위대 그리고 궁인과 왕비의 수행인들에게 마련된 물품들은 사치스러웠고 모든 점에서 완벽하였다.
그렇지만 오랫동안의 포위로부터 고생하던 일반 시민들은 곧 왕국이 승리하게 된다는 약속에도 그다지 위안을 받지 못하였다. 도시는 한동안 방위되다가 마침내 모반으로 주교의 군대에게 점령을 당하고 말았다. 시장에서 결사적으로 싸우던 300여명의 수비대는 무기를 버리면 안전하게 도시를 떠나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다른 사람들처럼 모두 학살을 당하였다. 아직 죽음을 당하지 않았던 재침례교도들에 대한 재판이 벌어졌을 때 디바라는 믿음을 부인하면 목숨을 건질 것이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죽음을 선택하였다. 보켈손과 다른 지도자들은 대관식이 거행되었던 바로 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고문을 당하고 처형되었다. 그들의 시체는 성 램버트 교회의 탑에서 철로 만든 통 속에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1535).
많은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은 가차없고 격렬할 정도로 사악하고 잘못되었다는 비난을 받아왔는데 이러한 비난이 전반적으로 의심을 받지 않고 수용되어 왔다.
그렇지만 이것은 놀랄만한 일이 못된다. 주님 자신도 자신의 비천한 초림과 고난과 죽음 및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신 다음에 제자들도 역시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오해를 받아 거짓되이 고소를 당하셨다. 그분보다도 오히려 강도가 사랑을 입었고 지배자들과 군중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다. 그분은 행악자들과 함께 죽음을 당하셨으며 세상은 물론 제자들마저 그분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똑같은 일을 당했다고 해서 무엇이 놀랄만한 일이겠는가? 가야바와 빌라도처럼, 종교권력과 세상권력이 합세하여 주님의 제자들에게 침 뱉고 채찍질하고 잔인하게 죽도록 하였다. 대중들은 학식이 있는 자건 무식한 자이건 그들을 조롱하였고, 그들은 행악자들도 낙인찍혀서 십자가형을 당하였다. 그들은 그릇된 가르침과 악한 행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고 오히려 그것에 대해 못 박혔거늘 도리어 ‘이단’ 또는 ‘사악한 자’라는 누명하에 엄청난 고통을 당하였다. 그들이 쓴 책은 불태워졌고 그들을 정죄하기 위한 주장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거룩하고 온유한 삶을 살았건만, 그들을 비난하던 사람들이 상상하던 잘못을 저질렀다고 묘사되었고, 그들은 살해하던 사람들의 잔혹함은 오히려 용인되었다.
바울파나 알비파 그리고 왈도파나 롤라드, 재침례교도 등, 듣기만 하여도 이단적이고 분파적으로 세상 질서를 엎어 버릴 듯한 느낌을 갖게 만드는 그 사람들은, 당대의 지식인들로부터 돌로 맞은 스데반을 맞아들이시던 바로 그 주님 앞으로 갔다. 그렇지만 압박 받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사랑, 그리고 관용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은 그들의 이름을 알지도 못하던 많은 사람들 사이에 계속 전수되어 왔다.

/ E. H. 브로우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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