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딤후2:15)

그리스도의 복음

양심의두려움을덮으려는인생

  • 관리자 (ehompy0429)
  • 2014-05-23 14: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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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양심․복음 6 - 양심의 두려움을 덮으려는 인생  
 


6. 양심의 두려움을 덮으려는 인생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에이프런 Aprons-앞치마)를 하였더라”(창 3:7)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그들은 즉시 양심의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가리려고 시도한 것이 무화과 잎으로 앞치마를 만들어 입었는데 그것이 최초의 종교였습니다. 앞만 가리운 그 치마는 손으로 엮어 피 없이 만든 자신의 노력이었습니다. 과연 그것이 두려운 양심의 죄를 덮어 줄까요?

그러나 그들 가슴속의 양심의 두려움은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나, 내가 벌거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9-10)

그들이 치마를 엮어 부끄러움을 가려 보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아무 쓸모없게 되고 두려워서 숨었다는 솔직한 고백을 할 수 밖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창출해 낸 무화과 잎같은 모든 종교적인 행위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머리털만큼도 덮어주기 못하며 죄가 드러나는 심판 날에는 모든 부끄러운 죄들이 소리치고 고발할 것입니다. 외적인 종교 형태로는 양심의 두려움이 쉴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생의 모습은 같은 형태로 끝없이 무화과 치마를 가지고 수치를 가려 보려고 되풀이되는 인류역사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 14:12-13)

그러나 아담에게 든든하고 안전한 가죽옷(코트 Coat-외투)을 하나님이 지어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은 한 마리 양의 생명이 희생됨으로 만들어졌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종교로는 만족치 못하고 두려움에 떠는 자들이 튼튼한 가죽옷 되시는 예수님 안에 있으면 얼마나 안전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예복을 입은 손님들을 보십시오(마 22:1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들은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성령님을 따라 행하느니라.”(롬 8:1)

“너희 중에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또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일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시려 함이니라.”(히 2:15)

사람이 태어난 목적이 바로 예수님 아니에 쉬기위해 살아가지만 생애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하면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人生이란 영원한 삶을 위한 잉태기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독자 여러분은 주님의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그에게 말하기를, ‘친구여, 그대는 어찌하여 혼인 예복도 입지 않고 여기에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말도 못하니라.”(마 22:12)

 

 

 

떠나버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어둠이 빛 앞에 와서 자신의 몰골이 노출될 때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것이 인간 본성입니다(요 3:19-21).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양심속에 주님의 빛이 들어올 때 부끄러워 그 앞을 떠나 어둠으로 피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동생을 죽인 가인의 양심에는 하나님의 빛이 들어왔을 때 그는 스스로 피하여 떠나버림으로 구원의 기회를 상실했었고 떠나버린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아니했습니다.

“보소서. 주님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 즉 내가 주님의 면전에서 숨기워질 것이요. 내가 땅에서 도피자요 유랑자가 되리오니,”(창 4:14)

동생을 죽이고도 태연자약했던 가인의 양심에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 4:9)는 음성을 듣고도 반응이 없다가 결정적인 빛에 잠자는 양심이 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 내게 호소 하느니라”(창 4:10)

그러나 가인과 그 후손들은 양심의 가책을 피하여 하나님의 면전을 떠나 성을 건축하고 육축을 기르고, 기계를 만들고, 악기를 만들어서 다른 방법으로 양심의 소리를 덮어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오늘날 인격을 파괴하는 록음악을 만들게 했고 인류에게 가공할 살인 무기만 제공했던 것입니다(창 4:16-22).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주 예수님 앞에서 양심의 소리에 순응하여 나는 어찌할꼬!,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27)하고 고백하면서 겸손히 주 앞에 죄를 자복했더라면 간음한 여자와 동시에 속죄함을 받았을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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