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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딤후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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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성경배경사(2)

  • 관리자 (ehompy0429)
  • 2014-05-23 15: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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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킹제임스성경 배경사(2)

 

이 모든 준비를 위한 마련 및 규칙과는 반대로,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개역자들 중 한 사람의 거의 동시대적인 유일한 경험담을 인용할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외경의 번역을 맡은 두 번째의 캠브리지 (Cambridge) 그룹의 한 사람으로서, 후에 (1619년) 캔터베리(Canterbury)의 주임 사제가 되었지만, 그 당시는 복스워스(Boxworth)의 성직록 소유자였던 존 보이스 (John Boys) 박사와 관련되는데, 그는 번역자로서 일을 하는 동안에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닐까 염려된다. 그의 전기 작가인 앤터니 워커(Anthony Walker)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성서 번역이라는 훌륭한 일을 하도록 제임스 왕을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을 때, 번역자들을 캠브리지(Cambridge)를 위해 선택해야 했을 때, 그는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의해 보내져서, 선택된 사람이었다. (그 일에 참여하는 데 유능하다기보다는 야심이 더 컷을 수 있는) 그 대학교의 일부 사람들은 국가로부터 어떤 도움을 그들이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여 불평하고 경멸하였다.―투스쿨란[움](Tusculan[um])에서의 툴리(Tully)는 로마(Rome)에 있었을 때와 동일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외경의 일부가 그에게 할당되었다는 것을 나는 확신하지만 (그가 번역한 바로 그 부분을 나에게 보여줬으므로), 어떤 부분인지는 유감스럽게도 모른다.

그 자신에게 할당된 부분을 번역하고 있던 기간 내내, 그의 공관은 세인트존스(St. John's)에서 그에게 주어졌으며, 주중 내내 거기에 머물다가, 토요일 밤에 집으로 돌아가서 그의 직무에서 벗어났으며, 월요일 아침에 그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 자신이 맡은 부분을 끝냈을 때, 그 일이 맡겨진 사람의 간절한 요청으로, 그는 두 번째 부분에 착수했으며, 그리고 나서 다른 대학에서 공관에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과 그 집을 거명하지 않겠다.

이 첫 번째 일에 4년이 소요되었다. 전체 일이 끝났을 때, 전체 성서가 캠브리지(Cambridge), 옥스퍼드(Oxford), 그리고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로부터 런던에 보내졌다. 각 집단의 전체 6명 중에서 2명씩 다시 선택하여, 전체 번역을 검토함으로써, 세 개의 사본 중 하나를 선택하여 인쇄하도록 했다.

그 번역본을 급송하기 위해 다운스 (Downes) 씨와 Bois (보이스) 씨를 런던에 올려 보냈다. 네 명의 동료 일꾼들을 (비록 다운스 (Downes) 씨는 데리러 오거나 문장원(紋章院)의 문장관보(補)의 위협을 받기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었지만) 만나서 스테이셔너스 홀(Stationers Hall)로 매일 갔으며, 9개월 후에 그들의 일을 끝냈다. 그들은 이전에는 스스로 보답하는 독창적 근면밖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그 기간 중 스테이셔너스(Stationers)로부터 매주 30씩 지불을 받았다. 이 마지막 작업에 종사하는 동안에 단지 그만이 그들의 진행 사항을 기록하였고, 그 기록을 죽을 때까지 보관하고 있었다.

 

보이스 (Boys) 박사의 전기 작가는 옥스퍼드(Oxford), 캠브리지(Cambridge), 그리고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에는 각각 두 집단이 있어서 전체가 6집단이 되며, 각 집단으로부터 두 명의 개역자들이 스테이셔너스 홀(Stationers Hall)에 가게 되면 그 최종 개역 위원회는 그가 말하는 것처럼 6명이 아니라 12명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40쪽 각주]

데시데라타 쿠리오사(Desiderata Curiosa) 혹은 진귀한 기록물의 수집으로부터. 프란시스 페크 (Francis Peck) 저, 1779년 신판. 8부, 325쪽 이하. ‘그 유명한 그리스어 학자이며, 신학 학사이고, 제임스 1세 시대의 성서의 번역자 중 한 사람인 존 보이스 (John Boys) 씨의 일생. 캠브리지(Cambridge)의 세인트존스 (St. John's) 칼리지의 문학 석사 앤터니 워커 (Anthony Walker) 저. 출판사의 수중에 있는 4° 필사본으로부터. 토머스 베커 씨의 선물.

 

사실, 우리는 개역자들¹ 중 한 사람인 새뮤얼 와드(Samuel Ward)가 속해 있었던 도르트 (Dort) 종교회의에 간 영국의 대표자들의 보고로부터 이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는 것을 안다. 12명으로 이루어진 위원회를 근거로, 39주 동안 매주 30 실링을 지불하면, 지불금의 합계는 702파운드가 될 것이었다. 그 회사에 의해 이 금액이 지불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언급한 ‘성서 재고’의 소유자들의 기부였을 가능성이 큰데, 만약 그 재고의 소유자들이 왕의 특허의 소유자에 의해 모든 절판이나 특정 절판의 경비와 이익의 일부를 공유하도록 승인을 받았을 때만, 그 모든 해 동안에 그 기부가 계속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더라도 그와 같은 지불금은 로버트 베커(Robert Baker)의 사적인 동의의 이행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하며, 성서가 출판되고 나서 40년 후에 베커(Baker)가 ‘번역본이 그와 그의 양수인에게 귀속된다는 조건으로, 수정된 혹은 교정된 성서 번역을 위해 3,500파운드를 실제 지불했다’는 명확한 진술²을 보게 된다. 그 진술이 의미하는 것처럼, 그 금액이 실제 번역자들에게 지불되었다면, 6개 집단의 활동 기간 중에 수행한 작업 각각에 대해 50파운드에서 60파운드 사이를 지불한 것이 된다. 이제, 그 성서의 서문은 그 번역에 대해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72일의 일곱 배의 두 배 이상의’ 혹은 약 2년 9개월의 ‘작업자들의 수고가 들어갔다’고 언급한다. 왕이 번역자들을 위해서 보장하기를 원했던 적어도 20파운드 가치의 성직자 보수에 근거하면, 그 금액은 정확하게 55파운드의 지불금이 번역자들에게 직접 갔거나 그들이 소속된 대학교에 간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숫자는 깔끔하게 산출되었지만, 그렇게 제시된 가정은 매우 불확실하며, 우리는 3,500파운드가 어떻게 지불되었는지 추측할 만한 건전한 근거가 없다. 그 여섯 집단의 활동은 일반적으로 (분명히 예비 모임들이 있긴 했지만) 1607년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음을 유의해 볼 수 있으며, 그리하여 1605년과 1606년은 사적인 연구 조사에, 1607-9년은 6개 위원회의 작업에, 1610년 일부는 12명의 개역자들의 스테이셔너스 홀(Stationers Hall)의 작업에, 그리고 그해의 나머지와 1611년 일부는 인쇄하는 데 할당되었을 것이다.

 

(41쪽 각주)

1. ‘Post peractum a singulis pensum, ex husce omnibus duodecim selecti viri in unum locum convocati integrum opus recognoverunt ac recensuerunt.’

2. 1651년의 윌리엄 볼(William Ball)의 인쇄의 규제에 관한 간략한 논문에서. 1612년 5월 10일에, 로버트 베커는 연장된 특허를 취득했고, 1617년 2월 11일에 그 특허는 살아 있는 동안 그에게, 그리고 그의 사후 30년 동안 그의 아들 로버트 (Robert) 2세에게 다시 주어졌다. 1635년에 계승권이 찰스(Charles) 및 매슈 베커(Matthew Baker)에게 다시 수여되었다. 로버트는 1646년에 사망했으며, 1664년에 이 권리의 반은 1,300파운드의 가치가 되었다. The Library에서 H. R. Plomer(플로머)의 논문 ‘스튜어트 (Stuarts) 왕가 하의 왕의 인쇄소’ 제2집 8권(1901년)을 참조하라.

 

이미 언급한 도르트 (Dort) 종교회의에서의 (1618년 11월 16일자) 보고서로부터 우리는 번역에 대한 끝마무리는 윈체스터(Winchester)의 주교인 빌슨(Bilson)과 후에 글로체스터(Gloucester)¹의 주교가 된 마일스 스미스(Miles Smith)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전자는 개역자들의 위원회의 위원이 아니었지만, 개역자들의 작업은 이어서 ‘주교들과 교회의 최고 학자들에 의해 검토된다’는 것이 햄프턴 코트 회의에서 언급한 왕의 계획의 일부였으며, 다른 주교인 런던(London)의 밴크로프트(Bancroft)는 14개의 변경을 요구했다고 한다. 왕의 프로그램을 계속 이행하여, 번역판이 주교들에 의해 추밀원에 제시되었는지, 그리고 왕권으로 최종 재가되었는지는 말할 수 없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모든 판들의 속표지에 나오는 ‘교회에서 읽혀지도록 지정된’이라는 말뿐만 아니라 그 성서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흠정역’이라는 문구에 대한 근거도 발견된 적이 없다. 그러나 이 점이 1881년의 개정판 당시에 제기되었을 때, 대법관인 셀본(Selborne)은 (1881년 6월 3일자) 타임스(Times)에 사견으로서 기고하여, 만약 그 번역판이

 

(1611년의 속표지에 분명히 기술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 초판 발행 당시에, ‘교회에서 읽혀지도록 지정되었다’면 그것은 추밀원의 명령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만약 그렇다면, 그 명령의 진짜 기록은 현재 상실되었다. 그 이유는 1600년부터 1613년 말까지의 추밀원의 모든 서적과 기록은 1618년 1월 12일의 (O.S) 화이트홀 (Whitehall) 화제로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내 견해로는, 왕의 인쇄업자가 (그자신의 이익의 관점에서든지 아니면 다른 것이든지)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교회에서 읽혀지도록 지정되었다’는 것을 단언하는 속표지와 함께 (전임자의 통치 기간 중 왕의 명령으로 사용하도록 한 이전의 성서들의 결함을 교정하기 위하여 의문의 여지없이 왕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번역판인) 그 성서를 발행하는 책임을 스스로 졌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다.

 

대법관 셀본(Selborne)은 베커(Barker)가 어떤 위험을 무릅썼다는 것을 ‘믿음을 수 없는’ 일로 만듦으로써 고등 판무관 법원과 성실청 법원에 대한 두려움을 계속 언급한다. 그러나 그는 권위가 우호적이었을 때 이루어진 것과 그 반대가 되었을 때 이루어진 것 사이를 충분히 구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1611년 판은 주교들의 성서(Bishops' Bible)의 자리를 대신하도록 발행되었으며, 1585년부터 1602년 (마지막 판) 말까지의 그 성서의 판 속표지에는 ‘교회에서 읽혀지도록 지정되었다’는 말이 인쇄되어 있다. 1584년의 소형 2절판에서는 그 구절이 ‘교회에서 읽혀지도록 지정된 번역의’라고 되어 있다. 그 (1574-8년) 이전에는 ‘허가를 얻어 발행한다’라는 것만이 발견된다. 비록 파커(Parker)는 그 말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했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1568, 1569, 그리고 1572년의 것에는, 그와 같은 효력을 가진 어떤 종류의 말도 전혀 없다.

 

[42쪽 각주]

1. Postremo Reverendissimus Episcopus Wintoniensis Bilsonus una cum Doctore Smitho nunc Episcopo Glocestriensi, viro eximio, et ab initio in toto hoc opere versatissimo, omnibus mature pensitatis et examinatis, extremam manum huic versioni imposuerunt.

 

파커(Parker)는 1569년 케우드(Cawood)에 의해서 발행된 대 성서(Great Bible)의 본문에 이어서 한 판이 나타나기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그것을 ‘교회에서 읽혀지도록 지정된 번역에 따른 것’으로 광고하였는데, 그 자신의 발행본에는 사용하지 않았을 문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교들의 성서(Bishops' Bible)는 대 성서(Great Bible)를 대신하게 되었으며, 그것을 제네바 (Geneva) 성서로부터 구별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지면서, 우리는 저기(Jugge)가 [그리고 1578년의 2절판에서 크리스토퍼 베커(Christopher Baker)의 수탁인들이] ‘허가를 얻어 발행한다’는 말을 사용하였음을 발견한다. 휘트기프트(Whitgift)가 대주교가 되었을 때, 우리는 먼저 1584년의 문구를 보게 되고, 그 다음 1585-1602년의 더 자세한 ‘교회에서 읽혀지도록 지정되고 허가를 받은’ 이라는 문구를 보게 된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이를 정당화할 수 있도록 1584년이나 1585년에 통과된 추밀원의 어떤 명령이 있었다는 것은 결코 주장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1611년에 그와 같은 명령이 있었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은 신뢰할 만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사실 그와 같은 명령은 없었다는 부정적인 증거가 있는데, ‘지정되었다’라는 말은 그를 대신한 ‘허가되고 지정되었다’라는 말보다 상당히 약하기 때문이다. ‘지정되었다’는 말은 그 자체로서 ‘정해졌다’ 혹은 ‘준비되었다’ 이상을 의미하며, ‘교회에서 읽혀지도록 지정되었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그 성서는 교회에서의 사용을 위하여 왕과 주교들의 승인으로 왕의 인쇄업자에 의해 인쇄되었으며, ‘부수가 가장 많은’ 경쟁 판본은 발행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문자적으로 표현한다. 이론적으로 사실에 의한 이와 같은 정당화는 불충분 할 수 있지만, 모든 당사자들이 동의하면 법적 정규 절차는 종종 생략된다.

보이스(Boys) 박사가 그의 생애 끝까지 그렇게 조심스럽게 간직했던 그 기록이 보존되었다면, 개정판의 다양한 단계에서 수행된 일을 단 한 부분이더라도 추적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최종 결과와 서문에 대한 몇 가지 언급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교회 정책이 관련되는 한, 개역자들의 일은 후자(제네바 성서)가 더 정확한 경우는 언제나 주교들의 성서(Bishops' Bible)를 제네바 성서(Geneva Bible)와 조화시키기 위하여 가능한 최소의 방해를 받았으며, 이를 하려는 욕망은 어떤 방법으로든 의미에 영향을 미치는 매우 많은 변경에 대한 설명이 된다. 자존심이 그 사실에 대해 참조하는 것을 막았지만, 개역자들도 라임스 (Rheims) 신약 서문과 주석에서 역설된 이의를 충족시키는 데 관심이 있었으며, 조롱하는 것 외에는 달리 인정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기특하게도 참조했을 뿐만 아니라, 그 번역판으로부터 좋은 것을 많이 취했다. 다른 변경들은 두 개의 새로운 라틴어 성서에 대한 연구에 의해서인데, 그 두 성서는 앤트워프 폴리글로트(Antwerp Polyglott)에서 인쇄된 아리아스 몬타누스(Arias Montanus)에 의한 구약과, 그의 사위인 프란시스쿠스 주니어스(Franciscus Junius)의 외경이 들어 있는 트레멜리우스(Tremellius)에 의한 구약과 신약이다. 그리고 다른 변경들은 프랑스어 제네바 (Geneva) 성서 (1587-8년), 디오다티(Diodati)의 이탈리아 성서 (1607년), 그리고 시프리아노 데 발레라(Cipriano de Valera)의 스페인어 성서(1602년)로부터 왔다. 이 세 가지 외국어 번역은 상당한 주의를 끈 것으로 보이는데, 그 성서들이 서문에 언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셀덴(Selden)에 의한 좌담(Table-Talk)에서 (분명히 12명의 최종 위원회의 모임들에 관한) 다음 내용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임스 왕 당시의 번역자들은 훌륭한 방법을 택했다. [외경이 앤드류 다운스(Andrew Downs)에게 주어진 것처럼] 성서의 일부분은 그 언어에 가장 탁월한 사람에게 주어졌으며, 그러면 그들이 함께 만나서, 한 사람이 그 번역을 읽고, 나머지 사람들은 학술적 언어나,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등의 특정 성서를 손에 쥐고 있다. 어떤 결함을 발견하면 그들은 이야기를 했고, 결함이 없으면 계속 읽었다.

 

표현의 경이로운 적절성은 의미가 정해지고 각 구절에서 중요한 단어들이 선택된 후에 12명의 위원회나 두 명의 최종 개역자들이 번역에 그들의 솜씨를 더하는 손재주에 귀착되는지, 혹은 가능성이 더 크게 보이는 것으로, 틴들(Tyndale)과 커버데일(Coverdale)에 의해서 처음으로 존재하게 된, 모든 변경 후에 그 자체를 거듭 주장하는 리듬이, 다만 힘과 멜로디를 언어의 계속 증가하는 풍성함으로부터 모으는 것인지는, 아무도 구별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이라고는 리듬과 힘과 멜로디가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단지 개역판인 1611년 성서는 스테이셔스의 등록부에 기입되지 않았고, 발행된 달에 관한 어떤 정보도 우리는 가질 수 없다. 원래의 형태라면, 그 성서는 깔끔하고, 잘 인쇄된 책이었으며, 분명히 새로 주조된 활자로 판을 만들어 깨끗하고 분명한 인쇄가 되었으며, 좋은 종이에 인쇄되었다. 그 성서는 ‘리치몬트(Richmont)에서 C. 보엘 (Boel) 그림’이라는 서명이 든 조각판으로 인쇄한 속표지로 시작하는데, 즉, 그림은 앤트워프(Antwerp)의 화가이며, 그때쯤 여왕과 엘리자베스 (Elizabeth) 공주, 그리고 헨리 (Henry) 왕자의 초상화를 그렸던 코르넬리스 보엘(Cornelis Boel)이 그렸다. 위의 성인들 패널에는 베드로(Peter)와 야고보(James)가 앉아서 그 안에 어린양에 대한 묘사가 들어 있는 구형 틀을 그들 사이에 잡고 있다. 그 옆에는 성인들인 마태(Matthew)와 마가(Mark)가 있다. 표제 양 옆에는 모세(Moses)와 아론(Aaron)이 벽감 속에 서 있다. 발치에는 성인들인 누가(Luke)와 요한(John)이 앉아 있으며, 그들 사이에는 펠리컨이 새끼를 먹이고 있는 그림이 든 또 다른 구형 틀이 있다. 표제는 다음과 같다:

 

‘성서, 구약과 신약 포함. 원어로부터 새로 번역하다: 이전의 번역판들과 부지런히 비교하여 폐하의 특별한 명령에 의해 개역하다. 교회에서 읽도록 지정되다. 런던에서 국왕 폐하의 인쇄업자인 로버트 베커(Robert Baker)에 의해 인쇄되다.’

 

2쪽과 3쪽 상반부는 헌정사가 차지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심히 높으시고 권세 있는 통치자이시며, 대영 제국과 프랑스 그리고 아일랜드의 왕이시며 신앙의 옹호자이신 제임스 왕에게’; 3쪽 하반부에서 8쪽까지는 ‘번역자들이 독자에게’ 라는 제목의 서문이 차지하고 있고; 9-14쪽은 달력이 차지하고 있으며; 15쪽 상반부는 1603년부터 1641년까지의 39년의 책력이 차지하고 있고; 15쪽 하반부는 ‘부활절을 영원히 발견하기 위하여’라는 지침이 차지하고 있으며, 16쪽에서 18쪽 상반부까지는 아침과 저녁 기도에서 사용되는 시와 교훈들이 표현되어 있는 표 및 목록과, ‘이것들은 다른 날이 아니라 축제일을 위해 지켜야 한다’는 제목의 표가 차지하고 있고; 18쪽 하반부는 구약과 신약의 모든 책들의 이름과 순서가, 그 책들의 장들의 숫자와 함께 차지하고 있다. 서문 이후에, 즉 18쪽 이후나 다른 곳에 제책공이 임의로 삽입한 것은 보통 성경의 계보에 관한 18쪽과, 이면에 인쇄되어 거명된 장소들의 표가 있는 가나안(Canaan)의 지도가 포함된 한 장이다. 1610년 10월에, 존 스피드(John Speed)는 장식적으로 인쇄했지만 소용없는 계보를 모든 성경 판에 10년간 실을 수 있게 하는 특권을 왕으로부터 획득했으며, 그리하여 책값이 한권에 6펜스로부터 2실링으로 크기에 따라 불필요하게 증가했다. 일부 성서에는 계보가 백지로 시작되고, 어떤 성서에서는 Cum Priuilegio Regiæ Maiestatis라고 써넣은 정교한 왕의 문장 삽화가 들어 있다는 것을 언급해 볼 수 있다.

성서 본문은 검은 글자로 인쇄되었고, 삽입된 말은 작은 로만체이며 (지금은 이탤릭체임), 또한 로만체는 각 장 머리에 있는 개요와 각 페이지의 상단에 있는 표제 주제 및 난외 병렬 구절의 참고를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난외의 변경 표현은 이탤릭체이다.¹ 본문은 괘선으로 봉함된 이중 칸 안에 인쇄되었고, 첫머리 장식 도안과 소수의 장말 (章末) 장식 컷 및 각 장의 서두와 시편은 대문자로 되어 있다. 처음에는 책의 서두의 대문자는 본문 9줄 깊이를 차지하도록, 제1장 이후의 각 장의 시작은 5줄 깊이를 차지하도록 계획한 것이 분명하지만, 시편에서의 대문자 행진은 4-5줄 블록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배열이 더욱 자주 교란되었는데², 그것은 여전히 정상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우측 페이지에서 시편(과거에 시편을 분할한 5부분 중 하나)을 시작하기 위해서, 그 앞 페이지는 백지로 남겨두었으나, 구약 전체를 통하여 인쇄상의 중단은 없다. 신약은 별도의 속표지를 가지고 있는데, 이전에 주교들의 성서(Bishops' Bible)에서 사용된 목판화가 들어 있다. 신약은 또한 새로운 인쇄술적 출발점을 취하고 있다. 신약 전체는 2장, 혹은 4페이지로 된 366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23첩 혹은 접지 맞추기로 집단화되어 있고, 다음의 글이 들어 있다:

서문: A-D.

구약: A-Z, Aa-Zz, Aaa-Zzz, Aaaa-Zzzz, Aaaaa-Ccccc.

신약: A-Z, Aa.

 

[45쪽 각주]

1. 병렬 구절에 대한 변경 표현과 참조는 여섯 집단들의 작업일 가능성이 있다. 장의 개요와 표제 주제는 일반적으로 2명의 최종 개역자들의 일로 돌려진다. 후기 판에서는, 장의 개요에 바탕을 둔 표제 주제는 일반적으로 인쇄자의 원고 판정자의 처분에 맡겨졌다.

2. 신약에서, 주교들의 성서(Bishops' Bible)에서 사용되어 비난을 받았던 신화적인 10줄 세트 두 개가 마태와 로마서의 서두에 다시 등장하며, 글을 쓰고 있는 복음서 저자의 소형 그림 대문자는 성 누가와 성 요한에 의한 복음서의 서두에 나온다.

 

전자는 단지 한 장이고 후자는 단지 두 장인 서문의 B와 D를 예외로 하면, 각 첩은 3장 혹은 6쪽으로 규칙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 전체는 동질이며, 다양한 부분을 동시에 작업한 것이 아니라, 책 자체의 순서대로 조판하여 인쇄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소위 두 번째 발행본은 원판의 몇 장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구별되는 별도의 판인데, 실수로 인쇄된 하나의 불필요한 숫자를 그 안에서 사용하는 것이 때때로 발견된다. 현재 재 인쇄를 통해 생산되는 성서는 바로 이 첫 번째 본문이다.

 

Ⅲ. 1611년 성서의 후기 역사

 

살펴본 바와 같이, 영국의 모든 교구는 1541년에 지체되는 한 달마다 40실링의 벌금이라는 처벌로 제책하지 않은 것은 10실링이고 제책한 것은 12실링인 ‘대형판’ 성서를 비치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속표지 상의 ‘교회에서 읽혀지도록 지정되었다’가 표명하는 바와 같이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매우 단정적인 말과는 달리 (예를 들어, 바로 그 성서에 나오는 ‘이것들은 다른 날이 아니라 축제일을 위해 지켜야 한다’와는 다르게), 번폐스러운 신속함으로 책들을 구입하는 데 교구들을 가담시키는 추밀원 명령이 있었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 발행된 해에 워체스터(Worcester)의 주임 사제와 참사회는 2파운드 18실링을 주고 ‘새로 번역된 대 성서(Great Bible)’를 구입했는데, 제책한 그 책값은 대성당에서 사용하기에 충분히 좋았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다. 1641년에 인쇄된 책으로부터 [마이클 스파크(Michael Sparke)의 Scintilla] 우리는 교회 성서의 값은 최근에 30실링에서 40실링으로 올랐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이전에는’ 25실링에 제책되지 않은 책이 판매되었고, 거기에 제책비가 부가되었다. 금액이 아무리 적더라도 모든 교구에 이와 같은 비용을 강요하는 것은 평판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그렇게 하는 것은 득책이 못되었고 불필요했을 것인데, 득책이 못되는 것은, 그 문제를 서두르는 것이 그 서문이 매우 적극적으로 거부한¹ 주교들의 성서(Bishops' Bible)에 대한 심한 비방을 시사했기 때문이고, 불필요하다는 것은, 우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성서의 보급은 규제되고 통제되는 것이어서, 오래된 교회 성서가 낡아지면 1611년판의 새로운 성서로 불가피하게 대체해야 했기 때문이며, 대형 2절판으로서 구입할 수 있는 다른 성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46쪽 각주]

1. 참으로 (선량한 그리스도인 독자인) 우리는 처음부터 새로운 번역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으며, [우리 국민은 포도주 대신에 용의 쓸개즙을, 우유 대신에 유장을 흠뻑 먹었다는 당시의 식스투스(Sixtus)의 비난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좋은 것을 더 좋은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재의 캔터베리 (Canterbury) 대주교가 1881년 6월호 맥밀런의 잡지(Macmillian's Magazine)에 기고한 영어 성서의 허가에 관한 흥미 있는 논문에서 우리는 다음 내용을 보게 된다:

 

1612년부터 1641년 사이의 24개[25개?]의 질문 가운데서, 13명의 주교와 부주교는 ‘최신판 성서’ 혹은 ‘마지막 번역’에 대해 질문한 반면에, 12명은 1611년 이전의 질문의 일반적인 형태였던 것과 일치하게 ‘가장 큰 책’에 대해서만 질문했다. 후자 중에는 링컨(Lincoln)의 네일 (Neile) 주교(1614년)와, 링컨(Lincoln)의 윌리엄스 (Williams) 주교 (1631년), 치체스터(Chichester)의 더파 (Duppa) 주교 (1638년), 런던(London)과 요크 (York) 및 콜체스터(Colchester)의 부주교들(1640년)이 있다. 1616년에 런던을 방문한 에벗 (Abbot) 대주교는 ‘가장 큰 책의 전체 성서’에 대해서만 질문했으나, 3년 후에 캔터베리(Canterbury)의 감독 관구를 방문하여 그는 ‘최근 국왕의 허가로 발행된 새로운 번역 성서’를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그러나 1634년에 감독 관구를 방문한 로드 (Laud) 대주교는 그의 전임자들이 채택했던 형식에서 벗어나 ‘가장 큰 책의 성서 전체’에 대해서만 질문을 했다.

 

이처럼 주교들이 일체가 되어 (일부는 분명히 다른 사람들보다 더 절박하였음) 추구한 것으로 보이는 인내와 조용한 통찰의 원칙과, 서지학적 증거는 온전히 일치한다. 교회의 입장에 대한 오해는 일부 서지학자들이 길을 잃는 원인이 되었으며, 그래프튼(Grafton)과 휘트처치(Whitchurch)에서 1540년과 1541년에 공급해야 했던 것처럼 20,000권이라는 수요를 맞추기 위해 1611년에 두 가지를 동시에 인쇄한 것으로 상상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20,000권이라는 수요와 두 가지 발행은 모두 상상에 의한 것이다. 1611년에 완성된 첫 번째 판 후에, 완전히 새로운 판이 착수되어, 그 대부분이 발행된 것은 1613년이며, 또한 그 해에 교회의 사용을 위해 소형 활자로 된 2절판 재판본이 나타났다.¹ 가장 큰 활자로 된 제3판은 1617년에 발행되었고, 제4판은 1634년에 발행되었으며, 제5판은 1640년에 발행되었다. 만약 1611년에 모든 교구가 한 권을 취득했다면, 1613년과 1617년의 새로운 판에 대한 수요는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재판본이 나오기 전에 17년의 간격이 있었다는 것으로부터 1617년 판은 필요한 공급을 실질적으로 충족시켰다는 것도 분명하다. 만약 그렇다면, 각 판은 많아야 5,000권이었을 것이다.

나타난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성서들의 경우에, 동일한 크기의 모든 판들은 상응하는 매 장의 내용이 동일하면, 그 장은 교환할 수 있도록 인쇄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여 재 인쇄 시에 정정을 했을 것이며, 재판본들은 서로 매우 밀접히 이어져, 줄과 줄은 대부분 연결되었으며, 장과 장은 언제나 연결되어, 주의 깊은 대조에 의해서만 이어지는 판본과 구별될 수 있게 되었다.

 

[47쪽 각주]

1. 한 칸에 59줄 대신에 72줄을 인쇄함으로써, 그리고 상응하는 측면을 절약함으로써, 장들의 숫자는 732에서 508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인쇄자가 이와 같은 마련을 한 목적은 한 판에 대한 요구를 넘어서 과도하게 인쇄했던 장들을 다 사용함으로써 다음 판을 위해 더 적은 숫자의 책을 인쇄하기 위한 차원이 낮은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거의 소진된 판의 어떤 장들이 사고로 망가지면, 그 특정 장을 다음 판 이전에 인쇄함으로써 한 조판이 두 가지 목적에 기여하게 하는 것이다. 잘 관리되는 인쇄소에서는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종류의 사고가 자주 재발하지 않지만, 그러나 베커(Baker)의 인쇄소는 잘 관리되지 않았으며, 그의 생애를 채무자의 교도소에서 끝내게 한 지루하게 긴 소송들 중 하나에서 한 그의 항변으로부터 우리는 1616-18년경에 그는 흠이 있는 책들을 공급한 데 대한 배상금으로 서적상들에게 200파운드 이상의 빚을 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¹

1611년이 끝나기 전에 새로운 성서의 초판 재고는 두 번째 판을 착수해야 할 정도로 줄어들었다. 제목 인쇄를 위한 조각판은 이때쯤 많이 낡아져서 (틀림없이 조금 망설인 다음에) 베커(Baker)는 그 후 목판 가장자리를 선호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신약의 전체 표제에도 사용되었다. 그가 이제 인쇄를 진행한 그 판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독특성을 설명하는 가장 쉬운 가정은, 신약에서 발견되는 1611년이라는 시점을 수요가 있기 얼마 전인 그 해 안에 꼭 인쇄해야 했다면, 첫 번째 판의 미완성 책들을 완성하기 위하여 그는 먼저 표제가 들어 있는 장과, 다양한 이유로 다른 몇 장을 재인쇄한 다음, 나머지의 재 인쇄에 착수하여 그를 완성하였다는 것이다. 이 일이 급박하게 되기 전에 그의 창고에 중대한 사고가 일어나서, 그 책의 한 부분, 즉 Aa-Zz 및 Aaa-Zzz라고 표시된 첩의 재고 상당 부분을 (138장 중 약 119장)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나머지의 사전 인쇄 부분 중 일부이며 별도의 장소에 보관되었을 것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몇몇 장²은 사라졌지만, 그 나머지의 재고는 두 번째의 재 인쇄에 의해 완성된 다음 그 창고의 사정에 따라 저장되었다. 1613년경에, 소형 숫자가 1611년에 인쇄된 것으로 보이는 [베커(Baker)는 처음에 원래의 동판³을 다시 조각하려고 했을 것이기 때문에] 표제 장의 재고는 고갈되었으며, 그 장을 당시 재 인쇄하였기 때문에 1613년이라는 시점이 들어갔다. 이어지는 3, 4년 동안에 판매된 책들은 두 자리 및 세 자리 접지 번호(Aa 및 Aaa 등)가 들어 있는 장들에 대한 두 가지 인쇄의 너무나 많은 결합을 보여주는 데, 약 20개로 이루어진 한 그룹을 제외하면 두 개의 인쇄는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

[48쪽 각주]

1. The Library(제2집 2권 p. 353-375)에서 H. R. Plomer(플로머)의 ‘스튜어트 (Stuarts) 왕가 하의 왕의 인쇄소’에 관한 논문을 참조하라.

2. 즉 (아마도) Aa1, Ff2, Gg1, 2, Kk1, Tt1-3, Aaa2, Bbb3, Iii2, Lll1, Ooo2, 3, Qqq3, Sss1-3, Zzz3.

3. 1613년의 주된 교회용 2절판(72줄)의 매우 소수의 책들에서 조각판 표제가 발견된다는 것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러한 것들 중 적어도 하나에는 조각판 표제가 분명히 삽입되어 있다. 하지만 도판이 존재하는 한 긴급한 경우 책을 완성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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