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딤후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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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성경 배경사(1)

  • 관리자 (ehompy0429)
  • 2014-05-23 15: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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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년 킹제임스성경

 

 

여왕에게 봉정하도록 주교들의 성서 (Bishops' Bible) 한권을 보내면서 세실(Cecil)에게 쓴 1568년 10월 5일자 편지에서 파커 (Parker) 대주교는 분명히 주저하는 태도를 나타냈다: “인쇄업자는 정직하고 부지런하게 일했습니다. 만약 각하가 이번 판의 출판 허가와, 일관성을 도출해 내기 위해 교회 안에서 유일하게¹ 공개 낭독되도록 하는 권고를 여왕 폐하로부터 받으신다면, 대부분의 교구에는 큰 비용이 아닐 것이며, 그가 받고 있는 많은 청구 금액에는 경감이 될 것입니다.’ 주로 인쇄업자에게 해야 하는 보상의 의무를 근거로 교회에서 사용하도록 새로운 판의 채택을 이처럼 역설하는 것은 확실히 이상하지만, 1571년 캔터베리 (Canterbury) 관구에서 ‘통과된’ 이 주제에 관한 성의 없는 바로 그 교회법은 생각해볼 만한 열심이 그다지 많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보통 인용되는 조항은 (Cardwell, Synodalia, 115) 진정 거의 악의적인 데, 그 이유는 그 조항이 모든 대주교와 주교는 자신의 집에 폭스(Fox)의 순교자의 책(Book of Martyrs)과 다른 유사한 책들과 함께 그 성서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sacra Biblia in amplissimo volumine, uti nuperrime Londini excusa sunt), 주임 사제들은 그 책이 구입되어 자신의 성당에 배치되어 주교 대리와 하급 참사 회원, 교회의 종들, 나그네, 그리고 여행자들이 그 책을 읽을 수 있고 읽는 것을 들을 수 있도록 확인해야 하며, 그들 자신의 집에도 구입해 두어야 한다는 것, 즉 부과된 주된 의무는 주교들과 다른 상급 성직자들이 자기 자신의 개정판을 구입해야 한다는 것을 규정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나중의 교회법(Cardwell, Synodalia, 123)에서는, 새로운 판 한 부가 모든 교회에 배치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데 교구 위원이 참여하도록 하고 있지만,² ‘만약 그렇게 하는 것이 편리하다면’이라는 단서는, 대 성서(Great Bible)의 경우에 포고령으로 발령되었던, 한 달 지체될 때마다 그 책값의 네 배에 해당하는 벌금과 함께 특정 날짜까지 한 부가 준비되어야 한다는 칙령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28쪽 각주]

1. 즉, 다른 모든 것을 제외하고.

2. ‘Curabunt etiam ut sacra Biblia sint in singulis ecclesiis in amplissimo volumine (si commode fieri possit) qualia nunc nuper Londini excusa sunt.’

 

국가나 그 자신의 대주교구 회의로부터 거의 지원을 받지 못한 파커(Parker)는, 자신의 자원을 사용하여 그 성서를 배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혼자서 해결해야 하였는데, 그 책의 출판 허가와 관련하여 그에게 지워진 의무 때문에, 어떤 부정적인 목적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큰일이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1565년 (1566년?) 3월에, 런던의 주교로서 그 의무를 함께 졌던 그린달(Grindal)과 그는, ‘우리는 이후 편리한 시간이 있으면, 교회들을 위한 하나의 다른 특정한 성서를 발행할 것이라고 언급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전혀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다양한 번역과 독본을 갖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일 것이다.’라는 것을 근거로, 제네바 성서(Geneva Bible)를 인쇄하는 존 보들리(John Bodley)의 배타적 독점권을 12년 더 연장하도록 세실(Cecil)에게 권했다. 그러나 그들은 ‘만약 이후 연장되는 그에 대한 허가가 우리의 감독이라는 조건 없이 그저 나간다면, 우리는 충분히 그렇게 승인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의 지시, 승낙, 조언이 있어야만 인쇄가 승인된다는 서면 명령을 그에게 해야 할 것이다’라고 부가한다. 미 마지막 문장을 보면, 제네바 자체에서는 1570년에 존 크리스핀(John Crispin)에 의해 한 판이 발행되었지만, 파커(Parker)의 생애 중 영국에서는 제네바 성서(Geneva Bible)가 한 판도 발행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의유가 된다. 1574년 중에 ‘예언하기’의 질문과 관련하여 추밀원과 사이가 나빴던 파커(Parker)는 급속하게 악화되는 그의 건강 때문에 생애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추밀원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는 1575년 5월 17일에 사망했으며, 런던에서 인쇄된 최초의 제네바 성서 신약은 그 해에 발행된 것으로 되어 있고 구체적인 달은 나오지 않는데, 출판이 그 해 하반기에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지만, 출판 전에 그가 사망했다고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파커(Parker)는 영국에서 제네바 성서(Geneva Bible)가 인쇄되는 것을 막고, 그리고 주교들의 성서(Bishops' Bible)의 인쇄 독점권을 저기(Jugge)에게 보장하기 위해 스테이셔너사(Stationer's Company)에 대한 그의 통제권을 사용했다는 확신을 버릴 수 없다.

당시의 관념에 따르면, 제네바 성서(Geneva Bible)를 제외시킨 것은 몇 개의 주석의 성격 때문에 정당화될 수도 있다. 만약 그 독점권에 주교들의 성서(Bishops' Bible)가 반드시 효과적으로 배포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수반되었다면, 저기(Jugge)에게 보장된 독점권은 튜더 (Tudor) 왕가의 입장에서도 옹호될 수 있었지만, 우리 앞에 놓인 증거가 보여주는 것처럼 그와 같은 요구는 없었다. 큰 2절판 성서들이 1568년, 1572년, 그리고 1574년에 인쇄되었으며, 다른 대형 4절판 성서는 1569년과 1573년에 인쇄되었다. 전체 성서이든지 신약이든지 8절판 성서의 인쇄에 대한 증거는 훨씬 덜 정확한데, 한편으로는 그 성서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는 시기의 두세 개의 판본에 이상하게 날짜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나 그 이상의 전체 성서 판본이 소멸되었을 가능성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나 가능성 있는 가장 그럴듯한 견해에 의하면, 그 주교는 사적으로 읽도록 성서를 보급하는 것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확실한 듯하다. 그는 교회 예배를 위해서 적절한 성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여 충족시켰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대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1611년 판 성서의 서문에서 취한 한 구절(거기서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입장에 적용된다)을 사용하는 것과 관련해서 그는 그 성서의 초판의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그의 확신의 부족은 주교들의 성서(Bishops' Bible)의 운명을 정했다.

파커 (Parker) 대주교가 죽고 나서 곧 저기(Jugge)의 성서 인쇄 독점권에 묵종해왔던 런던의 다른 인쇄업자들은 인쇄권을 공유하기 위하여 그들의 권리를 용감하게 주장했다. 타협이 일시적으로 이루어져서, 저기(Jugge)는 그 성서의 4절판과 16절판 신약의 인쇄 독점권을 가지게 되었고, 다른 절판 성서는 독점에서 제외되어 스테이셔너사(Stationer's Company)로부터 허가를 받는 대상이 되었다 (정확성에 대한 책임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 같다). 허가가 회득되었고, 1575년 11월 24일에 저기(Jugge)가 인쇄했지만, 그 판의 부분에 자신들의 이름을 올린 월리엄 노턴 (William Norton), 루크 해리슨 (Luke Harrison), 그리고 다른 출판업자들을 위해서, 주교들의 성서 (Bishops' Bible) 2절판이 출현했다. 이 일은 분명히 스테이셔너사(Stationer's Company), 즉 출판사 내의 출판사의 ‘성서 재고’의 시작이었으며, 그 회사의 이어진 역사는 매우 불분명하지만, 수익을 내고 기금을 가지고 있어서 이자를 받기 위해 때때로 스테이셔너사 (Stationer's Company) 자체에 돈을 빌려주는 것이 가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만약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것처럼 1611년의 성서 개역자들이 그 회사로부터 지불을 받았다면, 그 돈은 이 별도의 성서 재고로부터 나왔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와 같은 재고의 존재는 또한 1575년의 타협이 성서 인쇄 사업에 우리가 모르는 방법으로 계속 영향을 주었다고 믿을 수 있는 강력한 근거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우리는 이미 언급한 2절판 주교들의 성서 (Bishops' Bible) 이외의 다른 결과는 없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같은 1575년에, 프란시스 월싱엄 (Francis Walsingham) 경의 강력한 후원으로, 월싱엄에게 고용되어 있었으며 그자신이 어느 정도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크리스토퍼 베커(Christopher Barker)는 자신을 위해 그때까지 영국에서 인쇄되지 않았던 제네바 성서 (Geneva Bible) 12절판을 인쇄하도록 토머스 벤트롤리어(Thomas Vantrollier)를 고용했으며, 그 자신이 또 다른 8절판을 인쇄했다. 베커(Barker)는 월싱엄(Walsingham)의 문장인 호랑이 머리를 그의 가표로 취하여 그 일부를 그의 성서들의 장식으로 사용함으로써 그와의 관계를 광고했다. 그는 또한 1576년에 이미 언급한 베자(Beza)의 프랑스어 신약 번역판도 인쇄했는데, 월싱엄(Walsingham)에게 고용되었던 로렌스 톰슨(Laurence Tomson)이 만든 제네바 판에 기초를 두었다. 그는 또한 1576년에 제네바 성서(Geneva Bible)의 2절판 두 개를 그리고 1577년에 하나를 인쇄했다. 그 해 8월 17일과 18일에 리처드 저기(Richard Jugge)는 유언장을 작성하고 사망했다. 이어지는 언급들로부터 우리는 여왕의 인쇄업자로서의 그의 특허는 (이미 갱신되지 않았더라면) 상당한 역량을 지닌 외교관이었던 토머스 윌크스(Thomas Wilkes)에 의해 즉시 취득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새로운 특허는 모든 성서 판으로 확대되었고, 윌크스(Wilkes)는 먼저 리처드(Richard)의 아들인 존 저기(John Jugge)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앞서 5월에 두 가지 중요한 책의 판권을 얻음으로써 자신의 사업을 시작한 존(John)은 그때쯤 독점에 대항하여 많은 사람들이 서명한 청원서에서 사실상 여왕의 인쇄업자로 불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사라졌는데, 사망에 의해서거나, 그가 그의 아버지의 유언으로 10s라는 얼마 안 되는 금액을 받아서, 거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윌크스(Wilkes)가 알았기 때문일 수 있다. 9월 28일에 윌크스(Wilkes)의 강청으로, 성서 인쇄의 온전한 독점을 언급하는 새로운 특허가 크리스토퍼 베커(Christopher Barker)에게 주어졌다. 5년 후인 1582년에 독점권이 또 다시 도전을 받았을 때 베커(Barker)는 다음과 같이 썼다:

 

전체 성서를 인쇄하는 데는 엄청난 액수의 돈이 필요하다. 저기(Jugge)씨가 하나의 인쇄를 감행하기 전에 12년 동안¹ 그 분야에서 아무 인쇄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과 같다. 그러나 나는 윌크스 (Wilkes) 주인에게 지불한 많은 금액을 생각한다. 오랜 세월 동안 소수의 잡다한 인쇄물들을 인쇄하려는 필사적인 시도에 (그때 이래 일부 사람들이 부르는 것처럼) 족쇄가 채워졌는가? 그 업에 나는 1년 반 혹은 그 정도의 기간 동안 3천 파운드의 금액으로 고용되었다. 그 기간 중에 내가 죽으면, 나의 아내와 자녀들은 완전히 망하게 될 것이고, 나의 여러 친구들은 나를 위해 담보나 다른 수단으로 상당한 액수의 돈을 지불하는 큰 피해를 입을 것이다. 나의 고인이 된 선한 주인이었던 서기장이 한 번 그렇게 하여 이제 부족이 보충되었다. 나는 대부분이 나의 전임자들의 하인들이었던 여러 명의 장인들이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 불필요한 임무를 감행하는 것 밖에는 달리 해야 할 일이 거의 혹은 전혀 없다.

 

베커(Barker)가 여기에 언급한 ‘소수의 잡다한 인쇄물들’에는 1577년의 소형 2절판 및 8절판 그리고 1578년의 두 개의 대형 2절판이 포함된다. 대형 2절판 중 하나는 주교들의 성서(Bishops' Bible)지만, 그에 관해서 그는 상업조합에 편지를 써서 ‘내가 허가를 받기 전에 시작했던 또 다른 성서이며, 확인되는 것처럼, 그 성서는 나의 승낙이 있어서 완성될 수 있었으며, 그리하여 크리스토퍼 베커(Christopher Barker)의 지시에 의해 그 이름이 인쇄되었다.’라고 하였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다른 세 가지 인쇄물은 제네바 (Geneva) 판이었으며, 대형 2절판은 크게 주목할 만한 책인데, 그 이유는 교회에서 사용하도록 분명이 의도되었고, 전체를 통해 사제가 봉사자라는 말로 대체된 기도서와, 복음서와 서간들의 본문 대신 그들이 인쇄하게 된 책들에 대한 참고 문헌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31쪽 각주]

1. 이것은 1568년 전의 기간을 언급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 모든 것은 그린달(Grindal)의 보류에도 불구하고 극단주의 프로테스탄트 분파는 매우 강했으며, 자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월싱엄(Walsingham)이 도운 그 인쇄업 배후에는 통상적인 거래 이상의 어떤 것이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다. 그 후 5년 동안 수많은 제네바 성서(Geneva Bible)의 다른 판들이 인쇄되었지만, 그와 비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주교들의 성서(Bishops' Bible)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휘트기프트(Whitgift)가 그린달(Grindal)을 계승하여 주교가 되자, 베이커는 ‘부족’이 보충되었다는 그의 꿈으로부터 깨어났으며, 주교들의 성서(Bishops' Bible)의 소형판과 대형판을 시작하도록 주문했는데, 그에 관해서는, 그 책들이 준비는 되었지만 (1584년에 4절판, 1585년에 2절판), 분명히 신속하게 팔리지 않았을 때, 휘트기프트(Whitgift)는 링컨(Lincoln)의 주교에게 편지를 썼다:

 

여러 교구 교회들뿐만 아니라 여유가 있는 예배당들도 성서를 충분히 갖추지 못했으며, 일부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거나, 찢어지고 손상된 것을 가지고 있으며, 더욱이 주교 회의에서 승인한 번역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드리는 한편으로, 방문을 해서나 다른 방법으로 당신의 감독 관구에 있는 언급한 모든 교회들과 예배당들이 당신의 재량권에 따라 앞에서 언급한 승인된 성서를 한권 혹은 그 이상과, 이 영역의 법률에 의해서 지정된 기도문 한 권을 갖추도록 당신이 엄밀히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해 저는 여왕 폐하의 인쇄업자가 앞에서 언급한 성서 번역판 대형과 소형 두 권을 인쇄하도록 하였습니다. 대형은 재력이 있는 관구를, 그리고 소형은 예배당과 매우 작은 관구를 위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성서는 지금도 남아 있으며 준비되어 있습니다.

 

1588년에 크리스토퍼 베커(Christopher Barker) 자신이 또 하나의 2절판 주교들의 성서(Bishops' Bible)를 인쇄했다. 1589년 8월에, 그 자신의 생애 중과 그의 아들 로버트(Robert)의 생애 중에 유효한 새로운 특허를 여왕으로부터 확보하였으며, 그때부터 1599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의 성서 인쇄를 대리인에게 위탁했다. 1589-1603년 사이의 14년 동안 또 다른 세 개의 2절판 주교들의 성서(Bishops' Bible)가 등장했으며, 4절판은 인쇄되지 않았고, 8절판도 서너 개 나타났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1575년부터 계속되는 전체 기간 중에, 매년 평균 세 개의 제네바 성서(Geneva Bible)가 인쇄되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사적으로 읽도록 하기 위한 소형이었다. 이와 같은 여분이, 요구의 결과를 얼마나 능가하는지, 공급의 통제를 얼마나 능가해서 생산되었는지는 대답하기가 어려운 질문이지만, 받았던 것보다는 더 많은 주목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한편, 파커(Parker)가 살아 있는 동안 제네바 성서(Geneva Bible)의 배포는 인위적으로 저지되었고, 그 경쟁물을 보급하기 위한 아무런 조처도 취해지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내 생각으로는 파커(Parker)의 사망으로부터 휘트기프트(Whitgift)의 서임까지는 그 입장이 역전되었으며, 그 8년 동안 (당시에는 분명히 제휴를 이루었을) 정치적, 종교적 열정과 이득을 얻으려는 욕망이 함께 결합되어, 월싱엄과 그의 친구들의 지원으로 애호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장려되었을 제네바 성서(Geneva Bible)는 영국 국민을 장악할 정도의 수량이 판매되게 되었다. 휘트기프트(Whitgift)의 계승 후에, 크기를 고르게 함으로써 주로 수요에 따라 각각의 번역판이 점진적으로 발행되는 일이 가능했지만, 거의 16세기 말이 되기까지 주교들의 성서 (Bishops' Bible) 8절판의 희귀성은 매우 주목할 만했다. 그러나 그 기간 전체를 두고 보면, 그저 돈을 벌려는 출판업자 외의 다른 영향력이 두 번역판의 운명을 두고 대치하고 있었으며, 파커(Parker)의 근시안적인 정책이 월싱엄(Walsingham)과 그의 친구들에게 스스로를 온전히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증거들을 해석해 보면, 엘리자베스(Elizabeth)의 통치 기간 전체를 통하여 성서 번역판의 생산은 언제나 통제된 것이었다는 사실이 꾸준히 뇌리에 떠오르며, 1611년 성서의 운명을 고려하게 되면, 그와 같은 통제는 여전히 계속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사람들이 집에서 읽는 성서와 교회에서 듣는 성서 사이의 일치의 결여는 양 당사자를 괴롭혔음에 틀림없다. 1604년 1월에 청교도의 불만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제임스 1세가 (상당히 비공식적으로) 소집한 햄프턴 코트 회의(Hampton Court Conference)에서 전체 교회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새로운 번역에 대한 요구가 청교도의 대변인인 옥스퍼드(Oxford)의 코푸스 크리스티 (Corpus Christi) 칼리지의 학장 존 레이놀즈 (John Reynolds) 박사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청교도의 학식과 또한 선견지명을 높이 살 만하게 한다. 우리에게 전해진 그 회의 전체 내용에 따르면 레이놀즈(Reynolds)는 교리 문답 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시작했다.

 

그 후 그는 헨리 (Henrie) 8세와 애드워드 (Edward) 6세의 통치 중에 허락된 성서들은 틀린 곳이 많고 원문의 진리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번역이 있어야 한다고 왕을 움직였다. 예를 들어, 먼저, 갈라디아 4:25의 그리스어 단어 συστοιχεΐ는 제대로 번역되지 않아서 지금은 Bordreth인데, 그 단어의 힘도 사도들의 감각도 그 장소의 상황도 표현하지 못했다.

둘째는 시편 105:28의 they were not obedient(그들은 순종하지 않았다)인데, 원문은 They were not disobedient(그들은 불순종하지 않았다)이다.

셋째는 시편 106편 30절이다. 그때에 비느하스(Phinees)가 일어나 기도했다(prayed)의 히브리어 원문은 심판을 집행했다 (Executed judgement) 이다. 그와 같은 발의에 대해 당시 반대는 없었으며, 이의는 사소하고 오래된 것이었으며 이미 인쇄물로 종종 답변되었던 것이다. 다만, 런던의 주교는, 만약 모든 사람의 변덕을 다 따라야 한다면 번역은 끝이 없을 것이라고 그럴듯하게 부언했다. 그러자 왕은 (잘 번역된 영어 성서를 지금까지 본적이 없으며, 그 중 최악은 제네바 성서라는 것을 공언하면서) 하나의 동질의 번역을 위한 어떤 특별한 노력이 기울여져야 하며, 그 일은 양 대학의 가장 박식한 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그 후에 주교들과 교회의 최고의 학자들에 의해 검토되어, 그들이 추밀원에 제출하며, 마지막으로 왕의 권위로 비준되어, 전체 교회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번역에 구속되기를 원했다. 한편 놀랍게도 왕은 (런던의 주교가 던진 한 마디에 대해) 제네바 성서에 부가된 난외주에서 일부 주석은 매우 편파적이고, 사실이 아니며, 선동적이고, 매우 위험하고 불충한 독단의 맛을 풍기는 것을 발견하였으므로 (그것을 왕은 영국의 귀부인이 헌정한 성서에서 봤다) 난외주를 달지 말도록 경고했다. 예를 들어보면, 출애굽기 1:19에서 난외주에는 왕들에 대한 불순종이 들어 있다. 그리고 역대하 15:16에서 주석은 아사(Asa)가 그의 어머니를 폐위 시키고, 그녀를 죽이지 않은 것을 비난한다. 그리하여 근엄하고 지혜로운 조언으로 나머지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 점을 결론 내린다. 먼저, 믿음의 문제 상의 오류들은 개정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둘째, 믿음의 문제와 무관한 오류들은 중단하고 어구 주석을 부가한다. 왕에게 약점이 있다면 바꾸는 것이 낫고, 교회에 잘못이 있다면 개혁하는 것이 낫다는 바톨루스 데 레그노(Bartolus de regno)의 말을 인용한다. 분명히 왕은, 만약 이것이 당신을 가슴 아프게 하는 가장 큰 문제라면, 나는 그와 같은 성가신 불평 때문에 내가 당해 왔던 괴로움을 겪을 필요는 없었으며, 당신이 만족할 어떤 다른 사적인 조처를 취했을 것인데 라고 말하는 동시에 주교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머리를 흔들고 미소를 지었다.

 

필자인 윌리엄 바로우(William Barlow)는 청교도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의 보고는 편파적이라는 것이 그 이야기의 모든 쪽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레이놀즈(Reynolds)가 헨리 (Henry) 8세와 애드워드 (Edward) 6세의 통치 중에 허용된 성서만을 언급하고, 그 본문이 표명하는 것을 다소 모욕적인 방법으로 언급함으로써, 주교들의 성서(Bishops' Bible)는 무시하였는지를 확실하게 느낄 수 없다. 그가 이의를 제기한 표현은 주교들의 성서(Bishops' Bible)에서도 발견되는데, 만약 레이놀즈(Reynolds)가 재판본에 불과한 것으로 혹은 공식적으로 ‘허용되지’ (즉, 인가되지) 않은 것으로 이를 간과했다면 그는 쓸데없이 흥분한 것이다. 그러나 그 제안에 대해 왕이 당장 취한 진정한 관심은 그 형식에 의해 제기되었을지도 모르는 난관을 일소해버렸다. 그러한 관심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의 주임 사제와 옥스퍼드 (Oxford) 및 캠브리지 (Cambridge) 대학교의 히브리어 흠정 강좌 담당 교수들은 지체하지 않고 개역자들의 이름을 제시하도록 지시를 받았음에 틀림없으며, 6월 30일에 (캔터베리 주교가 공석인 가운데) 왕이 대화를 나누었던 런던의 주교인 밴크로프트(Bancroft)는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었다:

 

라이블리 (Lively) 씨가 당신에게 알려 준 것과 같은 방법으로 성서의 번역에 종사하게 될 모든 사람을 알게 된 왕은 그 선택을 관대하게 승인했다. 종교적 일은 지체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왕이 매우 열망하였기 때문에, 당신이 가능한 한 신속하게 당신의 대학에서 함께 만나서 동일한 일을 시작하는 것이 왕이 기뻐하는 일이라는 것을 왕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알리도록 왕은 나에게 명령했다.

 

[34쪽 각주].

1603년 1월 14일 햄프턴 코트의 왕의 궁정 사실에서 대주교, 주교 및 그의 다른 사제들과 함께 (그 회의에 추밀원 대주교들 대부분이 참석했다) 하게 된 것을 기뻐했던, 그 회의의 개요와 요지. 신학 박사이며, 체스터(Chester)의 주임 사제인 윌리엄 바로우(William Barlow)에 의해 요약됨. 일부 사본에는 거기에 (여기저기에 흩어져서) 불미스러운 그리고 진실이 아닌이 부가되었다. 런던, 매슈 로(Matthew Law)를 위해 존 윈뎃(John Windet)에 의해 인쇄되었으며 세인트 오스텐스 게이트 (S. Austens Gate) 부근의 폴스 처치야드(Paules Churchyeard)에 있는 그의 상점에서 팔 예정이었다. 1604. 1611년 성서의 서문에 청교도의 불만에 대해 다른 견해가 들어 있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거명된 라이블리 (Lively) 씨는 캠브리지의 히브리어 교수였으며, 왕의 주의를 특별히 끌었음에 틀림없는 데, 왕은 1604년 9월에 에식스(Essex)의 펄리(Purleigh)의 사제관을 그에게 하사했다. 다음 해 5월에 그가 사망한 것은 그 일에 큰 타격이었다. 제임스 왕이 가졌던 관심은 7월 31일 밴크로프트(Bancroft)에 의해 다른 주교들에게 보내진 회람장에 다시 나타났는데, 동봉된 왕에게서 온 22일자 편지는, ‘성서의 번역을 위해 54명의 특정의 학자들을 임명하였으며, 그 숫자의 다양한 사람들은 교회 조직상의 승급을 받지 못했거나, 그들의 공적을 고려할 때 매우 부적절한 매우 작은 승급을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순조롭게’ 이를 스스로 구제할 수 없었던 왕은 ‘그처럼 승급시키는 것이 합당하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학자들 일부를’ 그들에게 추천할 목적으로, 모든 성직록 소유권자 혹은 녹을 받는 성직자의 직을 소유한 사람에게 다음의 빈자리를 그에게 보증하기 위해 적어도 20파운드의 가치를 명령하였다. 같은 날짜의 다른 회람장에서 밴크로프트(Bancroft)는 각 주교에게 ‘이와 같은 목적을 위해 당신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당신의 주임 사제와 참사회에게 알려서’ 그들이 기부를 약속할 수 있게 하도록 요청한다. 이와 같은 회람장들 중 첫 번째 것에 대한 반응은 매우 빈약하였고, 두 번째 것에 대한 반응은 전혀 없었다.

우리에게 전해진 번역자들의 목록들 중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은 버닛 (Burnet) 주교가 자신의 종교 개혁의 역사에 실은 것인데, 그 목록을, 개역자들이 따랐던 규칙 및 카드웰(Cardwell)의 주석에 바탕을 두고, 영국 인명 사전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및 다른 자료로부터 보완한 간략한 서지학적 주석과 함께 여기에 제시한다:

 

[35쪽 각주]

1. 단지 약 50명의 이름이 우리에게 전해졌으며, 어떤 한 목록에는 단지 47명이 들어 있다. 처음에는 각 위원회에 9명의 개역자들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2. 영국 국교회의 종교 개혁의 역사 (The History of the Reformation of the Church of England). 길버트 버닛 (Gilbert Burnett) 저. 제4판, 추가분 포함. 런던, 1715. 제2부, 기록들의 수집, 333쪽 이하. 그 문서는 ‘Ex MS. D. Borlase’, 즉 에드먼드 볼레이즈 (Edmund Borlase), 내과 의사 겸 역사가라는 방주가 있다. 브리티시 박물관에 있는 MS(필사본)에도 몇 개의 유사한 목록들이 들어 있는데, 차이는 사소하다. 그 중 하나에는 (부록 34218) ‘Anno secundi regis Iacobi 1604’라는 날짜가 있으며, 비록 카드웰(Cardwell)은 바로우(Barlow)가 체스터(Chester)의 주임 사제가 된 날짜와 관련해서 실수를 하여 다르게 생각했지만, 그 목록들은 그 해를 언급하는 것이라는 데 의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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