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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딤후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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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세속화-2

  • 관리자 (ehompy0429)
  • 2014-05-23 15: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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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이 많은 논쟁을 벌였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는 영국 제도 태생으로 5세기 초에 로마로 건너와 30세경 평신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관한 능력있는 저술가요 정직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널리 인정되었다. 어거스틴조차 그의 가장 강력한 적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제롬에 의해 출간된, 그의 가치를 손상시킬 만한 자료는 그 근거가 사실에 입각한 것이라기보다는 어거스틴과 벌인 격렬한 논쟁으로 인한 부정적인 이미지에서 나온 결과였음이 밝혀졌다.
로마에서 펠라기우스는 자신의 가르침을 가장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케레스티누스를 만났다.

펠라기우스는 개혁자였다. 신앙을 고백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방종한 삶과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현실을 그는 심히 슬퍼했고 결국 그는 실질적인 칭의와 성화를 전하는 열렬한 설교자가 되었다.
이러한 진리의 한 면에 너무 배타적으로 기운 나머지 그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지나치게 축소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는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으며 그것은 단지 본보기일 뿐이고 비록 죄를 짓지 않았다 해도 아담은 죽을 수밖에 없었으며, 원죄란 없고 모든 사람의 행위는 자신의 선택에 의해 좌우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누구나 완전히 의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어린이는 죄가 없는 상태로 태어난다고 말했다. 여기서 그의 가르침은 카톨릭 교회의 입장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는 유아세례를 가르치긴 하였으나 그것이 중생의 수단이라는 논리는 거부했다. 그것은 단지 어린이를 은총의 상태로, 하나님의 나라로, 구원과 생명, 죄씻음과 그리스도와 연합함을 향하여 한 걸음 접근케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가르침에 반대하는 어거스틴은 회중 앞에서 150년 전 키프리안이 쓴 글 중, 어린이들은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 세례를 받는다는 부분을 발췌해 읽고 펠라기우스에게 교회의 교리와 관례로부터 철저히 벗어난 잘못된 가르침을 삼가할 것을 권했다.
펠라기우스는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하는 기도문을 사용하려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우리는 죄를 지을 필요가 없는 까닭에 이 기도문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와 선택인 것이며, 그러한 기도는 단지 비실제적인 겸손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펠라기우스와 케레스티누스가 주창한 교리로 말미암은 논란은 더욱 확산되었고, 어거스틴은 많은 시간과 정력을 들여 이 주제에 관한 수많은 글을 썼다. 결국 회의가 소집되었다.
동방에서 온 자들은 펠라기우스를 무죄라 하였고 서방에서 온 자들은 그를 정죄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 사이의 관계에 관해 동방에서보다 더 제한적이고 교리적인 진술을 받아들이도록 한 라틴 교회 내의 어거스틴의 영향에 기인한 결과였다.
회의는 로마 교황 인노센트에게 심판을 의뢰하게 되었고 교황은 자신의 권위를 강조할 기회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는 펠라기우스와 그를 따르는 자들을 모두 파문시켰는데 그의 후임자인 교황 조시무스는 그들은 다시 복위시켰다.
그러자 서방 감독들은 카르타고에서 다시 회합을 갖고 국가 권력의 지원을 이용하여 펠라기우스와 그를 따르는 자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재산을 압류하였다. 이를 보고 조시무스 교황은 자신의 견해를 바꾸어 다시 펠라기우스를 정죄하였다.
18명의 이탈리아 감독들은 이러한 제국의 결정에 복종하기를 거부했는데 그들 중 한 사람이 에크라눔의 감독 줄리안이었다. 비범한 능력과 절제된 생활의 모범으로 말한다면 어거스틴과 견줄만한 존경받는 감독이었던 그는 힘의 사용과 교황의 변심이 교리적인 문제를 다루는 데 정당한 무기가 되지 못함을 지적하였다.
펠라기우스의 가르침 속에는 진실하고 유익한 교훈들이 많기도 했지만 펠라기우스주의의 이색적인 교리는 성경 뿐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도 엄격히 위배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과 죄의 종된 상태를 스스로 알고 있으며 삶 자체가 그것을 확증해 주고 있다.
우리가 첫번째 사람인 아담의 생명과 본성을 공유함으로써 그의 죄를 지고 그의 죽음에 복종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모든 인간이 자신의 선택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과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두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과 실제적인 관계를 맺는 데 중대한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위해한 교리의 발전
 

교회 역사에서 처음 3세기까지는 어떤 세상적인 권력도 교회를 파멸시킬 수 없음을 증거하고 있다.
교회는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교회가 겪은 고난을 목격한 자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를 박해한 자조차도 개종하게 되었고 교회는 파멸되리라는 예상을 뒤엎고 더 급속히 성장해 갔다.
그런데 뒤이은 약 200년간의 기간은 심지어 막강한 제국의 권력이 교회의 손에 있었을 때조차도 교회와 국가의 연합을 통해서는 국가를 파멸로부터 구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교회가 “세상 밖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분리되어졌다는 자신의 이름에 걸맞는 위치를 포기함으로써 주님께 복종하여 얻게 되는 힘을 오히려 자신에게 치명적인 손해를 끼칠 세상적인 권력과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외부로부터 오는 박해와 세상 권력의 유혹에 굴복했을 뿐 아니라 그릇된 교리의 공격에도 굴복했다. 3세기에서 5세기에 이르기까지 네 가지 형태의 위해한 교리가 발전하였는데 그 교리들은 대단히 중대한 측면을 담고 있어 끊임없이 교회와 세상에 영향을 끼쳤다.
 

마니교
 

마니교는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시라는 성경의 가르침과 자연의 증거를 한결같이 공격했다. 성경의 맨 처음 말씀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 1:27)라는 말씀 안에서 성경은 인간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 최고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그런데 마니교는 눈에 보이는 육체적인 것은 모두 어둡고 사악한 힘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일축했고 오직 영적인 것만이 진실한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주장함으로써 본질적이고도 불가분리적 요소인 창조, 타락,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계시의 근본을 뒤흔들어 놓았다.
한편으로는 육체에 대한 그릇된 견해로부터 육체를 단지 악한 것으로 간주하는 과도한 금욕주의를 낳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육체를 단지 동물적인 것으로만 인식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육체는 본래 하나님이 지으신 것으로 그 안에는 그분의 아들의 형상을 닮는 데까지 이르게 하는 구속과 회복의 무한한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함으로써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의식과 교리를 낳은 것이다.
 

아리안주의
 

모든 성경이 궁극적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인간으로 오셔서 희생적인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세상의 죄를 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라는 가장 영광스러운 계시이다.
그런데 아리안주의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고 그를 최초의 가장 위대한 사람이긴 하나 그 역시 하나의 창조된 존재에 불과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동떨어진 존재로 남겨두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구세주이신 하나님으로 아는 지식도 막았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인격을 개발함으로써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보다 좀 더 나은 세계로 이를 수 있다는 애매한 기대에 머물도록 유도했다.
 

펠라기우스주의
 

펠라기우스주의는 모든 인간이 아담의 범죄에 연결되어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거부했다.
아담의 죄는 단지 자기 자신과 자신이 하나님과 갖는 관계에만 영향을 미칠 뿐이며, 세상에 태어난 각자는 근본적으로 죄가 없는 존재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약화시키고 인간 본질에 대한 진실한 이해에 이르는 것을 막으며 적어도 부분적으로 자기 자신 안에서 구원의 길을 찾도록 유도했다.
모름지기 우리 자신이 아담의 타락의 영향하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효력을 입을 수 있다는 성경의 증거가 설명될 수 없는 법이다. 그리고 인간의 편에 개인적인 책임이나 자유의지가 부여된 것도 사실이지만 이는 하나님의 주권이라 보편적 구원에 대한 가르침과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모두가 동일한 죄의 선고를 받았으나 동시에 모두가 동일한 구원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성직제도
 

성직제도는 구원을 오직 교회 안에서만, 그리고 사제에 의해 수행되는 성례의 수단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물론 이 당시의 교회는 카톨릭 교회를 의미했으나 성직자들은 이 교리를 자기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적용했다.
이는 지금도 다소간 많은 다른 조직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주님과 사도들에 의해 명백히 그리고 계속해서 가르쳐진 유일한 진리는 죄인의 구원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속죄양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오직 자기네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거나 내어 쫓을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다고 하는 사람들과 구원에 필수적인 수단이라고 제시되는 성례나 형식들은 인간에게 말할 수 없는 압제를 가져올 뿐이며,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믿는 믿음으로 모든 인류에게 열어 높은 구원의 길을 또다시 닫는 요소들인 것이다.
 

수도원 제도의 기원 및 발전
 

신약성경이 제시한 모범으로부터 이탈하는 현상, 세상적인 요소가 침투하는 현상, 인간이 만든 조직에 굴복하는 현상, 죄에 대해 관용하는 현상 등의 교회의 영적인 퇴락의 현상은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운동을 조장했고, 몬타누스파나 도나투스파에서 보았던 것처럼 개혁된 교회를 설립하려는 노력을 유발시켰다.
한편 거룩함과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추구하던 일단의 모임들은 사람들과의 모든 교제를 끊고 자신을 지키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야만인들에 의해 초토화된 나라의 형편과 세상과 결탁하여 하나님의 올바른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난 교회의 상황으로 인하여 그들은 일상의 삶 가운데서는 도저히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고 기존 교회 안에서는 신자들과 교제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일상적 삶의 미혹과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광야로 물러나온 자처럼 살았고 명상으로 자신들의 영혼이 바라는 하나님에 대한 통찰력과 지식을 얻으려 하였다. 그들은 물질은 악하다는 당시의 유행하는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육체로 인해 영적인 삶을 저해하는 요소들을 극복하기 위해 극도의 검소한 생활과 금욕적 수양을 택했다.
4세기 경에 고독한 삶으로 유명한 은자 안토니가 이집트에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신앙을 닮아 가려고 노력하였으며 그의 삶의 방식을 본받기 위해 그가 있는 가까이에 머물렀고, 그에게 자신들이 따를 규칙을 제정해 달라고 청하게 되었다.
은자의 숫자가 늘어나게 되자 그 중 어떤 이들은 자기의 몸을 가혹하게 다루기도 했는데, 시므온 스타일리티는 몇 년 동안이나 기둥 꼭대기에서 고행한 일로 유명하다.
이러한 경향은 이후 급진전된 양상을 띠었는데, 곧 파코미우스는 4세기 초 남부 이집트에서 세상으로부터 물러난 사람들이 더 이상 홀로가 아닌 단체로 모여 살아가는 수도원을 건립했다. 이러한 단체들은 동 서방 교회 모든 지역으로 퍼지면서 사람들의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6세기가 시작될 무렵 누르시아의 베네딕트는 이탈리아의 이러한 운동에 큰 자극을 주었는데, 그가 작성한 수도자들을 위한 생활수칙은 다른 모든 것들보다 널리 퍼졌다.
그는 수도승들에게 개인적인 내핍생활에 대해서는 그렇게 엄격한 요구를 하지 않은 반면에, 그들의 활동을 농사짓는 데 집중케 하면서 종교적인 의식을 행하고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데 특별한 관심을 쏟도록 했다.
베네딕트회 수도원은 7, 8세기 동안 그리스도교를 튜튼족 국가에 전파한 중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이오나 섬을 경유하여 스코틀랜드를 지나 아일랜드로부터 온 콜룸방 수도원과 정착자들도 역시 헌신적인 선교사들을 준비시켜 북부와 중부 유럽에 보냈다.
점점 로마 교황들이 교회를 장악하고 세속적 권력을 얻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싸움을 하면 할수록 수도원 조직은 영적인 순수함과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를 추구하던 많은 사람들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수도원은 신약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교회와 여러 면으로 달랐다.

그래서 세속화된 로마 교회로부터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진실한 교회가 줄 수 있는 어떤 것을 수도원 안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체험하기보다는 조직의 규칙에 매여 있었던 것이었다.
연이어 일어난 여러 종류의 수도회는 일련의 동일한 발전 단계를 거쳤다. 그들은 가난과 가혹한 자기부정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부와 권력을 축적하였고 극기와 단련에 게을리하면서 자기 탐닉과 세상적인 것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면 이러한 현상에 대한 반발로 또 다른 이들이 철저한 자기 겸손을 갖춘 새로운 모임을 일으키지만 그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경로를 그대로 밟아 나갔다.
그러한 개혁자 가운데 10세기 초의 크루니의 버나드와 11세기의 시톡스의 하딩이 있었다. 버나드가, 그리고 후에는 클라이복스의 애보트가 자기들의 생애의 전반부를 보냈던 곳은 시톡스에 있느 시스터시안 소도원이었다.

그는 왕이나 교황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으나 그에 대한 지속적이고도 즐거운 기억을 가능케 하는 것은 그가 남긴 감동적인 찬송가였다.
많은 여자들도 역시 세상을 떠나 피할 곳을 당시 생겨난 수도원 안에서 찾았다. 남녀 모두를 위한 이와 같은 종교적인 장소는 어둡고 혼란스러운 시대에 연약한 자들을 위한 도피성이었고 야만적인 현상이 판치는 때에 학문이 보존되고 성경이 필사되고 번역되고 읽혀지는 곳이었다.

그러나 또한 그곳은 나태와 억압의 온상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는데 그런 종교적인 모임들은 일단 카톨릭 교황의 손아귀 안에 들어가자 하나님의 교회를 원래의 성경적인 형태로 회복시키고자 애썼던 모든 이들을 박해하는 열렬한 도구가 되었다.
신약성경에 입각한 교회는 본래 모습과는 전혀 상이한 조직으로 점점 변하게 되었는데 그 둘의 관계를 도저히 연관지을 수 없는 모습으로까지 전락해 버렸다.
그리하여 마치 교회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지경까지 타락한 것으로 보였다. 감독제도와 성직제도에 의해 교회의 분열과 이단으로부터 오는 변질을 막아보려던 노력은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암적 요소들을 초래하게 되었다. 박해받던 교회가 채택한 “국가와의 연합”이라는 이름의 돌파구는 결국 좌절로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수도원 제도는 그 자체가 세속화됨으로 말미암아 교회를 대신하여 세상에 물들지 않은 참 안식을 제공할 수 없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러한 암혹한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을 돌이키고 거룩한 진리 가운데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성령님의 능력이 언제나 성경 말씀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 역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성경을 신앙과 교리의 지침으로 그리고 개인의 행위와 교회 조긱의 모형으로 주장했던 회중들과 진실한 교회의 출현이 그친 적은 결코 없었던 것이다. 비록 감추어지거나 멸시를 받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언제나 생명력 있는 영향을 미치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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