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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전쟁은 세계정부작품(제수이트전쟁

  • 관리자 (ehompy0429)
  • 2014-05-23 15: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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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배후 짐마르스

 

 

전쟁의 양측을 비밀 결사가 조종한다는 사실이 1950년대 초 한국에서보다 더 분명해진 곳은 없다. 페르시아 만 및 베트남에서와 같이, 거의 34,000명의 미국인의 목숨을 앗아간 이 투쟁은 전쟁이 아니라 “경찰 행위”라는 공식적 의미가 부여되었다.

한국의 전쟁은 그 통제력이 미국과 소련 양측에 미치는 사람들에 의한 신중한 계획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주는 많은 문서들이 존재한다.

이 전쟁은 제이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국제연합이 설립되면서 시작됐다. “국제연합”이라는 명칭은 제이차세계대전 중 독일, 이탈리아, 일본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은 나라들을 언급하면서 미국 국민의 정신에 각인되었다.

국제연합의 조직은 우드로우 윌슨(Woodrow Wilson)과 밀너-로데스(Milner-Rhodes) 비밀 결사의 성원들에 의해 선동된 태동하는 세계 정부에 대한 실패한 시도인, 그 이전의 국제연맹의 단순한 파생물에 불과했다. 국제연합이라는 개념은 1944년 8월 21일부터 10월 7일까지 미국, 소련, 영국 및 장개석의 중국이 워싱턴 D.C. 부근의 덤바톤 오크스(Dumbarton Oaks) 별장에 모였을 때인 제이차세계대전의 혼란 중에 부활했다.

국제연합을 설립하기 위한 이와 같은 조처 및 이어진 행위들의 주된 발의자는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로서, 외교위원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의 설립을 도운 사람이다. 1917년의 베르사유 강화회의 참석자인 덜레스(Dulles)는 베트남 전쟁을 위한 법적 그거를 제공한 동남아시아조약기구(Sou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도 창설했다.

국제연합 운영의 또 다른 세부 사항은 1945년 2월의 추축의 얄타회의 중에 입안되었다. 38선을 따라 한국을 분할하는데 합의하고 소련과 중국이 북한을 통제하도록 한 것은 얄타의 비밀 의정서를 통해서다.

그와 같은 조처는 1년 전에 구상되었었다. 1944년 4월에 외교 업무(Foreign Affairs)의 기사는 “한국의 신탁통치를 요구했는데, 특정 국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열강 집단, 말하자면, 미국, 영국, 중국 및 러시아에 의한 신탁통치를 요구했다.” 외교위원회 지도층은 전쟁에 동의하지 않았을 미국 국민이 그와 같은 “신탁통치”의 도전으로 개입을 위한 근거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을 개달았다.

1944년의 외교위원회 내부 비망록은 “주권 물신” 및 “의회만이 전쟁을 포고할 수 있다는 헌법 조항으로부터 야기되는 난관”에 대해 하나의 조약이 이 장벽을 극복할 것이며, (하나의) 국제 안보 기구에 의해 권고될 수 있는 그와 같은 경찰 행위에 대한 우리의 참여가 반드시 전쟁으로 해석될 필요는 없다는 주장과 맞서게 될 것이라고 언급한다.

펄로프(Perloff)는 “(외교위원회 성원들에 의해 주도된) 미국의 협상과 무기 대여 화물이 소련을 태평양 무대로 불러내지 않았다면, 북한에 공산 정권이 수립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며, 한국 전쟁도 결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국제연합의 공식적 구성은 얄타 회담이 있은 지 두 달 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국제기구에 관한 국제연합회의에서 시작됐다. 채택된 헌장은 6월에 서명되어 제이차세계대전이 끝난 지 겨우 약 두 달이 지난 1945년 10월 24일에 발효되었다. 국제연합은 “본질적으로 외교위원회에 의해 창시되었다”고 랄프 에퍼슨(Ralph Epperson)은 기술했다. “샌프란시스코의 국제연합회의의 미국 대표단에는 47명의 성원들이 있었다.”

그들의 “선임 고문”은 존 포스터 덜레스였다. “그의 가공할만한 업적에 의해 담대해 진 덜레스(Dulles)는 1953년 1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해 그가 국무장관으로 임명된 것을 평소 대통령의 영역으로 간주되던 외교 정책을 입안하는 권한이 자신에게 위임된 것으로 봤다.”라고 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언급한다.

국제연합의 창설 배후에 덜레스(Dulles) 및 다른 외교위원회 성원들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조직이 오늘날 (보통 세계은행이라고 부르는) 국제부흥개발은행(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과 국제통회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을 감독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국제연합도 국제노동기구(ILO), 식량농업기구(FAO), 국제보건기구(WHO), 국제연합교육과학문회기구(UNESCO), 및 국제연합아동기금(UNICEF)을 포함한 다수의 사회적 단체들을 수용하고 있다.

1947년에, 재통일을 위한 협상이 결렬된 다음에 한국 문제는 국제연합에 넘어갔다. 1949년경에 미국과 소련 모두 한반도에서 전시 주둔군을 대규모적으로 철수시켰다. 미국은 철수 후에 최신의 러시아제 탱크, 비행기 및 대포로 무장한 150,000명 이상의 북한의 공산군과 대치하도록 대부분 소형 무기로 무장을 한 단지 16,000명만을 남한에 남겨두었다. 상황을 평가하도록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보냄을 받은 알버트 위데마이어(Albert C. Wedemeyer) 장군이 공산주의자들은 남한에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고 보고했을 때, 트루먼 대통령은 그의 보고를 무시하고 국민에게 비밀로 했다.

1950년 1월에 북한의 주석인 김일성이 “통일의 해”를 선포하고 군대를 38선에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미래의 페르시아 만 전쟁처럼, 외교위원회로 가득 찬 미국의 국무성은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트루먼의 국무장관인 외교위원회 성원 딘 애치슨(Dean Acheson)은 한국은 미국의 방어선 밖에 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 선언은 김에게 분명한 신호를 보냈으며, 그리하여 그는 소련의 원조 하에 그 해 6월에 남한을 침공했다.”고 Perloff는 기술한다.

미국의 지도자들은 6월 25일의 북한의 공격에 대해 짐짓 놀라움과 분노를 표현했으며, 당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및 국민당의 중국으로 구성된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소련이 불참하고 반공산주의자인 장개석 측만을 대표한 중국이 참여한 그 회의는 한국에 대한 국제연합의 개입을 표결했다. 이 표결은 러시아의 거부권에 의해 저지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 음모론 작가들에 의해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소련의 대표자들은 공산 중국이 국제연합의 승인을 받지 못한 것에 항의해서 퇴장해버렸다. 국제연합의 투쟁 지원을 위한 이 표결 후에 곧 소련의 대표자들이 다시 입장했는데, 중화인민공화국이 여전히 승인을 받지 못했는데도 그러했다.

6월 27일에 국제연합의 재가로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 군대에게 남한을 방어하는 국제연합의 “경찰 작전”을 지원하도록 명령했다. 7월과 8월을 통해 수적으로 열세하고 화력도 열세인 남한의 군대는 트루먼이 보낸 군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네 개의 미군 사단들과 함께 한반도의 끝부분까지 밀렸다. 상황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이 한반도의 중부에 있는 인천항에 대한 천재적이고 과감한 공격에 착수하여 북한의 전선을 돌파하여 보급로를 차단할 때까지는 나빠 보였다.

처참하게 분쇄된 북한은 90%가 미국인인 국제연합군이 뒤에 바짝 따라오는 가운데 후퇴를 하였다. 싸움이 38선을 넘어가자 중국의 모택동은 국제연합군이 중국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압록강(Yalu River)에 다가오는 것은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맥아더는 국무부에 중국 군대가 압록강 북쪽에 집결하고 있다고 경고했지만, 그의 경고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 11월 25일에 거의 20만 명이나 되는 중국의 “의용병”이 압록강을 넘어 방심하고 있던 국제연합군을 강타했다. 50만 명이 12월에 더 들어왔다.

미국과 동맹국들은 또다시 뒤로 밀렸으나 가까스로 재편성될 수 있었으며 후에 다시 38선으로 반격했다. 전쟁은 38선을 두고 밀고 밀리는 양상이 되어 갔다.

베트남에서처럼, 미군은 한국전을 온전하게 수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정책적 결정에 의해 무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와는 달리, 상당한 지위에 있던 한 군사 지도자는 이와 같은 제한에 방해를 받자 미국 국민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제이차세계대전의 영웅 맥아더 장군은 공군에게 압록강 다리를 폭파하도록 명령하여 중국의 보급과 통신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그는 동정적인 의원들에게 그의 군사 작전을 지지하고 대만의 국민당 중국이 한국에 대한 압력을 완화하기 위한 제2전선을 중국에 대해 시작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호소했다.

공식적 반응은 맥아더에게 신속히 왔다. 맥아더의 폭격 명령은 마셜 (George Marshall)장군(제이차세계대전 후의 유럽 재건을 위한 마셜 계획의 아버지이며 국방부장관으로 근무하도록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전역을 요청받은 외교위원회 성원)에 의해 취소되었다. 이 마셜은 육군 참모장으로서 진주만 공격에 대한 사전 통지를 받은 것으로 보도된 마셜과 동일 인물이다.

맥아더는 중국의 핵심 보급 기지를 폭격하지 말고 도망가는 적기를 추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중국의 사령관이었던 린 피아오(Lin Piao) 장군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만약 미국 정부가 나의 보급 및 통신선에 대해 적절한 보복 수단을 강구하는 맥아더를 제지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확신하지 못했다면, 나는 결코 공격을 하여 나의 군인들과 군대의 명성을 위태롭게 하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맥아더의 국민에 대한 호소는 1951년 4월 10일 트루먼 대통령에 의한 그의 면직을 초래했다. 그는 나중에 외교위원회 성원이 된 매튜 리지웨이(Matthew B. Ridgeway)로 교체되었다.

맥아더의 대만에 의한 양동 공격 계획은 실현될 수 없었다. 이 계획은 북한의 공격이 있은 지 단지 2일 후에 트루먼으로부터 명령이 내려와 좌절되었다. 정부 문서에 의하면, 트루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제7함대에게 포모사(Formosa, 지금의 대만)에 대한 모든 공격을 막으라고 명령했다. 이 작전의 필연적인 결과로 나는 포모사에 있는 중국 정부에 본토에 대한 모든 공중 및 해상 작전을 중단하도록 요청하고 있었다. 제7함대는 이와 같은 작전 중단을 감시할 것이다.” 마셜 장군은 또한 한국의 미군을 돕기 위해 국민당 군대를 보내겠다는 장개석의 제의를 거절했다.

군대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이와 같은 이해할 수 없는 명령들에 더해서, 놀라운 사실은 러시아의 사령관들이 전투를 양편에서 지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얄타 협정으로 그리고 북한에 군사 무기 및 기술을 그들이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 군대 장교들은 전쟁을 주로 관리하고 있었다. 작가인 에퍼슨(Epperson)은 국방부 언론 홍보 자료를 인용하는데, 그 자료는 38선을 넘는 작전을 담당한 두 소련 장교를 밝히고 있으며, 그 중 한 사람은 바실레브(Vasilev) 장군으로서 실제 1951년 6월 25일의 공격 명령을 한 것이 도청되었다.

바실레브(Vasilev) 장군의 명령 경로는 한국으로부터 모스크바까지 국제연합의 정치안전보장이사회 사무국 사무부총장에게까지 미쳤다. 같은 시기의 맥아더 장군의 명령 경로는 트루먼 대통령을 통해 당시 러시아 사람인 콘스탄틴 진첸코(Constantine Zinchenko)가 차지하고 있던 정치안전보장이사회 사무국 사무부총장에게까지 갔다. 이 사실은 소련 장교들이 북한의 전략을 감독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연합군의 전쟁 노력을 조정했던 동일한 국제연합의 사무국에 있던 동료 소련 장교에게 보고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공산주의자들이 전쟁의 양편을 모두 지휘하고 있었다.”고 작가인 그리핀(Griffin)은 기록했다. 과거의 음모론 작가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공산 러시아가 미국의 현대 비밀 결사들의 내부 집단을 통해 처음부터 자금을 지원하고 조정을 했다는 증거였다.

전쟁은 마침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장군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6개월 후인 1953년 7월 27일에 서명을 한 휴전으로 막을 내린 막다른 골목에서 해결됐다.

군사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이 승리를 얻지 못한 것을 언급하면서 맥아더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는 전에 한 번도 군사적 목표 없이, 작전을 억제하는 제한 이외에는 정책이라곤 없이, 혹은 심지어 공식적으로 전쟁 상태라는 것도 인정함이 없이 적대 세력과 치명적인 전투에 종사한 적이 없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떠나지 않고 계속되는 선례를 미국에 남겨놓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외관상의 무의미한 투쟁에 숨겨진 목적이, 비밀 결사들의 고위층에까지 추적되는 목적이 있었는가? 1952년의 외교 업무의 기사는 설명한다. “내가 살펴 본 한국에서의 우리의 경험의 의미는 집단 안보의 실행 가능한 시스템의 확립을 향한 역사적 진보를 우리가 이루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그랬던 것처럼 통일된 군사 명령에 의해 뒷받침되는 한 세계 정부라는 외교위원회의 목표를 실현하는데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외교위원회 성원인 딘 애치슨(Dean Acheson)은 후에 이처럼 인정했다. “내가 대통령에게 한국에서 싸워야 한다고 말한 유일한 이유는 NATO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NATO와 국제연합은 둘 다 이십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인 제이차세계대전에서 초래되었으며 부지런한 연구생들은 비밀 결사들의 명백한 흔적을 또다시 발견한다.

 

 

6.25 전쟁은 공산주의자 김일성이 소련의 배경으로 남침할 것을 알면서도 ‘애치슨’ 선언을 발표하여 남침을 유도한 후 UN 등“국제경찰” 활동의 실험전쟁으로 활용했다는 자료이다. 세계정부 배후에는 바티칸 제수이트가 있다. 이제 제 2차 6.25가 올 것이다. 역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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