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딤후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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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의 메시아 예언

  • 관리자 (ehompy0429)
  • 2014-05-23 14: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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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이레

다니엘서 9:24-27
 

이 부분은 구약 전체를 통하여서 가장 어렵고 가장 중요한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몬트고메리는 "70이레의 해석사(解釋史)는 구약의 음울한 늪지"라고 말했다. 다니엘서 9장에 관한 상이한 해석을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다니엘서 9:24-27에 관한 여러 해석들

1. 전통적 메시아적인 해석

어거스틴은 이 견해가 본질적인 견해라고 진술했으며, 헹스켄버그는 그의 "구약의 기독론"이라는 책에서 이 견해를 가장 충분하게 해설하였다. 퓨지와 윌슨도 또한 이 견해를 주장한다, 최근에 와서 에드워드 영 박사는 이 견해의 가장 유능한 대표자가 되었다. 이 학파에서는 이 부분의 예언이 육신을 입고 오시는 그리스도의 초림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며, 초림의 중심점은 그의 죽음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주후 70년에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멸망된 사건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2. 비판적인 자유주의 해석

이 견해는 다니엘서 9:24-27말씀이 주로 안티어커스 에피파네스를 가리킨다고 한다. 몬트고레리, 로리, 포르티어스(Norman Porteous), 히튼 등의 주석가들이 이 학파에 속한다, 물론 이 학파에 속하는 학자들 사이에 해석상 서로 다른 점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 부분 말씀이 메시아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로 일치한다.

 

이 해석은 다니엘서 9:24-27이 미래를 알리는 예언이 아니라는 가정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들은 역사적 배경을 고찰해 볼 때 다니엘서가 아마도 6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추측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상 다니엘서는 주전 3세기에 기록되었다. 히튼은 그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대단히 명백하게 진술했다. 즉 히튼은 다니엘이 대단한 확신을 가지고 매우 상세하게 미래를 예언하는 의자(意匠)에서 실패했다고 해석한다. 다니엘의 예언은 그가 다니엘서를 기록하던 동안인 마지막 "이레의 절반에 관한 일 외에는 과거 역사다."라고 했다(p.210).

예를 들면 히튼은 이 부분의 예언을 다음과 같이 분해하여 이 이론을 완성시켰다.

1. 7이레는 예루살렘 멸망(BC 586)부터 49년 후에 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정복하고 추방당한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린 주전 583년까지라고 한다.

2. 둘째 기간인 62이레는 주전 583년부터 대제사장 오니아 3세가 죽은 해인 주전 171년까지이다.

3. 셋째 기간인 마지막 한 이레는 안티어커스 에피파네스에 대한 언급이라고 한다.

몬트고메리도 70이레가 시작되는 적절한 연대를 주전 586년으로 보고 있다. 그는 대부분의 비평가들과 같이 이 기간의 끝에 해당하는 기름부음 받은 자, 곧 왕은 여호수아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여호수아는 포로귀한 후에 첫 대제사장이었고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지도를 받은 사람이다.(학 1:1, 슥 3:1, 스 3:2)

마지막 한 이레 (제 70번째 이레)에 관한 그의 해석은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의 전제정치 기간이라고 해석하는 학파에 속한 모든 학자들의 견해와 일치한다.

여기에서 이 기간의 역사에 관하여, 특히 안티어커스 에피파네스에 관하여 살펴보는 것이 유용하리라고 본다. 다니엘서 8:5에 수 염소의 큰 뿔로 비유된 헬라는 알렉산더 대제의 지도하에서 강대한 나라가 되었다. 알렉산더 왕은 세계적인 제국과 세계적인 문화를 이룩했다. 그러나 주전 323년에 그가 죽자 제국은 넷으로 갈라졌다.

 

주전 198년에 팔레스틴은 알렉산더를 계승한 한 왕조의 손에 들어갔다. 팔레스틴을 정복한 시리아는 유대인의 역사상에 신 기원을 이룩햇다. 유대인의 이전 정복자는 관대했었다. 그러나 새로운 정복자들과 셀류시드는 유대인들이 헬레니즘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물론 유대인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특별히 안티어커스 아피파네스 통치 하에서 고통을 받았다.

유대인들을 헬라화 시키려는 노력은 안티어커스 아피파네스가 왕위에 올랐을 때에도 계속되었다. 대제사장 오니야 3세의 동생인 여호수아의 지도하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안티어커스의 헬라화 정책을 기꺼이 채용했다. 마침내 여호수아(나중에는 그를 야손이라고 불렀다)는 안티어커스에게 많은 뇌물을 바치기로 약속하고 대제사장으로 임명받는데 성공했다.

3년 후에 또 하나의 헬라파 유대인 메넬라우스(Meneoaus)가 동일한 방법으로 대제사장이 되었다. 메넬라우스는 성전의 기구를 도적질하였기 때문에 폐위된 대제사장 오니야 3세에게 꾸지람을 들었으며 이 일 때문에 오니야 3세는 헬라파 도당들에게 피살되었다.

비평학자들은 오니야 3세의 죽음을 가르켜서 다니엘 9"26에 있는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62이레 끝에 끊어질 자" 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다니엘 9:25에 있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마침내 여호수아와 메넬라우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의 가장 혹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안티오커스는 유대주의를 완전히 멸절 시키기로 작정하고 조직적으로 폭력을 사용하여 유대민족을 헬라화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는 유대인들이 반드시 헬라신들을 숭배하도록 하였고 이 명령을 준행케 하기 위하여 아테네의 노련한 철학자를 보내어 감독하게 하였다.

그는 쥬피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하고 성전의 제단에 수염이 달린 이교의 신상을 세웠는데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이것을 "멸망할 가증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이유로 자유주의 학파에 속한 많은 비평학자들은 이 기간을 다니엘서 9장에 있는 마지막 한 이레라고 한다.

그 때에 헬라 군인들은 성전에서 음탕한 이교 의식을 거행하였고 제단에서 돼지를 제물로 바쳤으며 이방 주신(酒神)을 예배하기 위하여 광무의 의식을 강요했다. 유대인들은 죽음의 고통 아래서 할례의 시행, 안식일 준수, 유
 

대인의 축제 등을 금지 당했고 히브리 성경의 사본도 파괴당했다, 유대인들을 헬라화하기 위하여 공포된 이러한 법들은 극도로 잔인하였다.

늙은 서기관 엘리에서(Eleazer)는 돼지고기를 안 먹는다고 채찍질하여 죽였고 한 어머니와 그의 일곱 아들은 우상에서 절하지 않는다고 총독의 입석하에서 한 명씩 찔려 죽였다. 두 어머니는 갓난 아이에게 할례를 주었다는 이유로 벼랑에서 거꾸로 떨어뜨림을 당했다, 안티어커스 에피파네스의 통치시대는 이렇게 유대인의 신앙을 계획적으로 파괴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을 학대한 시대였다.

자유주의 학자들은 이 시대가 단 9"24-27의 시대와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석가들 가운데 대다수는 이 말씀을 주전 2세기에 안티어커스 이피파네스의 압제하에 살았던 이름 모를 유대인이 기록하면서 제 6세기의 경건한 유대인인 다니엘의 이름을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책은 제 6세기의 역사적인 옷을 입고 있었으나 저작자의 목적은 제 5세기가 아니라 주전 2세기의 유대인들의 신앙을 강화하는데 있었다고 한다. 저자는 실제적으로 이미 지나간 역사를 가지고 예언자의 옷을 입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 학설에 대하여 분명하게 많이 반대해 왔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니엘서가 진실한 역사의 기록을 목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한다. 본서는 본서 자체가 사람들과 국가들의 장래행복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인 것을 주장한다. 만일 마카비 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이 유대인들의 신앙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제 6세기에 살고 있었던 다니엘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사용하여 이 책을 기록하였다면 우리가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간에 이 책은 위작이다. 만일 이름 모를 사람이 다니엘의 이름으로 이 책을 기록했다면 이 저작자는 사기꾼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니엘서를 미혹하는 책이라고 생각할 수 없으며 지금도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3. 기독교회의 해석

많은 보수주의 학자들이 취하는 또 다른 일반적인 해석을 기독교회의 해석이라고 부른다. 이 해석을 가장 잘 설명하는 사람은 독일의 푸터파 학자인 클리포드이다, 오늘날에 와서 카일과 푸폴드의 주석들이 그의 해석을 따르고 있다.

그는 "미래"라는 말을 연수(年數)를 지시하는 주간(週間)으로 생각하지 않고 상징적인 숫자로 생각한다. 그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70년 포로생활을 끝낸

후에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구원을 성취하실 불확정한 길이의 기간이 온다는 것이다, 이 기간은 현세(現世)가 존속할 동안이다, 이 기간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 이 처음 기간인 일곱의 일곱들은 고레스의 칙령(B.C. 588)에서 시작하여 기름부음을 받은자요 왕이신 그리스도의 출현에 이르기까지요,

2. 여기에 뒤따라 오는 시기가 62의 일곱들이다, 이 시기는 중건과 귀환의 시기일 것이다.

클리포드는 이 시기를 복음전파와 죄인이 회개하는 시기라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기독 교회시대이며 기름부음 받은 자가 끊어질 때까지 계속하는 시대이다, 즉 이 시대는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가 그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세상에서 그 이상 능력과 영향을 미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메시아의 지위를 가진 왕이 나타날 것이며 이 사악한 왕의 백성이 하나님의 성전과 하나님의 도시를 파괴할 것이고 전쟁을 일으킬 것이며 황폐함으로 끝날 것이다.

3. 마지막 한 일곱들은 이 사악한 왕의 통치시대 곧 적 그리스도의 통치시대이다, 그 끝에 세계의 종말이 임하다는 것이다. 클리포드는 다니엘 9:24-27이 다니엘서 2장과 7장과 동일하다고 한다. 오늘날에 와서는 카일과 푸폴드가 근본적으로 이와 동일한 입장을 취한다.

4. 세대주의 해석

세대주의 해석은 다니엘서의 예언을 해석함으로 오늘날 널리 보급되었다. 이 학파를 때때로 "세대주의 " 혹은 "괄호시대 해석"(The Parenthersis Interpretation)이라고 부른다. 이 학설을 역사적 전 천년기설과 혼동하면 안된다. 이 학파는 70의 일곱들은 연수(年輸)를 나타내는 주간(週間)으로 해석했다. 70의 일곱들의 각 일곱들은 7년이라는 길이로 보았다, 그래서 70의 일곱들은 490년이라고 해석한다. 24절에 기록된 일들은 70이레가 끝난 뒤에 일어날 사건, 곧 천년 왕국에서 될 일들이다, 24절은 특별히 유대인들에 대한 사건이며 유대 나라에만 국한된 언급이라고 한다.

이 학파에서는 490년이 주전 445년, 곧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느 2장)에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490년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

 

1. 일곱의 일곱들은 포로 귀환 후에 예루살렘을 재건한 기간인 49년 동안을 가리킨다고 한다.

2. 62의 일곱 혹은 434년을 에스라 때부터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때까지 이르는 기간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가 승리의 입성을 하신 주전은 그가 죽으신 주간이다.

3. 7년이라는 제 70번째 이레(한 이레)는 69이레에 직접 연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 대신에 제 69이레와 제 70이레 사이에는 벌써 거의 저물어 가는 2000년에 해당하는 공백 혹은 괄호시대가 삽입되어 있다고 한다.

아이론사이드는 말하기를 "제 70번째 이레는 백성들의 죄악 때문에 시간과 계절을 변동시키시는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연기되었다. 내가 다른 곳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메시아가 십자가에서 죽은 순간부터 그 예언적 시계는 중단되었다. 이 시계는 19세기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은 현세가 끝날 때까지 출발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이스라엘을 세우실 것이다."라고 하였다. 교회시대 즉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괄호라고 강조하기 때문에 이 견해를 가끔 괄호시대설이라고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성도들을 위하여 공중 재림하실 때가 바로 제 70번째 이레가 시작된다고 말하다, 그러므로 제 70이레는 그의 성도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의 성도들과 함께 오시는 지상재림 사이의 7년이라는 기간을 의미한다. 제 70이레가 시작할 때 땅에서는 로마 제국의 왕이 일어나서 처음에는 유대인들과 친구가 되려는 것이 "7년 동안 그들을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약속하고 그들을 보호하고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계약을 그들과 맺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귀환해서 예루살렘에서 충성스러운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을 중건하도록 허락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이레의 절반 즉 전 삼년 반 끝에 가서는 그가 언약을 깨뜨리고 유대인의 예배를 금지할 것이며 후 삼년 반 동안, 즉 예수님이 그의 성도들을 데리고 재림하심으로 제 70이레가 끝날 때까지 커다란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예수님의 재림하심으로 천년왕국이 설립된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세대주의 의 견해를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 align="bottom">

땅에서는 로마왕이 유대인과 계약

한 이레 중간에 계약파괴

<** align="bottom">

일곱이레

회복기간

62이레 그리스도의 초림(교회 시대)

성도들을 데려가기 위한 그리스도의 공중재림 (마지막 한 이레)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 재림

천년왕국

 





 

이 계시가 다니엘에게 임하게 된 경위

바벨론이 망하고 매데 사람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의 왕이 되었을 때 다니엘은 그의 선배인 예레미야의 예언서를 연구하고 있었다. 예레미야 25:11-12에 보면 "... 이 나라들은 70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70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 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라고 예언되었다.

만일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간 연대를 주전 605년이라고 한다면 그가 이 글을 읽을 때는 70년이 거의 끝날 시기였을 것이다, 아마도 포로생활 69년이 지나간 때인 듯 하다.

이 때에 다니엘은 이미 예레미야의 예언의 일부가 성취된 것을 깨달았다. 예레미야의 예언 가운데서 중심되는 예언 제목의 하나는 바벨론 멸망(25장과 29장)이었다. 다니엘은 "갈대아 나라의 왕이 된" 메대 사람 다리오 왕 원년에라는 이 예언 의 한 두 구절을 읽었을 그는 이미 바벨론이 멸망하고 베대파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 단계로 이스라엘이 해방되리라는 예언의 성취를 깨달았고 그 자유가 이미 형존하는 환경 속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했다, 그는 자신과 유대 나라와 성전과 예루살렘을 대신하여 중재하는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기도는 죄와 사악함을 고백하는 기도였다, 요컨대 유대인들이 포로가 된 이유는 그들의 사악함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니엘은 이 겸손한 죄의 고백으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아는 준비가 되었다.

예레미야의 예언에 관하여 기도하는 중에 다니엘의 마음 속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곧 예례미야가 예언한 70년의 포로생활이 끝난 뒤에는 영광스러운 메시아의 구원의 오지 않을까? 미래의 이 구원은 유대 민족에게만 올 것인가? 이 구원은 또한 하나님의 공의 죄를 미워하시는 새로운 계시를 가지고 올 것인가? 이 구원은 언제 올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응답은 왔다, 그것은 천사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 알려 준 70이레에 대한 예언이었다, 성경에 가브리엘은 계시의 전달자로서 하늘에서 결정된 사실을 다니엘에게 알려주도록 파견되었다, 그것은 유대민족과 성읍과 성전이 완전히 핍박받는 70년이 지나면 새로운 생활의 놀라운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그 시대는 전에 있었던 어느 시대보다도 더욱 영광스럽다는 것이다, 그 시대는 70년이 아니고 70의 7배가되는 기간이며 그 시대의 끝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고갈되지 않고 충만한 은혜가 모든 것 위에 임한다는 것이다,

그 때에는 선지자들로 약속하신 사죄의 은혜가 임하여 영원한 의와 구원의 축복이 온다는 것이며 마침내 참으로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단지 유대민족이 가나안에 들어가 제일 먼저 성읍을 개건하리라는 의미의 회복을 말하는 정도였으나 다니엘은 예루살렘이 이전의 영광과 넓이로 회복할 것이라고 말한다. 다니엘은 가브리엘을 통하여 기름부음 받은 자로 말미암아 임할 계약의 축복을 예언했다. 다시 말하면 기름부음 받은 왕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은혜 계약이 실시된다는 것이다. 다니엘은 자신과 그의 민족을 대신하여 사죄의 기도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축복에서 끊어짐을 받는 자들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성전을 완전히 훼파할 이방왕과 군대의 전리품이 되었던 것이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단 9:24)

24절은 70이레에 대한 일종의 개괄적인 진술이다, 본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속박에서 회복시키는데 필요한 모든 성취를 위하여 일정한 기간이 작정되었다는 계시이다, 포로생활 70년은 끝나고 이제 또 하나의 70이란 말로 표시된 놀라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 시대는 다니엘이 상상하였던 것 보다 더 놀라운 것이다, 바로 이 시대에 하나님은 그의 메시아를 통하여 구속을 가져올 것이며 하나님은 그의 신적 구속적 프로그램을 전개시킬 것이다.

여기에서 당면하는 문제는 우리말로 "칠십이레"로 번역된 히브리 용어의 정확한 의미이다.

이 말은 보통 영어 성경이나 한국 성경에서 "칠십 주간 (Seventy weeks-KJV) "으로 번역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의 실제적 의미는 문자 그대로 "칠십의 일곱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보통 "주간들"이라고 번역 된 "일곱들"이란 말은 히브리 원문에서 강조를 나타내기 위하여 70이란 말보다 앞에 기록했다. 이 말이 가지고 있는 사상을 석의(釋意)한다면 "사실상 일곱들과..... 일곱들의 칠십은 ..... 작정되었다" 라고 할 것이다, 이 구절에서 위대한 주제는 칠십들이 아니고 일곱들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원문에서는 "칠십"이라는 숫자를 형용사처럼 "일곱"이라는 명사 뒤에 배열했다, 히브리어 관용법에서는 항상 수사가 명사보다 앞선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순서가 바뀌어졌다. 즉 강조점을 70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7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몬트고메리는( ) 이라는 말을 보통 7일, 즉 일 주간 혹은 사물의 일곱으로 나누는 기간에 대한 언급이라고 해석한다, 다시 말하면 시간의 단위라고 해석한다, 이 말은 창 29:27, 출 34:22, 신 16:9에 이러한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말이 항상 이와 같이 의미를 가질 필요는 없다, 이 말은 항상 여성 복수인 (샤브오트)의 형태를 취하지만, 여기 다니엘서 9:24에서는

남성 복수인 (샤부임)으로 되었다. 다니엘이 여기에서 통상적인 여성 복수 대신에 남성 복수를 사용한 것은 아마도 이 말이 "주간들" 이라는 통상적인 관념과는 다른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는 것을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인 것 같다, 여기에 사용된 이 형태는 실제로 "일곱되는"혹은 "일곱되는 기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분사이다, 그러므로 이 말 자체가 단순히 일곱으로 구분된 기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일곱이란 얼마나 긴 기간인가? 오늘날에 와서는 보통 이 질문에 관한 두 가지 해석을 받아들이고 잇다.

그 하나는 여기에서 "일곱"이라고 번역된 그 말은 단순히 7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일주일 중의 하루가 1년이라는 의미이다, 각 이레는 7년과 동등한 기간이라는 의미이고 70이레는 490년이라는 것이다. 칼빈과 헹스텐버그같은 사람이 이 견해를 취했다.

세대주의학파도 일반적으로 이 견해를 따르며 영역(Revised Standard Version)도 이 구절을 동일한 방법으로 번역하였다, 즉 "연수에 따르면 70이레"로 번역하였다.

이 해석을 정당시하는 사람들이 옳다고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예레미야가 예언한 70년이라는 관설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보인다. 헹스텐버그는 인용하기를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계시하는 것이 명확하다고 지적했다. 즉 2절 에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70년만에 마치리라는 언급과는 반대되는 또 다른 70년을 말한다. 즉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기간이 70번씩 일곱해들"이라고 했다.

2. 이 해석을 지지하는 둘째 논거는 희년이 암시해 준다는 것이다 ( 레 25장-26장 33절 이하). 희년이란 7년씩 7번 지나서 임하는 해 (제 50년)이다.

그때에는 모든 부채를 탕감시키고 종을 해방시키며 모두 속량하는 해이다, 70이레의 마지막 해는 모든 것에 걸쳐서 가장 최대의 안식일이요 모든 종류의 부채를 속량해 주고 탕감해 주는 기간이었다, 희년에 이루어지는 일들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하시는 메시아적 구속보다 더 좋은 것일 수 있겠는가?

 

3. 이 해석이 뚜렷하게 우세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셋째 이유는 490년이라는 기간이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내린 때부터 계산하여 거의 그리스도의 초림 시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해석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며 둘째 해석이 더욱 좋다고 생각한다. 둘째 해석은 에드워드영, 푸폴드 등과 같은 사람들이 취하는 해석이다. 70의 일곱들이란 부정확한 기간이라는 것이다.

즉, 일곱이라는 숫자는 또 다른 근거에서 결정되는 연대기적 존속 기간이라는 것이다. 이 특정한 기간은 메시아적 구속을 하기로 작정된 기간이지만 그 기간은 불확정하고 하나님만 아신다는 것이다.

이 학설을 지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예레미야의 70년 예언과 다니엘의 70이레 사이에는 명백한 대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연수를 염두에 두고 대조시킨 것이 아니고 예레미아의 심판에 관한 예언과 다니엘의 구속에 관한 축복을 나타내는 예언을 대조시킨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연대기적인 대조가 아니라 영적인 대조이다. 이것은 수학적인 대조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사건의 대조이다.

2. 만일 예레미야의 70년 예언을 정확한 연대기적인 대조라고 주장한다면 이 대조는 의미가 없어진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다니엘의 예언은 70이라는 숫자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7이라는 숫자에 강조점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본문에 7이라는 숫자가 어순상 앞에 놓여 있다. 만일 예레미야의 예언이 연대기적인 강조가 있다면 강조점을 70에 두어야 할 것이다. 만일 연대기적인 대조에 있다면 그것은 확실히 대조가 아니다. 이 대조는 70과 70의 대조에 있는 것이 아니고 70과 7의 대조에 있다.

3. 다니엘이 이 예언에서 희년을 생각했을지 모르나 연대기적인 대조를 한 것은 아니다. 연대기적이란 것은 영적인 일차적 강조를 반대하는 단순한 증거들이나 배경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서 다니엘 9:24에 사용된 히브리말은 결코 희년과 연결되어 사용되지 않았다. 희년 제도에서 말하는 문자적 7년에 사용된 말은 (샤바트)이고 여기에 사용된 말은 (샤부임)이라는 전혀 어근이 다른 말이다.

 

4. (샤부임)이라는 표현 자체에는 전혀 시간적인 의미가 없다. 다니엘 10:2-3에는 "일곱"이라는 히브리어가 첨가되어 있다. 그래서 다니엘 10장은 통상적인 일곱날들을 가르치는 주간들로 이해하게 된다. 또한 다니엘 8:14 에서도 문자적으로 일정한 기간을 의미하기 위하여 "주야"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렇게 첨가된 말이 전혀 없다. 다니엘 8:14과 10:2-3에서 정확한 시간을 지시하는 첨가된 말이 있지만 확실히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일곱"이라는 말에는 시간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정확한 시간을 표현하기 위하여 첨가하는 말을 부친 구절이 지시하는 바와 같이 부가어가 없는 다니엘 9:24은 부정확한 시간을 지시하는 요소이다.

5. 연수를 주간으로 계산하는 사상은 구약의 다른 속에는 없다.

6. 이 특별한 예언은 "일곱들"이 7년을 의미한다는 암시가 없고 이러한 해석상의 요구를 지지하는 내증(內證)도 없다.

최근에 와서 루폴드는 이 말씀을 해석하는 견해를 발표했다. 그는 "하나님의 창조주간 이후로 일곱은 항상 신적 활동, 혹은 신적 사역을 의미하는 상징수이다. 70은 일곱을 10으로 곱한 것인데 완전과 완성을 의미하는 완전수이다.

그러므로 70의 일곱들은 가장 중요한 신적 사역을 완성하는 기간이다"라고 지적했다. 결론적으로 이 숫자들은 기간을 나타내기 때문에 시간의 길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숫자들이 상징적이기 때문에 일곱들이라는 정확한 길이를 안다는 것은 정당하지 않으면 또 알수도 없는 것이다.

이 칠십의 일곱들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거룩한 성을 위하여 정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적인 결정 사상이다. 이 시간은 하나님의 그의 구속적인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작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70의 일곱들을 정해 놓으신 것은 그의 완전한 지혜로우신 섭리에 의한 것이다. 그의 백성을 위한 그의 구속목적에 소요되는 기간은 하나님만 알고 계신다.

이 신적 작정은 그의 백성과 거룩한 성을 "위한"것이다,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70의 일곱들이 포로생활 70년과 같은 고통스러운 시간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 말은 단순히 그 기간이 거룩한 성과 이스라엘을 위하여 계획된 기간이라는 것을 지시하고 있다.
 

다니엘이 그 백성과 도시를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성이라고 부른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 심지어는 멸망한 예루살렘까지도 예루살렘의 과거와 미래의 역사의 힘에 의하여 거룩한 성이라고 불리웠다. 게이블라인과 다른 세대주의 주석가들은 이 언급이 오직 육체를 따라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한정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사건들은 다니엘 당시의 백성들에 관한 사건이지 이방인에 관한 사건은 아니다"라고 한다. 이것이 일차적으로는 육체적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역사적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인 것이 사실이지만 바로 이 구절에 메시아적 사역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또한 사죄함과 깨끗함을 받은 하나님의 참 백서에 고나한 언급이다.(갈 6:16)

본절은 6가지 진술로 끝을 맺고 있는데 이것은 70의 일곱들 동안에 이루어질 6가지의 결과를 표시한다. "허물이 마치며 죄를 끝내기 위하여 70의 일곱들이라는 기간을 작정해 놓으셨다"고 석의(釋意) 할 수 있다.

즉 이것은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가리우는 것은 70의 일곱들이라는 기간이 지난 후에 되어지는 일이 아니고 바로 그 기간에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결과는 그 기간이 끝난 후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그 기산의 끝이 오기 이전에 이루어진다. 허물을 마치는 데에 바로 70이레를 작정한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24절의 내용은 이 일들이 70이레가 끝나기 전에 성취된다는 것이다.

다니엘 9:24에대한 이 주장은 세대주의 해석과는 굉장히 반대된다. 세대주의 는 이 6가지가 모두 70이레 후에 오는 천년왕국 시기에 관한 언급이라고 한결같이 해석한다. 그러나 이 문맥은 이 6가지 목적들이 70이레기간에 성취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70의 일곱들이라는 기간은 실제적으로 이 축복들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작정된 것이다, 그래서 이 축복들이 이 기간에 소개된 것이며 세대주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 기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질 것이 아니다.

이 6가지 결과들은 대단히 재미있는 대구법(對句法)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두 개의 그룹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그룹은 3개의 항목으로 되어있다. 처음 3가지 진술은 죄를 제거하키는 소극적 방면이고 나중 3가지 진술은 영원한 의(義)가 들어나는 적극적 방면이다, 이 6가지 결과들은 또 다른 대구법을 이루고 있다, 즉 넷째 진술은 첫째 진술과, 다섯째 진술은 둘째 진술과, 여섯째 진술은 셋째 진술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심지어 둘째 진술과 셋째 진술은 원문에 동일한 동사로 사용되었다. 이상의 것들은 간단하게 개요하면

다음과 같다.

소극적 방면 적극적 방면

1. 허물이 마치는 것 4. 영원한 의가 드러나는 것

2. 죄가 끝나는 것 5. 이상과 예언이 응하는 것

3. 죄악이 숨기우는 것 6.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 받는 것

A. 성취될 소극적 결과들

1. 허물이 마치며(To finish the trasgression-KJV)

여기에서"마치며"하는 동사는 히브리 원어로 (칼라)인데 참으로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마친다"는 말로 번역하고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억제한다"라고 번역한다. 우리 한역은 전자를 택한 것이고 칼빈과 같이 대분분의 복음주의 해석가들은 "언제한다"는 번역을 택한다. 이 말은 "숨기다, 가두다. 체포하다. 감옥에 가두다. 가두어 넣다, 못 들어오게 한다."하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는 위의 목록 가운데서 소극적 방면의 둘째 번 진술인 "죄가 끝나며"와 같은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환하게 들어 나는 죄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만 가리워질 수 있고 또 숨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죄사함이라는 단순한 성격적 표현은 "죄로부터 얼굴을 감추다" 혹은 "죄를 멀리 보내다"라는 비슷한 구절도 있다. 죄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만 용서되는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허물"이라는 말은 매우 강한 말이다. 인간의 불의(不義)를 묘사하는 세 가지 말들 중에서 제일 강한 말이다. 그래서 루폴는 이 처음 결과는 소극적인 결과들을 요약한 것이고 의가 드러난다는 넷째 결과는 70의 일곱들의 적극적인 결과들을 요약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결과에 사용된 이 말에는 변절과 반역이라는 사상이 결합되어 잇다, 이 말은 "반역하다"하는 어근에서 왔다. 그래서 죄라는 강한 말이 되었다, 소극적 방면의 세 말들 가운데서 이 말에만 관사가 잇다, 그러므로 이 말은 모든 형태의 죄를 총망라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언제 이 허물이 제거되었는가? 죄를 제거시키는 일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하시는 사역이다, 이것은 위대한 구속자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즉 기름부음 받은 자인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허물이 제거되었다, 이

것은 말씀이 의미하는 그대로이다,

즉 그리스도가 제거시킨 허물은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천년 왕국 시대에 살고 있는 유대인의 허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허물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허물이란 말이 관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특수한 사람들의 허물만이 아니고 일반적인 허물을 총칭하기 때문이다.

2. 죄가 끝나며(To make end of sins- KJV)

70의 일곱들의 둘째 목적에서 사용한 동사는 우리 한역에는 "끝나며"라고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 번역은 원본의 재미있는 대구법을 잘못 번역한 것이다. 여기세 사용된 동사는 24절의 다섯째 목적으로 사용된 동사와 동일하다, 그러므로 "밀폐하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 이것은 죄를 제거하다, 혹은 죄를 시야 밖으로 옮기다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시야 밖으로 완전히 옮겨 버렸고 완전히 제거 시켰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죄를 가두어 두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죄가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죄악스러운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죄의 종말을 작정하셨다.

3. 죄악이 영속되며

(To make reconciliation for inipuity-KJV)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 (카파르)는 문제 그대로 "덮는다"는 뜻인데 우리 한역에는 "영속하다"라고 대단히 어색하게 번역되었다. (편집자주-킹제임스 성경에는 "죄악과 화목되며, 화해가 이루어지며"라고 되어 잇다)

드라이버는 이 동사의 사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만일 그 덮어 주는 자가 제사장인 경우에는 희생을 드려서 죄인을 덮어 준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속죄 혹은 화목시켜 준다는 뜻이다, 또 만일 덮어 주는 자가 하나님인 경우에는 "용서한다" 즉 "도말한다"는 의미이다(렘 18:23, 시 65:3 참조)

이 본문에서는 어느 경우를 가리키는지 분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말이 죄에 대한 언급이든지 죄인에 관한 언급이든지 간에 신약에서는 "속죄" 혹은 "화해"라고 불러서 항상 효과적으로 덮어 주는 것을 암시한다. 만일 사람의 죄를 덮어줄 때는 그 모든 죄가 정죄함을 받지 않고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화목이 성립된다. 다니엘이 죄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죄를 덮어주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적인 자비라고 강조한다, 이것은 "죄" 개념을 강조하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의 덮어줌, 즉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죄가 제거된

다는 강조이다.

여기에 사용된 세가지 용어는 인간의 부패됨을 잘 묘사해 주는 말이다. 곧 "허물", "죄", "죄악"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당한 저주의 성격을 충분하게 보여준다. 칠십 이레의 기간을 작정하신 첫째 목적은 죄의 저주를 제거하는 것이다.

저주는 끝나고 더 이상 저주에 속박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으로 인하여 가리워졌기 때문에 저주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 일이 성취되었는가? 그것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나타나셨기 때문에 이루어졌다. (히 9"26)

B 성취될 적극적인 결과들

1.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To bring in everlasting righteousness-KJV)

가브리엘은 위에 설명된 세가지 소극적 결과들과 대조되는 세가지 적극적 결과들을 알려준다, 죄는 완전히 제거되고 영원한 의가 소개되었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강력한 말이다, 그것은 의가 인간의 주관적인 의가 아니고 자기 밖에서 하나님이 메시아를 통하여 주신 것임을 강조한다.

원문에 사용된 "의" 라는 말은 (트세덱)인데 속죄와 밀접하게 관계된 말이다. 그러므로 문맥상 매주 적합한 말이다, 이것은 첫째 결과를 진술하는 적극적인 보충어이다. 죄가 완전히 제거된 자리에 완전한 의를 채워둔다는 뜻이다, 이 의는 단순한 풍성함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시 85:11-13, 사 51:5-8)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태양과 같이 떠 오르는 것이며 (말 4:2)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누리는 축복 받은 상태이다,

본문에 "영원한 의"라고 하였는데 헹스텐버그는 두가지 이유에서 영원하다고 말한다, 즉 그 의의 출처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서 왔으니 영원하고 그 의의 존속 기간으로 볼 때에 모든 피조물과 대조적으로 썩지 않는 것이니 영원하다, (사 51:5, 45:17)

의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은 완전히 메시아 시대 (은혜시대)의 특징이다, 의는 하나님이 메시아를 통해서 주시는 것이다, 예레미야 33:16에는 예루살렘을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불렀고 예레미아 23:6에는 주님의 이름을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함으로써 메시아의 날을 예언했다, 이사야 61:3에는 하나님의 나라 성도들을 "의의 나무"라고 하였고 이사야 53:11에는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이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하리라고 예언하심으로 의를 결정하는 원인을 지적했다.

위의 모든 말씀을 신약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를 가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은혜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더 이상 죄인으로 취급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취급하신다.

2.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To seal up vision and prophecy-KJV)

우리 한역의 이 부분 번역은 대단히 부정확하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는 소극적 방면의 둘째 결과와 확실히 병행하는 동일한 동사이다, 그러나 한역은 전혀 동일한 관용법적 표현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오늘날에 와서는 이 동사를 "봉인하다 (seal up)"라고 번역한다, 이 번역이 적합하다.

이 동사는 자주 확인하는 의미로 "날인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이상과 예언을 인정하는 의미에서 봉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상은 하나님의 인정하는 표로 도장을 찍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약은 이러한 의미를 지지하지 않는다. 구약에서는 결코 이런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더욱이 동일한 동사로 사용된 같은 절에 있는 병행된 말과도 그 의미가 다르다, 칠십 이레의 둘째 결과인 "죄가 마치며"에서는 이 말이 "끝나다". 혹은 "마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끝내다" 혹은 "정지하다"는 뜻으로 결국 성취된 사건의 범주에서 취급한 것이다, 예언과 이상은 끝났다.

즉 "이상과 예언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며 이상과 예언을 하는 시기는 지나갔다"는 의미이다. 예언의 직무는 끝났으며 이 후로는 예언이 필요 없다는 의미이다.

기독교회의 해석을 지지하는 카일과 클리포드는 예언과 이상이 "미래에 끝난다"고 주장한다, 카일은 예언이 폐지되는 때가 그리스도의 초림이 아니고 재림때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예언이 그리스도의 초림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고 재림에까지 관계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예언의 말씀들이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고 초림 후에도 넓은 의미에서는 예언이 계속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특별히 여기에서 말하는 이상과 예언은 분명히 구약시대의 것을 가리킨다. 이상이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임한 계시를 의미하는 특유한 명칭이다(사 1:1, 암 1:1) 한역에 부적절하게 번역된 다른 말은 히브리어로 "예언자"라는 말이다, 예언자란 이상을 받은 사람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이상과 예

언자라는 두 말은 구약의 예언적 계시와 구약 계시의 매개체를 의미한다. 이 계시는 일시적, 예비적, 모형적이었다,

이 계시는 앞으로 위대한 예언자인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고(신 18:15) 그리스도가 오신 다음에는 구약적 의미의 예언적인 계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그 목적이 완성되었으므로 예비적으로 모형적인 기간은 끝났다, 바꾸어 말하면 이 말씀들은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성취되었다, 하나님이 일시적으로 예비적인 방법으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은 바로 그리스도로 완성된 말씀이다. (히 1:1-2)

3.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To anoint the Most Holy-KJV)

여기에 있는 "지극히 거룩한 자"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거룩한 것들의 거룩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가 있다. 자유주의 비평가들은 이 구절이 안티어커스 이피라네스의 시대를 가리킨다고 한다, 즉 그들은 이것이 안티어커스가 더러운 제물을 태워서 신성을 더럽힌 제단을 다시 신성케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해석의 가장 중시되는 난점은 본절에 있는 모든 다른 부분들이 다 메시아의 사역을, 특별히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구속 사역을 가리켰는데 여기서는 그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성전 청결에 대한 요세프스(Josephus)의 기록에도 이 기간의 고대 유대인의 역사에도 기름부음에 관한 언급은 없다,

카일과 클리포드는 이 말씀이 그들의 학설에 맞추어서 재림과 거룩한 성, 하늘의 예루살렘을 의미한다고 한다 우리는 이 학설을 받아 들일 수 없다.

루터와 칼빈, 헹스텐버그와 영과 같이 우리는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말미암은 그의 기름부음 받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구약에서 관유는 성령을 상징했다.(슥4장)

그래서 사무엘상 10:1 이하에서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라고 이사야61:1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다.

메시아가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았다"고 하시는 것음 메시아의 사역과 메시아의 독특한 성격에 대한 구약적 표현이다(사 11:1,61:1).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이 성령이 독특하게 주어졌다, 즉 사도행전 10:38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라고 말해 준다.

그리스도에 관하여 "거룩한 것들의 거룩한 것"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때때로 문제가 되어 내려왔다.

그러나 역대상 23:13을 보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가장 거룩한 것들 (the most holy things-KJV)로 성별했다, 이 구절을 보아서 이 표현은 사람에게도 적용된 것이 분명하다.

누가복음 1:35절을 보면 그리스도를 "거룩한 것 (holy thing-KJV)" 이라고 묘사했다, 신약에서는 자주 그리스도를 "거룩한 자"라고 불렀다. (행 3:14, 4:30, 요일 2:20, 계 3:7)

여기에는 26절과 27절에 언급된 지극히 거룩한 자의 기름부음 받음과 성소의 훼파됨 사이에 대조가 나타나 있다고 생각된다. 이전 성전은 훼파되었다, 왜냐하면 그 성전은 알맹이 없는 껍질만의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이 성전에 주님이 임재하셨으나 유대인들의 죄와 죄악 때문에 하나님께서 떠나셨다, 지금은 새로운 지극히 거룩한 자가 그 자리에 기름부음을 받아서 임하셨다,

지극히 거룩하신 자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이젠 성전의 완전한 성취자로서 임하셨다, 그가 오셔서 낡은 성전 대신에 참되고 의미 있는 성전이 되어 주셨다, 그의 안에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사람들과 교통하신다.

본절에 있는 6가지 항목도 모두 메시아를 가리킨다. 이 사실은 이 예언의 종결점을 결정한다, 칠십의 일곱들이 끝나는 것은 안티어커스 시대와 관계없고 그리스도의 재림이나 천년왕국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이것은 다만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계된 일이다, 다니엘은 그의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잊어버리시지 않는다는 계시를 받았다.

사실상 칠십 이레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간이며 메시야의 구속 사업의 완성을 목적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모으시고 그들이 그때까지 맛보지 못한 보다 큰 신적 구속의 프로그램을 실시해 주신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다니엘이 상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도 더욱 풍성하고 훌륭하게 성취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난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것이며(단 9:25)

다니엘은 여기에서 잘 깨달아 알라고 하는 명령을 받았다.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에는 특별히 같은 뜻을 가진 두 동사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이 아래에 나오는 예언이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잘 훈련된 영적 마음을 요청한다, 예수님께서도 가끔 이와 유사한 말씀을 하셨다. 곧 "읽는 자는 깨달은진저"라고 하셨으며 또한 "귀 있는 자는 들어라"고도 하셨다.

여기에서 다니엘은 칠십 이레의 출발점을 알게 되었다, 그 출발점은 곧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말씀의 공포이다."

우리 한역에는 "영(令)"이라는 뜻으로 번역되었으나 원래 (다발)이라는 히브리 용어는 단순히 말씀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의 창시자는 바로 하나님이다, 그것은 단순히 바사 왕을 작정했다는 말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이것과 동일한 말이 23절에도 나온다, 이 말씀의 내용은 예루살렘의 복구와 건축이다,

여기에서 중심 되는 문제는 언제 이 말씀이 공포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즉 칠십 이레의 출발점을 어디서부터 잡아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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