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딤후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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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호메트의 등장과 타락한 기독교

  • 관리자 (ehompy0429)
  • 2014-05-23 15: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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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호메트교는 창시자 마호메트의 이름을 따서 붙인 종교의 이름이다.
마호메트교는 전세계 13억 인구가 믿고 있는 종교이다. 마호메트는 570년경 아라비아의 메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가 가난하여서 변변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타고난 능력과 수완으로 살아 생전에 스스로 왕이 되었고, 죽은 뒤에는 선지자로서 거의 신적인 숭배를 받았다.
마호메트의 추종자들을 마호메트교도들(Mohamedans)이라 부르는데, 이는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또는 무슬맨(Mussulmans) 또는 모슬렘(Moslems)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이슬람 언어로 하나님의 백성, 또는 선지자의 백성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가끔은 그들을 사라센이라고도 부른다. 그것은 그들의 조국 아라비아에 있는 종족들 중 제일 으뜸되는 족속인 사라센족(Saracens)의 이름을 따서 부르는 것이다.
마호메트의 성서라고 할 수 있는 경전은 코오란(Koran) 또는 알코오란(Alcoean)이라 부른다. 이 책 속에는 이교도와 유태교, 기독교의 발자취가 적혀 있고, 그것들을 묘하게 혼합해 놓았다. 경전이 주장하는 원리와 약속하는 보상을 보면, 그것을 읽게 될 사람들의 육감적인 천성에 영향을 잘 끼칠 수 있도록 적절히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칭 선지자 마호메트


40세에 마호메트는 자신을 선지자라고 선언했다. 심한 간질 증세에 사로잡혀 까무러치게 되면 천사가 찾아와서 그를 가르치고 있고, 천사의 임재로 인해서 혼수상태에 들어가서 경련을 일으킨다고 그의 무식한 제자들을 믿게 함으로써, 자기의 불리한 병을 유리하게 이용했다.

그렇게 해서 그의 영향력은 심히 커져서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아라비아 거의 전 지역에서 그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했다. 그리하여 용감한 용사들로 구성된 군대는 그의 명령을 받아 열심히 싸웠다. 무엇보다도 마호메트 자신이 군인으로 앞장섰다. 좀더 세력을 얻었을 때 그는 무력으로 자신의 교리를 전파해 가는 방법을 택했다. 모든 환경에서 감사하게 될 파라다이스(낙원)의 영광이 전장에서 죽는 제자들에게 약속되어 있었다. “칼은 하늘 나라의 열쇠다.”라고 그는 말했다.

“전투를 하다가 죽는 사람은 죄 용서함을 받고 부상당한 몸은 즉시 치료받을 것이며, 천사의 날개로 보호를 받아 높은 신분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이러한 약속에 따라 절대적인 신앙의 결과로서 자칭 선지자의 군인들은 언제나 용기 백배했고, 늘 새로운 용기를 가졌다. 전투를 하다가 죽으면 즉시 파라다이스로 들어가는 것이 보장된다는 신념 때문에 그들은 적진을 향해 맹렬히 뛰어들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하려고 하는 죽음에 대하여 오히려 환심을 사려고 덤벼드는 것 같았다.


마호메트교의 성장


마호메트는 632년에 죽었다. 그가 창시한 종교의 보급이 너무 빨랐기 때문에 마호메트가 죽은 지 80이 지나자 마호메트 교도들, 통칭 사라센들은 전 아라비아를 지배하였고, 시리아, 페르시아, 이집트, 그리고 아프리카 북부의 전 해안지대와 스페인을 지배하였다. 그러므로 옛날 로마가 7세기에 걸친 전쟁으로 정복한 나라들을 그들은 이 짧은 기간에 정복하였다.

기독교 국가들의 군대에 의하여 종종 격퇴당하고 수천 명씩 전사하기도 했지만, 그리고 때로는 기독교국의 국경 내부 깊숙히 쳐들어가서 저지당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거대한 세력은 800년 동안 계속해서 뻗어나갔다. 마침내는 콘스탄티노플 기독교 교회의 첨탑에다 그들의 초생달 기(국기)를 달고 비엔나의 성문 앞에서 전쟁의 나팔을 울렸다.


터키인들의 콘스탄티노플 공격


1100여년 동안 공격을 잘 막아냈던 옛 제국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드디어 이슬람 군대에 의하여 포위되었다.
터키의 회교국 술탄(터키계 이슬람의 군주를 일컬음) 중에서도 제일 사납고 무서운 마호메트Ⅱ세가 아버지 아무라드가 물려준 홀을 잡자마자 기독교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뺏을 결심을 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일찍이 로마황제의 명예로운 칭호를 회복한 적이 있는 놀라운 용기의 왕자 콘스탄틴 팔레올로구스가 다스리고 있었다.
4월 초에 터키군이 성 앞에 나타났다. 아시아 전역에서 몰려온 3만 명의 사내들이 거대한 마호메트군을 형성하고 있었고, 한편으로 312척의 함대가 바다 쪽에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위하여 준비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방어


이 압도적인 군사에 대항하는 콘스탄틴은 몇 척의 전함과 노예선, 그리고 약 1만 명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방어전에 참전하기에는 부적합한 사람들이었다. 값비싼 건물 안에는 노동자들과 보석과 승려들과 여자와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단련된 용사들은 몇 명밖에 없었다. 황제의 명에 의하여 거리마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적을 대항하여 무기를 들 만한 사람과 자원하는 사람들을 찾고 있었다. 방어군을 돕기 위하여 흑해에서 몇 척의 전함과 승무원들이 도착해 있었고 터키군의 전함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항구의 입구를 튼튼한 쇠사슬로 가로막아 놓고 있었다.


대포로 공격을 시작한 마호메트


성은 이중 벽과 물이 채워져 있는 깊은 운하로 보호되고 있었으므로, 성에 접해있는 땅에 대하여 터키군은 맹렬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 강한 방어군을 대항해서 그들은 그때 막 사용하기 시작한 무서운 파괴력을 지닌 화약이 없었더라면 조금도 전진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호메트는 성벽 앞에다 14대의 거대한 대포를 설치해 놓고, 그 대포들 중의 몇 개는 20파운드의 무게가 나가는 돌 탄환들을 쏘아대고 있었다.

이들 대포들의 우레 같은 포성과 성문과 성 가운데에 떨어지는 돌 탄환들이 부수어지는 소리를 내면서 그들을 겨냥하고 있는 이 새롭고 무서운 무기에 방어군들은 사기가 꺾였다.
그래서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그리스인들을 황급히 성벽으로 불러내었다.


성벽에서 떨어지는 그리스인의 불


방어군들은 대포는 없었지만 창 던지는 기계와 돌 던지는 기계는 잘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유명한 “그리스인의 불”(Grecian fire)을 제조하는 기술을 알고 있었다. 그리스인의 불은 쇠와 돌을 녹일만한 화력을 지닌 인화성 액체였다. 그것의 주성분은 나프타(Naphtha)와 유황과 송진으로 구성되어 있고 일단 불이 붙으면 화력이 어찌나 센지 물을 가지고도 진화할 수가 없었다.
그리스인의 불은 바다나 육지 어느곳이든지 적을 공격하는 데 이용할 수 있었다. 그것을 거대한 금속 기계로 성벽에서 쏟아 부으며 아마 섬유와 삼 부스러기를 꼬아서 창과 화살에 감고 불을 붙여 쏘거나 던지는 것이였다.
그리스인의 불을 긴 구리 파이프를 통해서 배의 갑판 위에다 사용하면 난폭한 괴물 같은 형상을 하고 뱃머리에 달라 붙는다. 그 괴물은 불꽃과 연기를 토해내는 것 같았다. 그것을 제조하는 비법은 약 400여년 동안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그리스인들에 의해 조심스럽게 전수되고 있었고, 그들의 주요한 방어 수단으로 정당하게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무슬렘에 의해서 그 비법이 발견되고, 또는 훔쳐내게 됨에 따라, 그것은 도리어 그들을 향해 공격하는 데 쓰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화약의 발명으로 그 사용이 끝나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후로는 그리스인의 불을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없다.
이 전쟁 동안에 그리스인의 불은 터키군을 가장 무섭게 한 무기로 쓰였다. 터키군이 운하를 건너거나 성벽을 기어오를 때 맹렬한 화력과 숨막히는 연기로 물리쳤고 공성기와 사닥다리를 파괴했으며 시체까지 태워 없앴다. 그 당시 이교도군과 기독교군 사이의 전쟁은 특히 필사적인 백병전의 연속이었다.

어느 쪽이 이긴다고 예측할 수가 없었다. 성벽 앞에 있는 운하는 부상자들과 죽은 자들로 무더기를 이루고 있었고, 그들의 시체더미 위로 배후에 있던 성미 급한 적군의 새로운 행렬이 나아오고 있었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군에 대항한 콘스탄티노플의 영웅적인 방어는 콘스탄틴 황제와 그의 신실한 장군 자스티니아니의 용기있는 지휘 덕분이었다.

 그들의 용기와 열성은 작은 수의 병력이 엄청나게 많은 군대로 보이도록 하였다.
그러나 쉴새없이 두들겨 패는 돌 대포알은 외벽에 한 구멍을 내었다. 살펴보니 마호메트는 부하들에게 다른 공격을 준비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예측되는 공격수단 중의 하나는 거대한 나무탑 즉 여러 개의 계단이 있는 움직이는 성에다 무장한 군인들을 가득 채우고, 이것을 굴려서 밀면서 진격하는 용사들을 보호하고 무너진 성벽으로 접근을 하고 성 안으로 뛰어들게 하는 것이었다.

파괴된 벽을 통해서 길을 열려고 하는 무슬렘의 모든 계획이 용감한 방어군에 의해 번번히 격퇴되면서 이틀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드디어 터키군은 격퇴되었다. 마호메트는 나무 탑이 무너져 불타는 것을 보면서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다. 그 사나운 술탄은 이 뜻밖의 패배에 심히 분노하고 삼만 명의 예언자들이 이번 재난(패배)을 예언했지만 자기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고 소리쳤다.


마호메트 함대의 패전


자기 나라 군대가 역전패당한 몇 주일 후에 항구에 정박해 있던 그의 함대에는 더 큰 불행이 닥쳤다.
콘스탄티노플을 구원하기 위하여 4척의 기독교 전함이 들어왔다. 그들은 터키 함대의 퇴각 길을 가로막고, 터키 함대의 대부분을 그 선원과 함께 침몰시켰다. 근처에 있는 산 꼭대기에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마호메트는 분노로 입가에 거품을 품으며 바닷가로 말을 몰아 달려갔다.

그는 패배하고 돌아오는 그의 전함과 마주쳤다. 그는 선장을 비겁자로 맹렬히 비난했다. 그는 분노가 극에 달했으므로 해군 제독의 직위를 박탈하고 그를 공개적으로 매질하였다. 그러나 분노도 처벌도 다 소용없었다. 4척의 기독교 배들은 항진을 계속하여 그들 앞에 있는 터키인들의 전함을 쫓아내고 마침내는 성벽 밑에다 승리의 닻을 내렸다.
항구를 점령하는 것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했다. 그것은 바닷쪽에서의 공격을 차단할 뿐만 아니라, 절실히 요구되는 원군과 식량의 보급을 받는 통로를 확보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명예스럽게도 모든 기독교 국가들은, 항구를 봉쇄하고 있는 4척의 전함 외에는 더 이상의 원조를 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공급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들은 부단의 용기로 계속해서 방어를 했다.
마침내 마호메트 자신도 공격의 결과에 대하여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위험한 성벽까지 그를 따라 왔던 거칠고 야만스러운 군인들은 아시아의 찌꺼기라 묘사하면 알맞은 사내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렇게 많은 동료들의 희생에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피를 흘리는 위험스런 포위작전을 그만두라고 큰 소리로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나운 술탄은 만일 그들이 한번만 더 공격을 한다면 부유한 성안의 모든 보물을 다 그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함으로써 떨어진 사기를 다시 소생시켰다.


마호메트의 최후의 공격


따라서 5월 29일 저녁에 무슬렘 군들은 마지막 공격을 위해 모였다. 마호메트는 병졸들 사이로 말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자기를 따라 성 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에게 전리품과 노예들을 나눠주겠다는 약속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그들 지도자를 에워싸고 운집한 용사들의 함성이 어찌나 큰지 성벽위에 있는 방어군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다가 갑작스러운 침묵이 계속되고, 갑작스럽게 적진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횃불 신호가 밝혀짐으로써 불안과 공포가 점점 고조되었다.
마지막 전투가 임박한 것을 알고 콘스탄틴 황제는 장교들을 불러모으고 감동적인 연설로 무법한 이교도들에게 가정을 넘겨주지 말자고, 그들을 지키다가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격려하고 부탁하였다.

그의 말은 무장한 청중들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하였다. 그들은 마치 최후를 맞이하는 것처럼 서로 껴안고 작별을 한 뒤에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그런 다음 황제는 궁궐로 돌아가서 마지막 지시를 내렸다.

그의 정부 밑에서 어떤 불행이 생긴다 하더라도 용서해 달라고 가족들에게 부탁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성 소피아 교회로 가서 기도하고 빵과 포도주를 성찬으로 받았다. 그후에 그는 자기의 방위 진지로 돌아갔다.
한밤중에 마호메트는 공격신호를 울렸다. 즉시 그의 전군은 성벽으로 쇄도해 왔다. 터키인들은 뜻을 정한 탓인지 야수같이 광란하면서 싸웠다. 무제한의 전리품을 약속한 데 고무되어 그들은 성벽을 뛰어넘어 돌진하였다. 그들 주변에 죽어 넘어진 동료들의 시체를 보면서도 놀라지 않았다. 그리스인의 칼과 창을 대적하면서 필사적으로 길을 개척하였다.
공격이 사납다고 해서 방어가 위축된 것은 아니었다. 전사자들에 의해 방어의 벽이 엷어지긴 했어도 방어군은 성벽 위에서 그리스인의 불을 시내 처럼 퍼붓고 화살과 창과 돌과 바위를 비오듯 퍼부었다.

수백 명의 공격군들이 타서 죽거나 박살이 나서 죽었다. 그러나 전투는 군세가 불균형해서 오래 끌지 못했다. 바깥 성벽은 터키군이 이미 통과했고 그리스군은 성벽 안쪽에 서둘러 구축한 바리케이드 뒤에서 최후의 저항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황제는 국민들보다 앞장서서 침입자들과 백병전을 벌였다. 두 시간 동안 혈전이 계속되었다. 그때 마호메트는 가려 뽑은 일만 명의 기병대인, 유명한 자니자리스와 함께 언덕 위로 쳐들어갔고 언월도(반달 모양의 칼)를 번쩍이며 바리케이드 뒤에 있는 소수 부대 위로 뛰어들었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콘스탄틴의 죽음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자니자리스의 광란하는 칼 앞에서도 황제는 부하들을 격려하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허사였다. 기병들의 저항할 수 없는 맹공격 앞에 그들은 풍비박산이 되어 달아났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그의 제국이 패배했다는 것을 깨닫고도 달아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싸우다가, 죽어 넘어진 신하들의 시체 더미 위에 그 또한 죽어 넘어졌다.
콘스탄티노플은 이제 야만적인 정복군의 먹이로 무력하게 버려져 있었다. 대량학살의 끔찍한 장면 중에서도 거친 아시아의 군인들은 집집마다 몰려다니면서 노략질하며 파괴와 살인을 일삼았다. 여자와 아이들은 비참한 포로의 신세가 되어 한곳에 모아 두었다가 이교도들의 노예로 끌려 나갔다. 반면 모든 저항군은 칼로 죽임을 당했다.

 마호메트는 사흘 동안 그의 야수 같은 부하들이 마음껏 노략질하고 살인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4만 명의 불쌍한 주민이 살해되고, 6만 명의 더 비참함 사람들이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할 때 터키인들은 성 소피아 대교회의 첨탑에서 십자가를 뽑아내었다.
거기에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신이다.” 라고 글을 쓴 다음 그 십자가를 성 주위로 들고 다니면서 군인들이 멸시하도록 했다. 또 시체들 속에서 황제의 시신을 찾아내서 모욕의 대상으로 삼았다. 마호메트는 황제의 머리를 잘라서 창 끝에 꿰고 군중들 앞에 보여주면서 조롱받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제국이 멸망할 때 화를 면한 그리스인들은 서부와 북부 유럽으로 도망을 갔다. 옛날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은 이제 술탄의 집이 되고 마호메트교의 요새가 되어서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그리하여 콘스탄틴 대제가 창건한 옛 로마제국의 수도는 1123년 뒤에 다른 콘스탄틴의 통치기간에 망하여 아시아의 야만인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로데즈의 공격


콘스탄틴노플이 망한 지 67년 후에 터키인들은 심히 번성하고 강성해져서 전 유럽을 위협하게 되었다. 그들은 헝가리에 침입해서 벨그라드 시를 수중에 넣었다. 그후 질풍같은 공격을 견디지 못하여 많은 다른 성읍들이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그후 2년 뒤에 솔리만 1세의 지휘로 로데즈를 공격하였다. 400척의 함대와 20만의 대군이 몰려왔다.
당시에 그 섬은 나이츠 호스피탈러즈 가문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200년 이상 이교도들과 싸워서 성을 지켜온 기독교 십자군 귀족 가문이었다. 그들의 성은 허물어져 평지와 수평을 이루고 음식물이 떨어지고 탄약과 무기가 없어질 때까지 이들 영웅들은 터키인들을 대항하여 싸웠다.

기독교 국가들로부터 아무런 원조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들은 항복했다. 포위 작전은 거의 6개월을 끌어 왔었다. 그동안 터키인들도 모진 고생을 하였다. 그들 중 약 3만 명의 병력이 부상과 질병으로 죽었다.
이후에 솔리만은 20만의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를 두 번째로 침공하였다. 그는 기독교인들로부터 부다페스트를 다시 빼앗고 그곳에서 발견된 사람들을 잔인하게 다루었다.


터키군의 비엔나 포위


무한의 야망과 세계 정복의 욕망을 불태우면서 솔리만은 그의 광란의 군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에 들어갔다. 도중에 마음껏 살육을 자행하면서 그의 발 아래에 유럽이 무력하게 놓여 있다고 생각하며 지상에서 기독교를 사라지게 하겠다는 듯이 위협하였다.
비엔나의 성벽 앞에 그의 모든 군대를 집결시켜놓고 세 사람의 기독교인 포로들을 성 안으로 들여보내어, 그의 군세를 설명하게 하고 시민을 공포에 떨게 했다. 기독교인들에게 다행스러운 것은 터키군이 도착하기 바로 사흘전에 팔라틴(palatine=왕권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백작 프레드릭이 1개의 기병대대 외에, 가려뽑은 고참병 1만 4천 명을 거느리고 성 안에 들어와 있었다.

 터키군 지휘관은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독일군들은 이를 무시했다. 그래서 그는 죽시 포위공격에 들어갔다. 마호메트는 전쟁터에서 죽는 모든 군인들에게, 그들의 죄가 어떠하든 간에, 즉시 파라다이스에 들어가 기쁨을 누리도록 해 준다는 약속을 하고 있다고 앞서 진술한 바 있다.

이 신념에서 그들은 싸우는 동안 그들이 보여 준 겁없는 용기가 생겼다. 그들은 맹렬한 포격을 계속 퍼부었다. 공격하여 성을 뺏기 위해 여러 번의 작전을 시도했다. 그의 행운에 대하여 비상한 제동을 건 적들에 대하여 분이 가득 찬 솔리만은 성의 정문 앞에다 여러 대의 포를 설치해 놓고, 성문을 맹렬하게 두들겨 팼다. 그렇게 해서 곧 성이 깨어졌다.

그때 터키인들은 포연이 자욱한 문을 통해 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기독교인들은 전적으로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칭찬할 만한 용기를 가진 장교들은 마치 원군이 새로 도착한 것처럼 용기 백배하여 소리치며 독전을 거듭하였다. 그들의 독려에 다시 용기를 회복한 병사들은 터키군을 내쫓았고, 터키군들은 치명타를 입고 도주하였다.


기독교인들의 승리

 

필사적인 저항에 앙갚음하기 위하여 성벽 밑에 굴을 파고 들어갈 궁리를 했다. 그는 이러한 전투에 경험이 많은 일리리아 사람들에게 그 작업을 시켰다. 그들은 망루 바로 밑에 땅굴을 파 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세심한 방어군에 의해 발각되었다. 그들은 적군의 땅굴 바로 밑에까지 나아가 불을 붙이고 폭발시켰다. 적군 수백 명이 폭사했다. 이번 작전이 참패로 끝나자 터키군의 광기도 수그러들었다. 솔리만은 병졸들에게 사닥다리를 타고 벽을 기어오르라고 명령하였다. 명령을 따르다 보니 그들은 수천 명이나 전사당했다. 이 엄청난 숫자는 그들의 패전을 가속시켰다.
방어하는 기독교인들은 무거운 돌을 성벽 아래로 던지고 납을 녹여서 붓고 섬유 타레를 감아 기름을 묻혀 불을 붙인 굴렁쇠를 기어오르는 적군의 머리에 던져서 화상을 입히고, 던지는 무기마다 그들을 부상시켰다. 마침내 무슬렘의 광기도 꺾였다. 그들은 더 이상 사닥다리를 기어오르지 못했고 술탄도 공격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리만은 비엔나 성 앞에서 얼마동안 더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질병과 굶주림으로 인해서 그의 부하들 중 절대 다수를 잃었다. 독일군은 그들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방법을 알아냈기 때문이였다.


모든 작전마다 실패하고 전적으로 패배한 뒤에 8만 명의 군대는 전쟁 계획을 완전히 포기할 결심을 했다. 그래서 그는 살아 남은 군사를 모두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리하여 유럽이 이교도의 수중으로 다시 몰락해 들어가는 위협적인 공포에서 그들은 해방된 것이다.
그러나 솔리만은 오스트리아에 대한 그의 전쟁계획을 전적으로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3년 후에 그는 50만 대군을 거느리고(어떤 권위있는 분의 주장)다시 나타났다. 황제 찰스 5세는 12만 명의 잘 훈련된 군사와 수천 명의 비정규군을 가지고 대적하였다.
이들 강력한 두 세력은 전유럽이 떨고 있는 가운데 서로 진격을 개시했다. 기독교 왕국들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대한 전쟁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 접근했을 때 쌍방간에 만만찮은 준비가 있었음을 알고 전쟁을 시작하는 것을 서로가 주저하는 것 같았다. 결정적인 전투는 피하고 전초부대들 사이에 소규모 전투가 몇 번 있었을 뿐이었다.

솔리만은 패배의 위험이 두려웠다. 아시아의 호전적이 아닌 국가들을 상대로 군사를 부리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는 돌아갔다. 황제도 그를 추적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유럽이 이교도군의 침입의 공포에서 해방된 것을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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