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딤후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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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기술의 발명

  • 관리자 (ehompy0429)
  • 2014-05-23 1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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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존 폭스
 
 
1450년경까지는 성서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책들이 펜으로 쓰여졌다. 독일의 멘쯔의 죤 구텐베르크는 목판에다 알파베트 문자를 새기고 잉크를 묻혀서 서툰 수동식 프레스(press)로 요판 인쇄를 하는 기술을 발명해냈다. 그래서 펜으로 일일이 복사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중요한 발명은 우연히 얻어진 것이었다. 소년 시절 구텐베르크는 나무 껍질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면서 어느 날 아침을 즐겁게 보냈다. 집으로 돌아와서 그는 문자들을 판자 위에 펴놓고 말이 되도록 글짜를 짜맞추었다. 그런데 근처에 자주색 물감통이 놓여 있었는데, 그만 실수로 문자들 중의 하나를 물감통에 빠뜨렸다.
 
재빨리 그는 다시 그것을 꺼내어 벤치 위에 놓인 매끈한 가죽 띠 위에 놓아 두었다. 그러자 누르스럼하고 하얀 가죽 표면 위에 자주빛 아름다운 문자가 금방 새겨졌다. 이 우연한 발견이 활자 인쇄기술의 첫걸음이 되었다. 이 때문에 30년 뒤에 구텐베르크의 이름은 유명하게 되었다.
1450년 그의 인쇄소가 멘쯔에서 개업되었다. 거기서 출간된 첫번째 책은 라틴어 성경책이었다고 한다.
 
 
 
  영국 초기의 성경
 
우리는 다시 초기로 돌아가서 영국의 성경 역사를 살펴보자. 4세기 초까지만해도 기독교가 전파된 지역에서 영국 사람들과 그 관습에 관해서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4세기 초에 성서가 영국에 소개되었다는 기록도 없다.
5세기 중엽 브리타니아는 적들로부터 심한 압박을 받았다. 로마의 수비대는 침략군과 싸우기 위해 철수했기 때문에 브리타니아는 로마의 주둔군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유럽의 야만족 색슨족과 앵글족이 점차 일어나 정복자가 되었고 브리타니아의 통치자가 되었다. 기독교 세력은 6세기 초까지는 이 거칠고 잔인한 민족들 가운데 뚫고 들어갈 길을 찾지 못했다. 앵글로-색슨 교회의 기초를 놓은 사람은 유명한 어거스틴이다.
 
 
 
성경을 색슨 언어로 번역한 베데
 
706년까지는 제롬의 라틴어 성경을 앵글로 색슨족의 언어로 번역하려는 노력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706년 쉐르본의 주교 이드헬름이 시편들을 색슨 언어로 번역하였다. 곧이어 에그베르가 복음서들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몇년 후에는 색슨의 현자, 또는 존경할 베더라 불리웠던, 당대의 가장 뛰어난 학자인 베데가 성경을 모국어로 번역하였다.
이 착한 노인에 관해서 그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그는 병상에서 죽어가면서 약한 목소리로 요한복음을 불러주고 제자가 받아쓰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 우리 스승님은 아직 이렇게 많이 남은 요한복음을 끝까지 어떻게 불러주어 번역을 마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노인 베데의 제자는 의문을 가졌다. 그는 그 때 호흡이 심히 곤란해지고 있었고 그의 다리는 부어올랐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불러주고 제자가 받아쓰고 있었다. “빨리 서둘러라,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지 알 수 없구나. 주께서 속히 나를 불러가실지도 모른다.”
밤새도록 그는 자지 않고 누워서 기도를 드렸고 다음날 날이 밝았을 때 그는 다시 번역을 시작하여 제자들에게 전속력을 다해서 받아쓰도록 명령했다. 이렇게 하여 하루 종일 일하고 쉬고 정확하게 작업을 계속하다가 저녁이 되었다. 그의 움막 창문에 태양이 비치고 있었다. 노인은 마지막 말씀을 힘없이 불러 주고 있었다.
“선생님 한 장만 남았습니다.”하고 염려스러운 제자가 말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가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쉬워! 펜을 들고 빨리 쓰도록 해라.” 하고 베데는 대답하였다.
눈물이 앞을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젊은 제자는 계속 써나갔다. “이제는 사부님”하고 그는 떨리는 입술에서 마지막 말씀들을 간신히 알아듣고 말했다. “이제는 단 한 구절 남았습니다.” 베데는 그 구절을 불러주었다.
“다 끝났습니다. 선생님.”하고 그는 마지막 구절을 기록하고 머리를 들면서 소리쳤다.
“아, 끝을 내었구나.”하고 죽어가는 성도는 말했다. “나를 일으켜 다오. 내가 종종 하나님께 기도드리던 나의 방 창가에 나를 눕혀다오.”
그의 부탁대로 되었다. 그의 입술의 마지막 기도로, 거의 마지막 호흡을 몰아 쉬면서 그의 아름다운 영혼은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기 위해 애를 썼다.
 
 
그 후 색슨 번역
 
다음번 번역가는 알프레드 대왕을 능가하는 사람은 없다. 대왕은 자기 나라에서 자유인으로 태어난 모든 젊은이는 우선 영어 성경을 잘 읽을 수 있어야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소망을 표현하였다. 그가 죽기 전 900년에 대왕은 색슨어 시편서와 백성들이 좋아하는 성경인 복음서를 출간했다.
10세기 말에는 캔터버리의 대주교 엘프릭이 구약 성경의 상당한 부분을 색슨어로 번역하였다. 무지로 인해 깜깜한 밤이 사방에 덮여있는 시대였다. 지금도 현존하고 있는 옛 원고들을 살펴보면서 이들 초기 성경번역의 대부분은 교회 안에서 사람들에게 읽어 줄 목적으로 번역했고, 쉽게 이해시키려고 아주 평이하고 단순한 용어를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백부장(a centurios)은100인 대장(a hundered man)으로 번역하였다. 제자(diciple)는 배우는 기사(learning knight)로, 또는 생도(learning youth)로 번역하였다. 안식일은 쉬는 날(the rest day)로, 연보궤에 헌금 넣는 여자는, 보물함(gold hoard)에 헌금을 넣는 여자로 표현하였다. 이들 노련한 사람들은 이렇게 백성들에게 아주 친숙한 언어로 성경을 표현하려고 그들의 모든 정신력을 기울였다.
 
 
영어의 형성
 
초기 앵글로 색슨 성경이 나온 후에 영국의 성경 번역 역사의 긴 휴식 기간이 왔다. 덴마크인들의 침입으로 생긴 혼란 중에 번역을 하거나 원고를 정리할 생각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나라가 온전하게 평온을 회복하기도 전에 해스팅(Hastings)의 치욕스러운 전쟁터에서 영국은 노르만족의 발 아래 무기력하게 쓰러지고 말았다.
고위직 색슨족의 성직자는 노르만디족의 성직자들로 대치되었다. 그들은 정복한 사람들을 조금도 동정하지 않았다. 색슨족의 원고 성경을 유치한 야만족의 유물로 생각하고 경멸하면서 집어치웠다. 정복당한 사람들의 언어를 이렇게 멸시했기 때문에 성경을 번역하려는 모든 노력이 끝나고 말았다. 교만한 노르만족 성직자들은 일반 백성들에게 성경 지식을 보급하려는 욕망에 대해서 조금도 동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수백 년 동안 이들 성경책들은 틀어막힌 우물처럼, 봉쇄당한 샘물처럼 영국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가 전적으로 잃기만 한 시대는 아니였다. 이들 몇 세기 동안 영국은 영어 성경을 위해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 국가의 미래의 언어, 지금 쓰고 있는 영어가 형성되어가고 있었다. 색슨어, 노르만과 프랑스어가 나란히 갈등을 빚으면서 점차 옛 색슨어는 점점 적게 쓰이고, 프랑스어가 조금씩 조금씩 귀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노르만족은 상륙 당시 프랑스어를 사용했었다. 그리하여 두 개의 언어는 함께 융합되어 통일된 영국의 언어가 되었다.
 
 
노르만족 지배하의 영국 교회
 
노르만족과 색슨족이 한 개의 나라로 서서히 통일되어 가는 세월 동안 영국의 교회는 어떠했는가? 초기 순수한 시대의 고매한 지위에서 교회가 내려앉으면서 14세기 초에는 비천한 영적 타락의 장으로 몰락해 있었다.
성직자들은 무식하고 부패했으며, 사람들에게 미사를 드리거나 고해를 위해 돈을 내게 하고 그들로부터 억지로 돈을 짜내는 일 외에는 백성들에게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양들을 목장에서 풀을 먹이심은 털을 깎아내기 위해서라는 옛 말을 인용하기 좋아하였다.
교황들은 로마에서 살지 않았고 남부 프랑스의 도시 아비뇽으로 이사하였다. 거기서 프랑스 왕들에게 빌붙어 사는 신세가 되었다. 그들의 탐욕과 재물욕은 거의 세계적인 불만을 일으켰다. 외국인 사제들의 무리가 영국교구를 관할하기 위하여 파송되었다. 백성들은 교황이 부과하는 세금이 국왕에게 내는 세금보다 더 많다고 불평하였다.
이 시대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남은 것이 거의 없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모든 사람에게 널리 알려졌으나 그리스도의 참된 교리는 고위 성직자들조차 모르는 시대였다. 믿음과 위로에 대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일과, 자유와 은혜에 대해서, 기독교를 구성하고 있는 이들 진리에 대하여 그들은 어느 한 가지도 아는 것이 없고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성경지식이나 신학은 극소수에게만 알려져 있었고 그것도 학교 안에서만 통용되었고, 그들이 논쟁이나 토론을 위해 원하는 주제 쪽으로 신념을 바꾸게 할 목적으로 가르쳤다. 베드로와 바울은 공부하지 않고 로마 카톨릭 저자들의 작품을 연구하는 데만 시간을 다 바쳤다.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과 교리의 살아있는 능력을 저버리고 외향적인 의식과 인간의 전통에 눈이 가리워진 채 온통 끌려다녔다. 교회에서 보이는 것, 배우는 것, 설교나 말씀을 듣는 것 중에서 실생활에 필요한 것은 별로 없었다. 의식 위에 의식(儀式)만 쌓여갔다. 사람들은 그들이 교회에서 안 것 외에 다른 것을 배우거나 예배해서는 안되었다.
이러한 형편은 수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말 못하고 끌려다니는 가축처럼 순종했다. 그러나 14세기 초에 시대의 표적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그런 형편이 더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음에 틀림없다. 교육이 보다 보편화되고 있었고 새로운 대학들이 설립되고 있었다. 강한 독립정신 또한 백성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었다. 국왕 에드워드 3세(Edward Ⅲ)와 그의 국회는 연간 공세(貢稅)를 로마로 보내달라는 교황의 요구를 분명히 거절하였다. 위기가 임박했음이 분명했다. 마치 그 위기를 재촉하는 것처럼 당시 로마에 교황 한 사람, 아비뇽에 교황 한 사람, 라이벌 교황 두 사람이 선출되어 교회 안의 두 파벌 간의 심각한 분쟁으로 인하여 전세계 기독교 국가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추앙받는 그들이 도시에서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고 군사를 일으켜 절대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싸우면서 힘없는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살육하였다.
영국 사람들은 이 모든 사실에 심히 동요했다. 사람들의 손에 펴놓은 성경책만이,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희생정신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고 참된 종교의 신앙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시대가 명백히 왔던 것이다.
 
 
암흑시대를 꿰뚫는 빛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의 성경
 
그의 시대의 사람들을 위하여 참 진리의 신앙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이 위대한 일을 위하여 양육된 존 위클리프는 1325년에 태어났다. 그의 어린시절의 기록은 별로 없다. 옥스포드(Oxford) 대학교 내의 베일리열(Balliol) 단과대학 학장에 임명될 때까지의 초기의 생애에 대해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당대의 제일가는 석학들 중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성직자들의 조직사회 속에서도 성경이 거의 사용되지 않던 시대에 그가 어떻게 해서 성경연구와 번역에 몰두하게 되었을까?
강의실의 메마른 토론에 만족을 찾지 못한 심령이 가난한 열심쟁이 학생 시절, 옛 원고뭉치가 쌓여있는 헌 궤짝 속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는데, 옛 경건한 수도사들이 잘 다듬은 양피종이에다 아름답게 쓴 원고뭉치에 시선이 끌렸다. 이것은 꿈이 아니라 생시였다. 위클리프가 성경을 발견한 것은 분명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그는 성경을 오랫동안 뜨거운 심정으로 숙독하고 하나님께 열열히 기도하는 중에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
“이 성경은 인류의 재산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사람으로부터 성경을 뺏을 수 없다.”하고 위클리프는 말했다. “…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아주 친숙한 형식으로 성경을 가르쳐 줌으로써 세상을 뒤바꿔 놓았다. … 그래서 나는 성경책에 담겨있는 교훈을 행함으로서 우리들 모두가 영생에 들어가기를 원하며 진심으로 기도한다.
영국의 대중이 쓰는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그 성경이 보편적으로 읽혀지게 하는 것이 위클리프가 영국교회의 개혁을 위해서 시도하는 첫번째로 중요한 과업이었다. 그는 또 대담하게도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였다. 면죄부를 판매한 돈이 교황청의 재정수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는 성자들의 상을 우상숭배하듯이 참배하는 행위를 쓸데없는 짓이라 비난했고, 성자의 상을 숭배하는 일이나, 성자를 숭배하는 일을 다 같이 우상숭배 죄로 단정하였다. 그는 믿음의 유일한 근거로 성경책을 말하고 교육받은 모든 사람들은 혼자서 성경을 연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위클리프는 성경을 근거로 하여 사제직의 권한을 공격하고, 사제직이 존폐의 위험을 받도록 위협하였다. 그의 사상에 동조하는 세력은 소수 학자들만이 아니었다. 그가 하는 일의 특징은 가난한 설교자들의 모임을 조직하고 “검소한 사제단”이라 칭하고 그들이 재직하고 있는 현장에서 설교를 하고, 그들의 검소하고 고행스러운 생활습관은 당시 교회의 호사스러운 성직자들의 생활을 비웃어주며 경종을 울렸다. 이들은 또 돌아다니면서 설교를 하였는데 그들의 선생님의 교리를 널리 전파하였다. 그것은 놀라운 속도로 전파되었다. 몇년 뒤에는 위클리프의 추종자들은 수천 명에 달했고, 그의 적들이 “롤라드”라 부르는 사람들은 두 사람 중 한 사람 꼴로 증가했다. 그들은 도처에서 모든 계층에서 발견되었다. 도시의 귀족계급 속에 있는가 하면, 시골 농부들 가운데서도 발견되었고 수도원의 기숙사에서도 발견되었다.
 
 
소위 롤라드와 위클리프의 심문
 
빈둥거리며 종알종알 찌껄여대는 사람이란 뜻의 “롤라드”란 말은 로마교회의 사람들이 그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갖다붙인 경멸스런 별명이었다. 그러나 롤라드가 신속하게 증가함으로써 경멸이 변하여 두려움이 되었다. 1378년 3월에 런던에 있는 블랙(Black) 수사들의 수도원 대강당에서 종교회의가 개최되었다. 수도사들과, 수도원장들, 교회의 주교들과 박사들이 모인 이 대집회 가운데서 존 위클리프는 심문을 받기 위해 서 있었다. 그는 감히 교회의 부패상을 공격하였다. 그는 면죄부를 비난했고,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해 드리는 미사를 사기극이라고 주장하였다.
그후 그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이 모든 행위는 위클리프의 죄가 되었다.
사흘 동안 심문을 하고난 후에 위클리프의 주장은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는 루터워드에 있는 조용한 목사관으로 물러가 있었다. 거기서 옛 라틴어 원고들과 성경주석들을 쌓아놓고 그의 필생의 대작업인 성경번역을 계속하였다. 마침내 성경 전권을 영어로 번역하였고,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성경 전권이 보통 사람들의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위클리프의 죽음
 
그의 위대한 선배 베데가 숨을 거두기 전에 간신히 위업을 당성한 것처럼 위클리프도 죽기 전에 간신히 하던 일을 마치었다. 그는 일을 진행하는 도중에 비명의 죽음을 당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의 적들은 많고 강력하였다. 왕과 교황이 그를 대적하였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시간 문제로만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의 원수들은 그를 칠 증거를 수집하느라 바빴다. 그러나 그 노인을 하나님께서 직접 데려가시게 하려고 손을 대지 못했던 것이다. 1384년의 마지막 날에 그는 마비 상태가 되어 죽었다.
위클리프가 죽은 지 얼마 후에 교황에게 한 탄원서가 올라갔다. 위클리프의 시신을 파내어 거름더미 위에 매장하도록 해 달라는 탄원서였다. 교황은 그의 명예를 위해서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40년 후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콘스탄스 종교회의의 칙령으로 위클리프의 유해를 파내어 불사르고 그 재를 루터워드 곁을 흐르는 스위프트 강물 위에다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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