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딤후2:15)

그리스도의 복음

다 이루었다

  • 관리자 (ehompy0429)
  • 2014-05-23 14: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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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11월 4일, 주의 날 저녁, 브라이튼(Brighton)의 갈리드 교회에서의 설교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 신 포도즙을 받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것을 다 이루었다, 하신 후에 머리를 숙이시고 숨을 거두시니라.”(요19:30)

그리스도를 보고, 그리하여 그분을 전파하도록 임명이 되기 전에는 아무도 그리스도에 관해서 적절하게 전파할 수 없다. 보라, 모든 광경 중의 그 광경을;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그 광경을; 교회를 영원히 그 열매에 의한 찬양으로 가득 채우는; 천천이요, 만만인 천사들로 하여금 그분에게 모든 영예와 찬양과 영광과 힘과 권세를 영원히 돌리게 하는; 그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고, 나타나셨던 그 광경을. 그 광경은 다음과 같은 말에 들어 있다. “그것을 다 이루었다, 하신 후에 머리를 숙이시고 숨을 거두시니라.”

우리는 죄인들이다. 우리에게는 지옥이 합당하다. 예외 없이 우리는 지옥이 합당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분노를 초래했다. 우리는 그분에게 갚을 수 없는 빚과 우리가 드릴 수 없는 순종을 빚지고 있다. 우리는 그분에게 사랑을 빚지고 있으면서 우리는 그분에게 증오를 드린다. 우리가 그 아래 태어나서 살다가 범하는 법은 이렇게 말한다.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기 위하여 항상 그것들 가운데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누구든지 다 저주를 받는다.”(갈라디아서 3:10).

이것은 우리 자신의 죄와 관련된 비참하고, 절망적이며,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하늘로 가기를 바랄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가 허물없이 하나님 앞에 설 것을 기대할 수 있는가? 심판 날에 일부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그분의 말씀을 들어보라.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자들아, 세상의 기초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그 왕국을 상속받으라.”(마태 25:34). 죄인들이여, 당신이 어떻게 이것을 기대할 수 있는가? 만약 당신이 이 일을 기대한다면, 그와 같은 당신의 기대의 근거는 무엇인가? 만약 당신이 기도한다면, 어떻게 감히 기도를 할 수 있는가? 어떤 이름으로 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당신은 축복을 요청하는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대답은 그 말에 들어 있다.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라는 말은 일을 다 했다는 것을, 즉 큰일을 성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이상 해야 할 일은 없으며, 따라서 다 이루신 그분은 여기에 더 이상 머무르실 이유가 없었다. 하려고 오신 그 일을 다 했기 때문에 그분은 하늘로 가셔서, 높아지셔서, 영광스럽게 되는 일을 충족시키셨다. 그 일은 무엇인가? 그 일은 최악의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 죄인들을 의인(義認)하는 것, 타락한 사람들을 깨끗이 하는 것,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것, 어리석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약한 사람들을 부양하는 것이며; 그들을 모든 난관 중에 도우며 모든 고통을 극복하게 하는 것, 마지막 원수를 죽이고, 이 일에 관심이 있는 축복을 받은 사람들을 그분 자신에게 있는 영광 속으로 마침내 데려가는 것이다. 이를 말하는 데는 1분도 걸리지 않지만, 그 일을 하신 분을 경하하고 축복을 하는 데는 영원도 짧은 시간이 될 것이다. 그 일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의 체현(體現)이 관련되는데, 인간이 구원의 대상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저주를 받았고 인간은 죽어야 한다. 인간은 죄를 지었고 인간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 인간은 율법을 범했으나 인간은 그 법에 복종하고 그 법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우리가 믿음으로 사랑하는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신 분을 본다면, 우리의 눈은 그분에게 끌릴 것이고, 우리의 마음은 그분에게 고정될 것이며, 그분을 만 명 가운데 가장 뛰어나신 분으로, 전적으로 사랑받는 분으로 여길 것이다(아가 5:10,16).

우리는 죄를 지었다.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큰일에 착수하셨는가? 이것은 살아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과 믿음, 생각과 기도를 차지해 온 의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약함을 동정하시고 그들에게 새로운 보증을 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영에 의해 그것을 알기를 원하고, 알고 있기를 바라며, 또 다시 알기를 원하고, 또 다시 알고 있기를 바라며, 반복해서 다시 보증이 되기를 원한다. 그 의문은 우리가 이 능력 있는 일을, 이 감추어진 일을 조금 바라보게 한다. “크고 능력 있는 일들을 네게 보이리라.”(예레미야 33:3). 이 구절의 “능력 있는” 이라는 말의 난외주 해석은 “숨겨진” 일들이다. 내려오신 분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그분은 우리의 본질을 그분의 거룩한 존재와 결합되게 하셨다. 오! 얼마나 놀라운 주제인가? 그에 대한 인간의 보잘것없는 생각은 곧 표현되어 고갈된다. 주제 그 자체가 하늘의 영원한 경이이고, 교회의 영원한 경이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이며, 구원된 죄인들의 모든 기도의 대상이다. 만약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 경이로운 신-인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당신은 역량이 있는 분을, 하나님이 그에게 하라고 주신 이 능력 있는 일을 할 역량이 있는 분을 볼 것이다.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하느니라.”(요한 5:17)라는 말은 그분 자신의 말씀이다. 그 일은 편의를 위해 이와 같은 이중적인 방법으로 언급되었을 수 있다. 먼저, 절대 복종의 일; 그리고 두 번째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희생의 일. 우리가 이 두 가지 점을 본다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이것이 마음과 양심에 알려지게 되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먼저, 복종의 일이 있다. 복종이란 복종을 해야 하는 법이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이 법에 복종할 수 있는가? 그분은 인간의 본성을 취하셔서 법에 복종하실 수 있게 되고 복종하셨다. 그분은 복종하게 되셨다. “고난 받으신 일로 순종하심을 배우셔서.”(히브리서 5:8). 그분은 인간의 죄를 지고 인간의 의무를 이행하도록 법아래 들어가셨다. 그분은 우리가 했어야 했으며 하지 않은;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며 할 수 없는 의무를 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가 계약을 했으며 면제받을 수 없는 큰 빚을 갚기 위해 법아래 들어가셨다. 복종에는 확실히 법이 관련되며, 그리스도는 오셔서 법아래 들어가셨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신 것은”(갈라디아서 4:4),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는 처녀 탄생을 가르친다. “율법 아래 있게 하신 것은”은 그 법을 지키기 위해 그분이 기꺼이 복종하시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그분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오히려 이루려 왔노라.”고 말씀하셨다(마태 5:17). 무효로 하기 위해, 없는 것으로 하기 위해, 그분 자신의 법을 폐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아니며, 법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분이 말씀하신 것은 경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분은 한 법을 주셨고 그분은 그 법이 존중되도록 하신다. 우리는 그 법을 경시했고 위반했다. 구원자가 내려오셔서 그분의 아버지에게 말씀하신다. “주님의 법이 내 마음 한 가운데 있나이다.”(시편 40:8).
하나님의 법은 아담의 마음에 있었으며, 그 법의 일은 우리의 마음에 있다. 아담의 마음에 있었고 우리의 마음에 있는 이 법은 충족되어야 하고, 기꺼이 우리를 구속에서 해방시키며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을 감하고, 우리에게 미소를 짓는다면, 그러면 그 법은 모든 세부 사항까지 충족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그리스도는 죄인이 아니셨지만 오셔서 자신을 정확하게 죄인의 상태에 두신 것은, 그리고 그분이 교회의 모든 의무와 빚을 기꺼이 떠맡으시고, 교회를 위해 복종을 하신 것은, 무미건조한 사색이 아니라, 복음의 진정한 진리이다. 복음은 여기 나의 친구로 있다.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과 맺으신 계약에 의해 지옥으로부터 나오게 된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그 지옥으로부터 훌륭하게 나오게 된다. 율법은 책망을 하면서, 너는 네가 하지 않은 복종을 빚지고 있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보증물이 나를 위해 율법에게 주어졌으며,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복종하셨고, 체현한 신이 나를 위해, 의를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셨으며, 나는 믿음으로 그 의를, 그 영광스러운 석방을 받았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것은, 그리고 율법은 그분에게서 그 모든 영예를 받았다는 것은 살아 있는 믿음의 전부이다.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주셨으며; 우리에게 부과된 모든 복종의 행위를 그분은 절대적으로 주셨고; 어린 때로부터 계속 그분은 그분의 자녀들 대신에 이 축복되고, 올바르며, 좋은 율법에 온전히 복종하셨으며, 따라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다. “내가 항상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을 행한다.”(요한 8:29). “그분은”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죄를 그 비참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은 반드시 경험해야 하며, 죄를 그 죄의식과 응분의 벌 가운데서 그분은 반드시 알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분을 죄로 삼으셨기” 때문이다(고린도후서 5:21). 이 얼마나 엄숙한 헤아림인가! 믿음에 의해서 우리는 마치 율법을 범한 저주를 실제로 진 것처럼 그분의 영혼에 지워진 죄의 짐을 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원하는 희생으로서 그분을;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생명을 내 주신 것을; 그리고 그분의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하여 이를 행하는 그분을 볼 수 있다면, 그러면 우리는 영원한 사랑, 영원한 지혜 및 전능의 어떤 것을 반드시 볼 수 있다. 율법의 저주는 명목적인 것이 아니라, 끔찍한 현실이다. 율법의 저주는 하나님의 분노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불쾌이고; 율법의 저주는 하나님의 칼이며; 율법의 저주는 하나님의 지옥, 즉 하나의 상태일 뿐만 아니라 후에는 한 장소인 지옥이다. 율법의 저주는 이 모든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율법의 저주를 확신하면서 그에 대한 약간의 매우 적은 개념을 가지지만, 사랑받는 구원자, 대속주; 그분은 율법의 저주의 전체 개념을 가지신다. 형벌적 분노라는 말의 모든 것을, 율법의 저주라는 말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주 예수님께서 경험하신 모든 것을 가지신다.

믿음으로 우리가 이 필적할 것 없는 비애의 장면을 올바르게 조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무심한 마음을 감동시킬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지은 죄를 유감스럽게 생각하게 할 것이다. 율법의 저주는 하나님이 그분을 오셨던 그분에게로 버리는 것이 포함된다. 생각해 보라. 율법의 저주가 영원히 죄인을 붙잡을 때는 언제나, 그 죄인은 영원히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다는 것을. 한 번의 미소도, 한 번의 사랑의 응시도, 한 번의 방문도 죄인은 결코 가질 수 없으며, 그리고 그 저주가, 그 지속성, 그 현실성 및 그 끔찍함과 관련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떨어졌으며, 그분은 그 저주를 다 마셔버렸다. 우리에게는 지옥이 합당하며, 그분은 그 지옥을 견디셨다. 루터포드(Rutherford)는 “그리스도는 무구한 지옥을 경험하셨다”와 같은 말을 한다. 처벌은 무구하지만, 처벌받은 죄인은 무구하지 않다. 처벌은 거룩하지만, 처벌받은 사람은 부정하다. 하나님에 의해 가해진 것으로서의 처벌은 정당하며 이 모든 것은 사랑하는 구세주의 고통을 의미한다. 율법은 범해져서는 안 되며; 저주는 보류되어서는 안 되고, 알려져야 하며 느껴져야 한다. 죄인이여, 당신은 저주가 당신에게 합당하다는 것을 깨달았는가? 어느 정도든 당신은 저주가 합당하다는 것을 믿고 느낀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은 범해진 율법에 대해 하나님이 당신에게 선언하신 판결에 대해 그분을 정당화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 본 적이 있는가? 오! 그러면, 비길 데 없는 사랑과 비애, 비탄과 슬픔, 수치와 치욕 및 죽음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오고 있는 장면을 보라. 우리 중 어떤 사람을 위해 이것들이 그에게 왔다면, 그리고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서 가져가셔서 그분의 사랑하는 체현된 아들에게 놓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산다면,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영원한 자비인가!

주 그리스도는 그분이 겟세마네 동산에 계실 때 이 저주를 즉시 느끼기 시작하셨다. 저주는 항상 그분에게 있었는데, 그 이유는 전가에 의해서 죄가 항상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분이 고통을 당하실 날과 시간이 다가오면서, 그분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가셨다. 주 예수께서 그분의 영혼에 그리고 그분의 마음에 가졌던 비통의 장면에 대한 그 이야기로부터 그분이 곧 당하실 어떤 매우 무겁고 예리한 염려가 매우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분은 하나의 잔을 보셨고, 그분은 그 잔을 그분의 아버지로부터 받으셨다. 그분은 자신의 인간의 뜻을 그분의 아버지의 거룩한 뜻에 양보하셨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한 18:11). 그분의 고뇌는 너무나 컸고, 그분의 고통은 너무나 격렬해서, 큰 핏방울이 땅에 떨어지는 것처럼 땀을 흘리셨다고 되어 있으며, 그분의 인성은 너무나 지쳐서 한 천사가 하늘에서 보냄을 받아 그분의 힘을 강하게 했다. 이것은 가엽고 죄 많은 나를 위해서였는가? 그것은 죄인인, 죄가 있을 뿐인, 당신을 위해서였는가?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고, 고통을 겪으시고, 죽으셨는가? “다 이루었다.” 우리는 전형과 그림자와 의식을 노래한다.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그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대형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전형을 그분 자신에게서 실현하셨다. 주님께서 계획하셨던 오게 될 모든 좋은 것들의 그림자를 이제 그분은 온전해지게 하셨다. 전체 몸이 그리스도의 것이지만, 모든 것보다 뛰어난 것은 그분이 교회를 구원하는 일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그분이 죄인들을 대속하는 일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그분이 공의를 충족시키는 일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그분의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는, 그분의 백성에게서 죄를 제거하는, “점”이나 “주름살”이나 그와 같은 다른 것이 없이 하나님 앞에 그들을 데려가는 그 일을.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도록 보내심을 받고 하기로 자원했던 일을 어떻게 아셨으며, 그분의 모든 마음과 그분의 모든 영원한 사랑과 은총과 자비를 통해 어떻게 그 일을 하셨으며, 그분께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는가? 나는 그분께서 그분을 버리셨던 그분의 아버지께로 돌아감으로써, 하나님의 미소가 그분에게 주어졌고, 그분께서 암흑 가운데서 죽지 않았다는 것을 그분의 영혼의 모든 행복과 평화 속으로 흘러들어감으로써 알게 되었다고 믿는다. 나는 완전히 정복되도록 율법의 저주에 의해서 갈기갈기 찢어지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분께서는 정복자이셨고, 그분께서는 죽으심으로써 죽음을 멸하셨으며; 가져감으로써 율법의 저주를 없애버리셨고, 죄에 대해 대속하심으로써 죄를 제거하셨다. 그리고 모든 일이 이루어졌을 때, 그분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 전에 이 중요한 말씀을 하였으며,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것을 그분의 영혼의 경험으로 아셨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그분에게 요구하실 것이 더는 없으셨으며, 저주는 소멸되었고, 공의의 칼은 칼집에 꽂혔으며 그분의 거룩한 피로 만족하고 살찌게 되어서, 이루어야 할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그리하여 그분은 기쁨의 노래를 부르셨다. “다 이루었다.” 그분께서는 허물을 끝내셨으며, 죄를 종결지으셨고, 영존하는 의를 가져오셨다 (다니엘 9:24).

하늘이 이에 연루되는데, 왜냐하면 사랑받는 구속자께서 “다 이루었다” “머리를 숙이시고 숨을 거두시니라.”는 말은 모두를 위해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숨을 거두시니라”는 학자들이 “그의 영을 떠나게 했다”는 식으로 번역한다. 내 판단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자진적인 성격이 이 세상에서 “그분의 영을 떠나게 했다.” 그분께서는 자진해서 죽으셨다. 우리는 그렇게 죽지 않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의 죄인들을 대신해서 자진해서 죽으셨으며, 이것은 대속이 그분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효력은 그 죽음의 자진성과 관련이 있다. 주님께서 이 사실을 우리가 간직하도록 도우실 것이다. 만약 그분께서 신체적 필요를 위해 죽으셨다면, 그분의 죽으심에 따르는 아무런 공적도 없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분은 대신하여 죽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대신하여 죽으셨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아버지가 죽으라고 그분께 명령하셨기 때문에 죽으셨다. 그분의 아버지에게 제사장의 신분으로 희생으로 바치시기 위해서 그분은 육신을 입으셨고 대신해서 죽음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이 짧은 말, “다 이루었다”는 한 영원하고 축복된 진리를 가르치는데, 그 진리로써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루어진 구원을 경험적으로 깨닫게 하신다.

그러면 죄인들이 이 진리를 경험적으로 알게 되는 방법을 살펴보자. 복음의 모든 가르침은 죄인에게서 종료된다. 대속이 먼저 하나님에게서 끝이 나는 것처럼, 대속은 양심에서 끝이 나서, 거기에 머물러야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왜냐하면 양심이 활기를 띠게 되면 죄의 짐을 진 것과 범법의 저주의 판결의 느낌이 대속의 천국에 의해서 그 안에 있는 죽음과 지옥이 치워지기 전에는 결코 충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속은 천국과 같다. 그러므로 죄인들이여, 이를 살펴보라; 종교 교사들이여, 이 점을 고려하라; 대속이 당신의 양심 속으로 결코 들어오지 않는다면, 당신이 하늘로 갈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분노를 느낀다면, 당신이 그 대속을 가지기 전에, 어떻게 만족할 수 있는가? “다 이루었다”는 이 말이 당신에게 나타나는가? 이 말이 어떻게 죄인에게 이르겠는가? 이 말은 성령님에 의하여 이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를 좋아하셨던 것처럼,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기를 좋아하며, 은혜의 언약 안에서의 그분의 위대한 일은 그분의 것들을 취해서 죄인들에게 보여줄 것이다(요한복음 16:14, 15). 우리는 죄인들인가? 나는 그 질문을 어리석음으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죄인들이다. 나는 좋은 의도로 진실하게 이 질문을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판단과 느낌에서 죄인들인가?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범했음을 아는가? 우리에게는 지옥이 합당하다는 것을 믿고 느끼는가? 우리는 사는 것에 관하여 염려하고, 죽는 것에 관하여 염려하며, 영원 속에 계시는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것에 관해서 염려하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만족시킬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그 풍성한 대속의 피가 상처 난 양심에 탄원과 통로와 마침내 만족을 준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예언서 제 33장에서 “나는 거기에 건강과 고침을 가져오리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나를 부르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능력 있는 일들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신다(예레미야 33:3).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으로 보지도 못하였고 귀로 듣지도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온 적도 없었다.”(고린도전서 2:9). 숨겨진 것들 중에는 죄의 용서가 있다. 당신은 마음의 비통함으로 하나님이 당신을 저주함으로써 그분 자신을 영예롭게 하신다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오래 전에 그렇게 느꼈다. 젊은이로서 나는 그것을 확신했다. 하나님께서 나를 저주하고 나를 처벌하심으로써 그분 자신에게 영예를 돌린다는 것보다 내 마음에 더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나의 영혼을 염려한지 곧 육십년이 될 것이며, 다음의 성구가 나를 놀라게 한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내가 그들에게 행하는 모든 선을 듣게 될 땅의 모든 민족 앞에서 그 성읍이 내게 기쁨의 이름과 찬양과 영예가 되리라.”(예레미야 33:9). 죄인이여, 당신은 하나님의 분노가 공의의 분노라는 것을; 그분의 분노는 당신에게로 향하고 당신은 그 분노를 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때 놀라서 당신의 눈을 예수님과 그분의 피로 돌린다. 그러면 당신은 너무나 공의로운 바로 그 분노가 그분의 꺾인 마음에서 그 스스로를 소진하며, 그분께 있었고, 그분을 보내셨고, 그분께 가득했던 그 사랑이 분노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마음에 있게 될 것이고, 당신이 받아 마땅한 그 불쾌함을 그분께서 받았으며; 당신이 이생과 영원을 통하여 중단 없이 미소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것을 지각하면, 이것은 당신을 놀라게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의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죄 값을 대신 지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자. 성령님이 그분의 의를 가져올 때; 우리는 끝이 반드시 와야 하고, 희망이 없으며,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는 모든 느낌이 사라져서 절망 가운데 있다가; 복음의 빛이 당신의 마음에 비치고 경험으로 당신 자신의 것이 되도록 성령님이 대속의 진리를 은혜롭게 당신 양심에 적용하시는 것 이것이 죄인들이 “다 이루었다”는 말을 알게 되는 방법이다. “자기 죄과들을 용서받고 자기 죄를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주님께서 죄과를 묻지 아니하시고, 자기 영 안에 간사함이 없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32:1, 2). 죄를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솔로몬이 말한 것처럼 그들의 입을 닦으면서 말한다. 어쨌단 말이냐?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아무 일도 아니야. 나에게 큰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야; 내가 잘못한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아.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깨끗해지지 않는다. 자신을 의롭다고 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지만, 죄인이 자신을 정죄하면 그는 주님을 누그러지게 하여 용서를 받으며, 그리고 나서 그의 죄를 찾아보면, 보이지 않고, 그는 그 죄를 볼 수 없다. 그는 자기가 저지른 것으로서 죄를 바라보고 자기의 양심의 가책으로 죄를 느꼈지만, 이제 그는 죄를 기대하면서 찾아도 발견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죄를 찾아도 발견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주님께서, 내가 남겨 놓은 그들을 내가 용서하였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예레미야 50:20). “주께서 죄를 전가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죄를 전가하셨으며,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 즉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심이라.”(고린도후서 5:21)라는 구절에서 우리가 보는 이중의 전가는 죄인의 경험에서 일어난다. 성령님에 의해 이를 그의 양심에 가지는 사람은 하늘에 합당한데, 그 이유는 그가 의롭기 때문이며, 하늘은 의로운 사람들을 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는 거룩하기 때문에 하늘에 합당한데, 하늘은 거룩한 사람들에게 합당한 거룩한 장소이다. “네 백성도 모두 의롭게 될 것이요.”(이사야 60:21).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의와 거룩함이 되셨다.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이 되셨으니.”(고린도전서 1:30). 그리하여 죄인은 살기에 합당해진다. 은총으로 축복을 받고 하나님을 찾는 죄인만이 살기에 합당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다 이루었다”는 그 말씀에 관심이 있는 죄인만이 살기에 합당하다.

이 경험은 한두 번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거듭거듭 주님의 백성에 의해서 그들의 생애 중에 알려진다. 종종 그들의 영혼은 이에 관해 경계심을 갖는다. 그들은 요셉의 범죄한 형들과 같다. 요셉은 그들 모두에게 입 맞추고, 하나님이 자신을 그렇게 하도록 이집트에 먼저 보내셨기 때문에 그들을 부양하겠다고 말했지만, 야곱이 죽었을 때 그들은 요셉의 감정이 그들에게서 돌아서서 그가 한 화해를 후회하지나 않을까 경계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요셉에게 소식을 보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요셉에게 그들을 친절하게 대하도록 탄원하라고, 명령했다는 것을 말하며, 요셉은 이것이 그에 대한 반성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이것을 말한다며 울었다. “요셉이 이를 듣고 울었다.” 하는 구절을 볼 수 있다. 경계심이 들어가서 기분 좋은 자비와 용서를 받았으나, 그와 같은 자비와 용서를 거듭거듭 하도록 그에게 요청하기 위하여 자신의 하늘의 요셉에게 다시 인도되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자녀가 있다. 그는 그렇게 한다. 그러나 이를 요청했고 자비를 받은 당신에게 그분이 그분의 약속을 당신에게 한 후에, 그분에 대한 경계심을 마음에 품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당신에게 나타나지 않는가? 한편 당신은 정직하게 말할 수 있다. 내가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과거의 죄만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금 내 마음에 있는 것, 이미 한 어떤 일, 혹은 다가오는 죽음 및 부주의, 끼어들어 나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앗아가는 세속적인 것이다. 죄는 내가 주님을 안 이래 반복되었으며, 나는 이 죄를 치워버릴 필요가 있다. 그 죄는 거듭거듭 치워지고 있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그 아름다운 말은 때때로 어떻게 빛을 내는가. “내가 짙은 구름 같은 네 허물들과 구름 같은 네 죄들을 지워버렸으니, 내게로 돌아오라. 이는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라.”(이사야 44:22). 일은 끝난다. 당분간 양심에서 끝난다. 당신은 만족한다. 당분간 아무 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 당신은 회복시켜주는 사랑에 행복하다. 용서하는 피에 행복하다. 의인(義認)으로 행복하다. 하나님의 호의와 임재와 미소에 행복하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다 이루었다.”

일은 끝났지만 순례자들이 인내해야 할 많은 것이 남아 있다. 우리는 광야를 인내해야 하지만, 광야는 지옥이 아니며, 광야는 지팡이로 친 바위가 생수를 내서 후에 순례자들이 마실 수 있게 하는 것과 같은 많은 자비와 많은 기적의 장면이며, 광야는 지옥이 아니다. 그 어려움은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다. 그 난관은 당신의 진로를 방해하고 당신이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광야는 징계로 가득 차 있지만, 똑같이 자비로도 가득 차 있다. 인내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지만, 참아야 할 분노는 남아 있지 않다. 배워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지만, 느껴야 하고 순례자들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저주는 남아 있지 않다. “하나님이 건축자이며 창시자이신 기초를 가진 도성을 바라보는 지상의 순례자들과 나그네들은 행복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골고다의 나무 위에서의 그분의 이 위대한 계약이 기억되도록 하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나의 양심에 있으면 나는 결코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할지 모른다. 그럴 수도 있다. 하나님은 당신이 기억할지 아니할지를 아시지만, 위대한 구세주, 그분은 이 큰 문제를 반복적으로 기념하실 것이다. “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보이기 때문이라.”(고린도전서 11:26). 그러므로 이 땅의 하나님의 교회는 특권을 받아, 그분의 죽으심을 기념하라는 명령을 지키고 있다. 우리의 죽어가는 친구를 기억하라. 그분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를 기억하라.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너희가 이 빵을 먹을 때마다,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보이기 때문이라.” 그분은 말씀하셨다. “받아먹으라. 이것은 나의 몸이다.” 이것은 생명의 빵이며, 이 빵으로 당신은 자양분을 공급받을 것이고, 이 빵으로 당신의 믿음은 강화될 것이며, 당신의 희망은 밝아질 것이고, 당신의 사랑은 불타오를 것이다. 이 빵으로 당신은 강화되어 십자가를 질 수 있을 것이며, 환난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마시라; 이것은 새로운 계약의 나의 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의 죄의 용서를 위하여 흘려진다.” 그 피는 당신에게, 그 식탁으로 데려와 진, 정당하게 데려와 진 백성으로서 당신에게, 죽어가는 주는 영원한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했으며 그들이 그분의 명령에 겸허하게 복종하고 그에 의해 그분을 기억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으로서 우리는 앞에 십자가를 가지고 있다. 고통을 겪고 있는 구원자가 우리에게 나타나기를 바란다. 믿음이 그 팔을 벌려 그분을 껴안고, 사랑은 모든 애정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며, 감사와 경배와 경이와 찬양과 영예가 그분에게 주어지기를 바란다. 그분에게 복종하고 그분의 식탁에 와서 우리의 죽어가는 친구를 계속 기억할 수 있는 것은 큰 자비이며 고귀한 특권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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