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딤후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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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세속화_1 (A.D. 300~850)

  • 관리자 (ehompy0429)
  • 2014-05-23 15: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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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E.H. 브로우드벤트

 
교회가 국가의 권력과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시기에는 세상에 그리스도를 힘있게 증거하였고, 끊임없이 새 영혼들을 거룩한 교제 안으로 인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성령이 이끄시던 자리를 인간의 제도가 대신함으로써,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교회는 급격히 국가 권력과 결탁하여 결국 부패 타락하게 되었다.

 

교회와 국가의 연합
 
감독들, 특히 카톨릭 내에서의 대감독의 지위 때문에 교회와 국가 권력 사이의 결속이 손쉽게 이루어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여전히 옛 제국의 유물인 이방 종교의 최고 사제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기독교를 통괄하는 권력도 장악했다. 교회와 국가는 급속히 가까와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국가 권력은 자신들의 결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박해받던 자들은 곧 박해하는 자들로 변모해버렸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고자 했으나, 그 당시를 지배했던 교회의 권력에 의해 ‘이단’이나 ‘분파주의’라는 이름으로 박해를 당했던 교회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의 글을 통하여, 콘스탄티누스 당시 로마 감독이었던 실베스터 시대에 이루어진 교회와 국가의 연합에 대해 전적으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음을 천명하곤 했다.

그들은 많은 교회가 세상적인 권력과 야합하던 시대 가운데서도 일관된 자신들의 온전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즉, 사도 시대로부터 그 때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온 성경적 교회의 원형을 지켜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이유를 들어 박해가 재현되었는데, 이번에는 이방 로마 제국에 의한 박해가 아니라 기독교화하여 국가 권력과 결탁한 카톨릭 교회에 의한 것이었다.
북아프리카에 그 수가 많았던 도나투스파는 자신들 안에 카톨릭 교회의 여러 조직 형태를 유지해 오고 있었거나, 이를 복원해 오고 있었다. 이들은 카톨릭 교회와 마찰하는 문제에 대해서 황제에게 호소할 만한 위치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곧 그러한 조치를 취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양쪽의 감독들을 함께 불러 모은 자리에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도 싸움을 그치게 하지는 못했다. 이 싸움은 7세기경 모하메드 교도들의 침략에 의해 모두 망하게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니케아 종교회의
 
교회의 첫번째 공의회는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소집되어 비두니아 지방 니케아에서 열렸다(A.D. 325년). 그 회의의 주된 의제는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던 아리우스가 가르치는 교리, 즉 하나님의 아들은 최초로 가장 위대하게 창조된 존재이긴 하지만 아버지와 동등하지 않다는 주장에 대한 것이었다.
 제국의 각 지역으로부터 이 문제를 심의하기 위해 300명이 넘는 감독들이 많은 수행원들과 함께 참석했다. 회의는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엄숙하게 개회되었다. 그들 중 많은 감독들은 박해를 참아내면서 당한 심한 고문의 상처를 몸에 지니고 있었다. 결국 회의는 아리우스의 가르침은 잘못이며 그것은 처음부터 교회의 가르침이 아니었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성자는 완전한 신성을 소유하신 분으로 본질상 성부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진리를 표명한 ‘니케아 신조’가 채택되었다.
비록 결정 자체는 옳았다 하더라도 황제와 감독들의 합작으로 결정에 이르게 된 의결 과정과, 국가 권력에 의해 그 결정이 시행되었던 과정은 카톨릭 교회가 성경으로부터 벗어났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니케아 회의 2년 후,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견해를 바꾸어 아리우스를 추방된 곳으로부터 불러들였고,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치세 때에는 모든 감독의 자리를 아리우스파 감독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제 국가는 아리우스파를 편들게 되었고, 교회는 전에 아리우스파가 국가에 의해 당했던 방식으로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한편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완숙한 인격으로 일반 민중으로부터 인기를 모았으며, 당국의 위협이나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인물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아타나시우스였다.

그는 젊은 시절 니케아 회의에 참석했고 후에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되었다. 번번이 추방되는 일은 있었으나 그는 거의 50년간을 용감히, 구세주의 참된 신성을 증거한 사람이었다. 중상모략을 당하고 심판대에 서게 되고, 사막으로 도망하거나 도시로 돌아오게 되는 모든 경우에도 자신이 믿는 진리에 대한 그의 확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리우스파는 많은 나라에서, 특히 뒤늦게 설립된 북유럽 국가들에서 국가 종교의 형태로 거의 3세기 동안을 지속됐다. 국교로서 아리우스파를 포기한 최후의 나라는 이탈리아의 롬바르드였다.
1차 총회의뿐만 아니라, 680년에 마지막 회의가 열렸던 초기의 6차 교회 회의 동안 줄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관계, 즉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문제가 광범위하게 논의되었다. 논의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신조가 만들어졌고, 자신들에 의해 확정된 진리가 다음 세대에 이어지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논의되어진 신조를 교리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정작 성경 안에서는 이러한 방법을 채택했다는 전례를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영적으로 파악된 진리는 단순히 문자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전수될 수도 없고, 오직 각자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통하여 스스로의 그것을 받아들여 얻게 되는 것이며, 일상의 갈등 속에서 그것을 고백하고 유지함으로 그 안에서 세움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정경의 확정
 
때때로 정경이 확정된 것은 초기 교회의 회의에 의한 것이므로 적어도 성경이 교회를 지도하기에 충분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초기의 전통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일곤한다. 물론 이것은 신약 성경의 경우에만 해당 될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특이한 성격과 독특한 역사를 살펴보면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고, 영감으로 씌어진 글을 선별하여, 놀라운 집념과 정확성을 갖고 그것을 보존하기에 적합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관해 말하자면, 영감으로 씌어진 책의 판단 기준은 교회 회의에 의한 확정된 것이 아니라 단지 회의에 의해 확인된 것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성령에 의해 명백히 인정되고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받아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요컨대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고 받아들여진 정경은 그 가치나 능력이 위경, 외경과는 명백한 차이가 있음이 각각을 비교한 결과 확실히 인정되어 왔던 것이다.

 

공인 기독교 세계의 종국(終國)
 
콘스탄틴의 관용의 칙령(The Edict of Toleration, 313)으로 시작된, 교회 역사의 새로운 국면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두번째 기간은 여러 면에서 교회와 국가의 연합에 대한 시도를 보여주고 있음으로 인해서 지나칠 수 없는 중요성을 갖는다. 교회는 세상과 연합함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었는가?
로마 세계는 최고의 권력과 영광을 구가하였다. 문명은 이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무시하고도 살 수 있을 만한 단계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세상의 참담함은 극도에 달해 있었다. 부자들의 사치와 악행은 끝없이 행해졌고 백성들 중 수많은 사람이 노예로 전락했다.

대중들은 모든 종류의 사악하고 잔악한 광경이 공공연하게 상연되는 원형극장 따위를 즐겨 찾아 다녔고 이것은 타락의 도를 부채질하였다. 제국의 말기에도 주위의 적들과 싸울 때는 여전히 힘이 있는 듯하였으나, 내적인 병폐는 몸 전체의 생명을 위협하였고, 로마는 거의 절망적으로 타락해갔고 사악해졌다.
순식간에 성직자들은 궁전 신하들 중 하나처럼 타락하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재물을 많이 모을 수 있는 자리나 권력을 차지하려고 서로 다투게 되었고, 불신앙적인 요소가 지배적인 회중 안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고백함으로 물질적으로 유리한 입장을 얻게 되었다.

그러한 병폐로 인해 박해받던 교회의 순수성은 세상적인 것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무력해진 병든 교회가 파멸로 치닫는 문명화된 세계를 교화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음은 명백한 것이었다.
이 즈음 임박한 심판을 알리는 불길한 구름이 모여들고 있었다. 멀리 중국으로부터 시작되어 서쪽으로 향하는 인구 이동이, 훈족의 대규모 이동을 불가피하게 하여, 그들이 볼가 강을 건너게 되자 지금의 러시아인 고트족을 압박해서 제국의 변경을 침범하게 하였다. 제국은 이때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서방제국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게르만족, 혹은 튜튼족이라 불리는 민족이 그들의 본거지로부터 물밀듯이 밀려 나왔다. 동방으로부터 온 몽고족에 쫓기기도 하고, 제국의 부와 쇠약한 상태에 끌리기도 한 고트족 - 오스트로고트와 비시고트라는 이름으로 동서로 나뉘어져 있었다 - 과 프랑크족, 반달족, 브르고뉴족, 수비족, 헤루리족 등등의 게르만 족속들이 종국을 눈앞에 둔 로마의 문명을 거칠 것 없는 파도처럼 강타했다.
1년 안에 스페인, 고올과 같은 큰 지방이 무너졌다. 오랫동안 평화스러움에만 젖어 있었고, 안락과 쾌락을 위해 대부분 도시에 몰려 있던 주민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들의 변경을 지켜주던 군인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도시들이 파괴되었고, 군사훈련을 회피하고 교양있고 사치스럽게 굴던 대중들이 이방 야만인들에 의해 살해되거나 그들의 종이 되었다. 로마도 알라릭이 이끌던 고트족에게 함락되었다(A.D. 410년). 그 거대한 도시는 야만적인 정복자들에 의해 약탈되고 황폐화되었다. 결국 A.D. 476년에 서로마 제국은 몰락하게 되었고, 그들이 오랫동안 지배해 왔던 그 넓은 지역에 새로운 왕국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은 그 후 거의 천 년 뒤인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회교국인 터키족에 의해 몰락되기까지 지속되었다.

 

어거스틴의 회심
 
이 기간에 우리가 만나게 되는 역사의 위대한 인물 중 하나는 자신의 가르침으로 후시대 전체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끼친 어거스틴(A.D. 354-430)이다. 그의 수 많은 글, 특히 ‘참회록’ 속에서 어거스틴은 친지나 친구를 대하는 것같은 인상을 줄 만큼 친밀한 문체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누미디아 태생인 그는, 거기에서 어린 시절의 환경, 생각, 그리고 받은 인상에 대해 적고 있다. 그의 성스러운 어머니 모니카가 아들을 위해 드린 기도와 아들을 향한 그녀의 소망, 죄악에 가득찬 성장 과정을 보내는 아들을 지켜보면서 느껴야 했던 절망, 밀란의 감독인 암브로우스의 현명한 충고와 그녀 자신의 회복된 기도 응답의 확신으로 결국은 아들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그녀의 믿음 등을 그림과 같이 매 페이지마다 묘사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출세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 광명을 찾으려 했으나 결국 그는 소망도 없이 죄악과 탐욕적인 삶에 매여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얼마동안 그는 마니교에서 구원을 발견한듯이 생각했으나 곧 그것이 일관성 없고 약한 종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암브로우스의 설교에 감동받았으나 아직 내적 평안을 찾지 못했다. 32세가 되어 밀란에서 수사학 교사가 되었을 즈음 그의 고통의 상태는 극에 달해 있었다.
“나는 어느 무화과 나무 밑에 주저앉아 버렸다.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저 울음보를 터트려 놓기가 무섭게 눈에선 강물같은 눈물이 콸콸 쏟아지는 것이었다. 나는 애처로운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내일, 또 내일이오니까? 지금은 왜 아니랍니까? 어찌하여 내 더러움이 지금 당장 끝나지 않나이까?’ 이런 말을 되뇌이며 내 마음은 부서져 슬피 울고 있었다.

때마침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소년인지 소녀인지 분간이 가지 않으나 연달아 노래로 되풀이되는 그 소리는 ‘집어라, 읽어라, 집어라, 읽어라.’는 것이었다. 금시 안색이 변하면서 나는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어린이들이 무슨 놀이를 하기에 저런 노래를 부르는 것인가. 그러나 그 노랫가락은 아무데서고 들어 본 기억이라곤 전혀 없는 것이었다.
나는 울음을 뚝 그치고 일어섰다. 나는 이 노랫소리를, 성경을 펴들자 마자 첫번째로 눈에 띄는 대목을 읽으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집어들고 펴고 읽자 첫 눈에 들어오는 말씀은 이러하였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롬 13:13). 더 읽을 마음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 말씀을 읽고 난 찰라, 내 마음엔 한 줄기 빛이 흘러들어왔고 순간 온갖 불신의 어두움이 사라져 버렸다.”

 

어거스틴의 그릇된 교회관
 
이러한 그의 회심은 기도 응답을 확신했던 그의 어머니 모니카에게는 놀라움이라기보다는 큰 기쁨이었다. 그녀는 일년 뒤 아들과 함께 아프리카로 돌아오던 중 평안하게 잠들었다. 어거스틴은 밀란에서 암브로우스로부터 침례를 받았고(387), 후에 북아프리카 히포 - 지금의 보나 - 의 감독이 되었다(387). 그의 분주한 삶은 끊임없는 논쟁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서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있던 시기에 살고 있었는데, 실제로 야만족의 군인들이 그가 머무르고 있던 히포 시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는 서방 제국의 몰락을 보면서 자신의 유명한 책 “하나님의 도성”을 집필했다. 그 책의 기나긴 원제목은 그의 집필 의도를 잘 말해 준다. “비록 지상 최대의 위대한 도시는 몰락될지라도 하나님의 도성은 영원하리라”. 그러나 무엇이 하나님의 도성이냐에 관한 견해에서 그는 잘못된 가르침을 낳고 말았는데, 그의 위대한 명성은 그가 빚어낸 오류와 그 해로운 결과를 더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는 오직 교회에 의해서만, 교회의 성례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큰 목소리로 천명했고 결국 이를 공식화했다. 그러나 구세주의 손에서 구원을 빼앗아 인간의 손에 맡긴다는 것, 구세주와 죄인 사이에 인간이 만든 체계를 끼어 넣는다는 것은 복음의 계시에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내게 오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어떤 사제나 교회도 그 사이에 끼어들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를 일치시키고자 하는 열망과, 다양한 교리와 다양한 모습에 대한 혐오감에 빠져 있던 어거스틴은, 거듭나는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을 하나로 묶는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의 영적인 생명력과 궁극적인 일치에 대한 시각을 상실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주의 성령과 직접적이면서도 개별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또한 다른 교회들과도 관계를 맺는 그러한 교회가 실제로 여러 장소와 여러 시대에 존재할 수 있다는 점과, 인간의 약함으로 인하여 다양한 지식 수준과 성경에 대한 상이한 이해, 그리고 관습의 차이 등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말았다.
교회도 세상에 나타날 수 있는 조직의 일부라고 보는 외형적 교회관에 사로잡혀 그는 눈에 보이는 일치를 보존시킬 수 있거나 강제로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할 외면적이며 물리적인 수단을 찾게 되었다.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서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징벌이나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가르침에 대한 깨달음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참으로 더 좋다. 그러나 가르침에 의해 더 좋은 사람이 만들어진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그 가르침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무시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실질적인 경험으로 알 수 있듯이 많은 사람들은 먼저 두려움이나 고통에 쫓겨 하나님을 섬기기 쉬운 것이고, 그 후 가르침에 의해 영향 받거나 그들이 배운 말씀을 비로소 삶 가운데 적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의해 지도 받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던 사람들도 없지 않았지만 두려움에 의해 정도를 발견한 사람들이 확실히 더 많다. 양떼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린 그리스도보다 더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는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단지 말씀으로만 부르셨지만 후에 바울을 부르기 위해 오셨을 때는 그는 소리로만 복종케 하신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그를 땅에 쓰러뜨리신 것이다.
그 분은 불신앙의 어둠에서 날뛰는 사람을 강제로 마음의 빛을 원하도록 하실 수도 있었는데, 먼저 육체적으로 눈이 멀도록 그를 치심으로 그렇게 하셨다. 그런데 왜 교회는 잃은 아들을 강권하여 되돌아 오도록 하는데 힘을 사용하지 않는가? 주님도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경건한 품성과 믿음을 갖고 있는 왕들을 통해 얻게 된 능력을 길과 산울가에서 만난 자들, 즉 이단자들과 분파주의자들을 강권하여 데려오는 도구로 사용한다고 하여도 그들은 교회가 자신들을 강제로 데려왔다고 비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로마 교황으로 하여금, 이교도였던 로마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행했던 것과 유사한 잔혹한 박해를 교회들에게 행하도록 부추기고 독려했다. 이렇게 하여 단순하고 정열적이며 온건한 기질의 소유자인 그는 성경의 원리를 떠나, 비록 선한 의도에서였긴 하지만, 광범위하고 잔인한 박해 조직에 연루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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