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딤후2:15)

그리스도의 복음

구원받은 양심

  • 관리자 (ehompy0429)
  • 2014-05-23 14: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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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원받은 양심
작성자 서달석 목사  
파일명 구원받은_양심.
구원받은 양심
서달석 목사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evil conscience)으로부터 벗어났고 우리의 몸이 정결한 물로 씻겼나니 믿음의 충만한 확신 가운데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나아가자”(히10:23)

유명한 복음주의 학자 ‘오 할례스비’는 “구원은 양심(良心)이라는 통로가 없이는 인간에게 이를 수 없다”고 하였고 “우리를 사람이게 하는 것은 바로 양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한 이유는 단순하고, 그 단순한 이유는 그에게 죄(罪)를 꾸짖어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고 싶은 마음을 끌게 하는 양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양심은 여러 양상으로 복잡하게 설명할 수 있는데,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이 있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양심 중에는 환경이라는 도덕에 기준을 두고 판단을 하는 양심이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 앞에 드러나 죽게 된 양심 그리고 자기 기만을 활용하여 양심의 기능을 죽게 만들어 버린 화인 맞은 양심이 있습니다.

여기서 구원받은 양심 즉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이란 구원받기 전에 일반적인 환경에 따라 판단을 받는 양심을 가지고 있다가 하나님의 율법에 벌거벗은 것이 드러나서 양심이 각성되고 깨어 죄를 자복, 상한 심령이 된 다음 율법 즉 하나님의 의(義)에 죽게 된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아 양심이 청결해져 있는 양심을 말합니다.

양심이 청결해져 있다는 뜻은 하나님 앞에 걸리거나 찔리는 죄 문제가 해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본래의 민감한 양심으로 살아나서 죄에 대해 민감하고 양심의 능력이 죄를 유혹하는 본능보다 강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덕적 환경을 따라 판단하는 양심, 잠자는 양심, 죽어버린 양심, 살아있는 양심을 분별하면서 어떤 양심이 진정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인가를 찾아보고 혹시라도 그날에 버림을 받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에 늦게서야 깨어난 양심 때문에 지옥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불행한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영과 양심은 하나

“이제 그 명령의 목적은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가식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라”(딤전1:5)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하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는 것과 동일한 모형이니 곧 침례라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함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응답하는 것이라”(벧전3:21)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 중에 육만 가진 피조물 즉 나무 같은 생물이 있고 육과 혼을 가진 동물들, 그리고 영,혼,육을 모두 가지고 있는 생물을 창조하셨는데 그중에 영,혼,육을 모두 지닌 생물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spirit)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도 ‘영’이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육’뿐인 나무 같은 생물은 살아있어도 아픔, 기쁨 등 감정이 없고 육과 혼이 있는 짐승은 기쁨, 슬픔을 알고 감정도 있으나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영’이 없기 때문에 선과 악의 분별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적 존재인 사람만 선과 악을 알고 그것을 느끼고 분별하는 존재인데 그 영의 활동을 양심의 활동이라고 하고 그 영적 상태를 양심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영과 양심을 분리 할 수 없고 영의 활동을 양심이란 방법으로 입증시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끗한 영’은 곧 ‘깨끗한 양심’ 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양심이 걸리는 상태 또는 걸리는 문제를 해결하지도 아니하고 단순이 이론적으로 예수님의 보혈을 믿고 영혼이 깨끗해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참으로 위험한 생각입니다. 상한 심령(시34:18) 상한 갈대(사42:3) 상한 영(시51:17)이라고 표현한 말씀들은 반드시 회개하는 심령을 말하는 데 그것은 바로 양심의 가책에 의해 죄의식을 느끼고 죄의 아픔을 자백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에 말씀의 빛이 비추어오면 잠자던 양심이 살아나서 찔리게 되고 가책을 받게 되며 하나님 앞에 회개한 탕자 마냥, 통회하는 세리 마냥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게 되는데 그것은 모두 양심을 통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낮아진 상태에서 복음을 듣고 양심이 평안을 얻는 것을 “깨끗해진 영” 또는 “깨끗해져 있는 양심” 또는 “구원받은 양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영과 양심’은 하나이며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영이 더러운 것은 양심이 더러워 걸리고 있고 영이 깨끗한 것은 양심이 깨끗해져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양심이 청결해져 있다는 것이 되므로 구원과 양심의 문제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성령님은 양심을 일깨워 즉 각성시켜 죄를 통회 자복하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진실로 책임 있는 회개와 상한 심령이 되고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 엎드려 죽어져 있을 때에만 복음을 들어 믿어지게 하셔서 구원을 해주시기 때문에 성령님이 충만하게 내주하여 계신다는 뜻은 곧 양심이 깨끗하게 청결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만약 구원받은 성도가 범죄하였을 경우 즉각 양심의 송사가 있게 되고 그것을 성령님의 억누름 당하심(살전5:19) 또는 성령님의 근심(엡4:30)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드리라 이는 우리가 모든 일에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선한 양심을 가진 줄로 확신함이라”(히13:18)

각자의 재판장인 양심

“이는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이 본성에 따라 율법 안에 들어있는 일들을 행할 때에는 비록 율법이 없을지라도 그들이 그들 스스로에게 율법이 되기 때문이니 이런 이들은 그들의 양심이 증언하며 그들의 생각들이 서로 고소하고 변명하는 중에 그들의 마음속에 기록된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 보이느니라”(롬2:14-15)

양심(良心-conscience)은 그 기능이 약하든 강하든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고후4:2). 그러므로 양심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자기를 재판하는 양심의 판사가 있는데 양심은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그리스어로 슈네이데시스(συνειδησις-suneidisis)라고 하는데 그 뜻은 ‘함께 안다’ 또는 ‘어떤 일을 누구와 함께 안다’는 뜻의 그리스어 ‘슈노이다’(συνοιδα)의 동사에서 갈라져 나온 단어입니다. 신약에는 ‘슈네이데시스’는 명사로서 30회, 동사로서 4회에 걸쳐 기록되었습니다. ‘함께 안다’(know with)는 말은 다른 외국어에서도 사용되는데, 라틴어로는 conscientia, 노르웨이어로는 삼비테(samvite), 스웨덴어로는 삼베테(sanvete)인데 모두 ‘함께 안다’는 뜻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였을 때 양심이 알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의지’와 함께 있음을 안다는 뜻입니다. 이 함께 아는 기관인 양심은 모든 사람 속에 존재하고 있어서 사람이 자라면서 선과 악을 알 때부터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양심의 존재는 온전히 선과 악을 함께 알고 그것을 심판 하는 기능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 ‘선과 악’이 어떤 기준에 있든지 그 선과 악을 기준삼아 ‘옳다’ ‘그르다’ 그때마다 즉시 즉시 재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단 양심의 재판을 받으면 일차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 재판은 ‘자아’의 의지와 상관없이 독립적이고 무조건적이고 즉각적이며 절대적으로 재판을 하고 책임은 절대적으로 ‘자아’가 지도록 하는데 왜냐면 모든 사람은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자유의지는 무엇을 행하고 행하지 않을 주권을 가지고 있으며 주권을 행사할 때 책임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은 ‘자아’라는 주권에 간섭을 하지는 않지만 반드시 결과 또는 행사에 판결은 해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죄를 범하려고 할 때 사전에 양심은 ‘그것은 옳지 않다’ 즉 ‘그것은 악이다’라고 판결해주고 또 사후에도 ‘그것은 악이었다’ 라고 심한 가책을 주게 되는 것이지만 양심은 주권을 행사하거나 의지의 행위에 결코 책임을 지지는 않는 것입니다.

‘선’의 기준은 ‘상황윤리’라는 법이 있는데 구원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는 오로지 상황윤리에 따른 선과 악을 표준하여 양심이 재판하게 되고 어느 날 하나님의 공의가 양심에 들어오게 되면 즉각 양심은 선과 악의 기준을 하나님의 법에 올려 두고 거기에 맞춰 재판을 하는 것입니다. 간음하다 체포된 여인을 끌고 왔던 바리새인들도 같은 예입니다. 왜냐면 인간의 양심(영)은 본래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선의 기준은 하나님의 공의에 두게 될 때 양심은 진정한 판사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은 상황윤리의 ’선‘을 입법자로 둘 때는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다가 하나님의 율법(하나님의 최고의 선)이 들어오면 그 율법을 기준으로 두고 재판하게 되고 그때서야 하나님께서 청조하신 본래의 정상적인 재판장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중동부족들은 일부다처제 문화이기 때문에 중동의 부족문화를 ’선‘의 기준으로 둘 때는 양심은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거느릴 때도 “그것은 악이다”라고 판결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식인종문화에서도 사람 하나 잡아먹는 것 쯤 양심은 죄라고 판결하지 않겠지만 죽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거룩을 기준으로 두고 판결하게 될 것이기에 지옥에서 모든 양심이 살아나서 살았을 때 찔리지 않았던 양심이 자기를 찌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기 전 살았을 때에 인간의 선이 아닌 하나님의 선 곧 하나님의 의, 율법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양심에 심판을 받아 죄인임을 자백하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이 있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선으로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양심을 정상적인 재판을 하도록 최고의 입법인 율법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율법, 양심의 역할을 통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롬3:11)라는 말씀이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양심은 아무도 속일 수 없는 유일한 목격자요 영원한 증인이란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율법(하나님의 공의)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율법(하나님의 공의)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인 줄을 우리가 아노니 이는 모든 입을 막아 (양심에 의해) 온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유죄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롬3:19)
“율법(하나님의 공의)이 없었다면 내가 죄를(양심을 통해) 알지 못하였으리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나는 탐욕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7:7)

여기서 율법(613가지) 즉 유대인의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의 양심은 어떤 기준을 둘 수 있는가? 역시 바울 사도는 성문화된 율법이 아니라 고도의 하나님의 의를 율법으로 설명하고 있고 그 율법에 우리 양심을 비취어 죄를 자복하게 하고 있습니다.(롬1:18-32, 갈5:19-21, 고전5:8-11 등) 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자신의 양심에는 크고 작은 ‘가책’ 또는 자책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자책(요일3:20)이 호리만하게(마5:25-26) 걸려도 죄인으로 일차 재판을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양심을 죽이는 방법

양심을 죽이는 방법 중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내가 양심을 기만하고 양심의 소리를 습관적으로 외면하거나 합리화, 핑계하면 결국은 양심은 기능적으로 죽어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까지도 건드리실 수 없게 되고 성령님의 예리하신 책망도 효용이 없어 구원받지 못하고 결국 육신이 죽어 지옥에 가서야 늦게 각성하게 되어 부자나 가룟 유다 마냥 울부짖게 됩니다.
또 하나는 둔탁한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아 성령님에 의해 각성(the awakening) 된 다음 참으로 하나님의 의(율법)에 양심 깊숙이 죄가 드러나 통회 자복하고 세리같이 탕자같이 율법 훈육선생(갈3:23-25)에 이끌려 죽게 된 다음에 복음의 말씀을 듣고 살아나 구원을 받게 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여기서 전자는 자아가 자기를 죽이는 것이요 동시에 지옥이며 후자는 말씀에 의해 죽게 되며 동시에 구원을 받아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 자기가 양심을 죽이는 법

“그들 자신의 양심(良心)이 뜨거운 철인(鐵印)을 맞음으로 마비되어 위선으로 거짓을 말하리라”(딤전4:2)
“오히려 그들의 생각과 양심까지도 더럽혀져 있느니라”(딤후1:15)

일반적인 죄인은 구원을 받기 전 가능하면 양심의 빛 앞에 드러나 있기를 원치 않고 혹시 보편적인 양심이 예리한 빛을 받으면 양심이 예라하게 되려는 그 상태로부터 피하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간음하다 체포된 여인을 끌고 왔던 바리새인들은 주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자에게 돌로 치라”고 하셨을 때 그 상태에 양심이 찔린 상태로 있고 싶지 않아 피해버렸습니다.
“그들이 그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나이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맨 나중까지 하나씩 자리를 떠나가니...”(요8:9)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그 빛으로 오지 아니함은 자기의 행위가 책망을 받을까 염려함이라”(요3:20)

양심의 입에 자갈을 물리고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양심은 본래부터 환경 윤리 안에 있어 정상적인 양심이 아니라 어두워져 있는 상태인데 그 양심에서부터 점점 ‘퇴화’ 하다가 죽게 됩니다. 즉 양심은 사람의 육체마냥 점점 자라서 각성하고 완전한 양심으로 성장하기도 하고 점점 퇴화하여 죽기도 하는데 양심의 소리에 얼마나 순종 또는 불순종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들을 때 찔리고(행2:37) 그 쪽으로 순종하면 양심은 더욱 맑아져 조그만 죄에도 크게 찔리게 되고, 양심의 소리를 억압하고 다른 방법으로 막아버리면(행7:54-58) 더 큰 죄를 범해도 양심은 가느다랗게 외치다가 어느 날 죽어 판결하는 일을 그만두게 됩니다. 그래서 ‘악한 자아’가 양심의 능력을 정복하여 이성을 마비시키는 행동에 들어가는데 항상 술에 취해 있다던가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주지 않음으로 일에 몰두한다던가 하게 되는데 혹시 쉬는 시간에 양심이 살아나서 자신을 찌를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깊은 밤까지 분주하게 보내는데 그런 양심은 한밤에 홀로 깨어있는 것이 두려울 것입니다. 또는 자기가 저지른 일들을 아담같이(창3:12) 타인에게 전가시킴으로 원망적인 사고(思考)자가 되고 자신의 죄를 논리적으로 변명하고 주변인물이 그것의 책임을 뒤집어쓰게 되며 내가 죄를 지었음에도 그 행위가 ‘나의 것’이었음을 가능한 부정하려 합니다. 그런 ‘기만행위’가 반복되다 보면 그 양심은 굳어지게 되고(엡4:18) 완악해지고(롬11:7, 히3:13) 죽음에 이르는 죄(요일5:16) 성령님 훼방 죄(마12:31) 까지 이르러 죄를 각성하는 기관(양심)이 닳고 닳아 더 이상 죄에 대하여 슬퍼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런 자들은 범죄를 슬퍼하기 보다는 죄의 결과를 슬퍼하고 형벌 받을 것만 슬퍼하다가 지옥에 떨어져서야 양심이 깨어날 것인데 그 때에는 너무 늦어버리게 됩니다. 아마 “늦었군! 너무 늦었어”라고 할 것입니다.

◉율법에 의해 죽게 되는 양심

“곧 율법이 탐내지 말지니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나는 탐욕을 알지(양심에서)못하였으리라”(롬7:7)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양심의 가책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리요”(롬7:24)
“이는 내가 전에는 율법이 없이도 살았으나 계명이 들어오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9)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알기 전에는 양심은 둔탁하여 비록 무디고 감각 없는 양심은 아니지만 환경윤리에 걸리지 아니하면 양심은 살아있게 되지만 어느 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비추심(요16:8)을 받게 되면 진정한 하나님의 율법이 양심에 최고 입법 기관으로 설정되고 양심을 덮은 환경윤리, 자기 생각의 수건이 벗겨지면서 양심이 각성을 받아 하나님의 거룩한 의 앞에 벌거벗은 자신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 율법 앞에 비추임을 받을 때 각성한 양심은 변명도, 핑계도 사라지고 누구탓, 환경탓도 사라지고 결국은 모든 죄는 나의 의지적인 불순종에서 비롯되고 ‘자아’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였음을 자백하게 되고 상한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속에서 조그마한 의로움이라도 찾아보려하나 의는 티끌도 없고 몇 가지만 보이던 죄가 머리털보다 많고(시40:12), 정수리에 넘치고(스9:6, 시38:4) 얼굴을 들 수 없고, 윗 입술을 가리울 수밖에 없는(레13:45-46) 비참하고 가련한 상태가 되었을 때 내 양심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 선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와 양심의 선을 함께 앎으로 나는 결국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에 정죄되어 예수님 앞에 끌려나와 구원받는 간음한 여인, 성전에서 통회자복하는 세리, 돌아온 탕자와 같은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는 유대인같이(롬10:1-4) 자기 의와 하나님의 의와 치열한 싸움 속에 자기의가 율법에 의해 살해당할 때에 자신의 행위에 대한 아픔과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통회(contrition)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죄인 즉 하나님의 말씀에 죄인 되어 죽어야만 말씀으로 살리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양심이 자아를 고통스럽게 찌를 때고 나는 그 찌름을 그대로 책임을 지는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역사는 온전히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님으로 양심을 통하여 하시는 역사입니다.
“주님께서는 죽이기도 하시며 살리기도 하시고 무덤으로 끌어내리기도 하시며 끌어올리기도 하시는도다”(삼상2:6)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잃고자 하면 그것을 보존하리라”(눅17:33)

구원받은 양심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님을 통하여 자신을 흠 없이 하나님께 드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실로부터 너희 양심을 정결하게 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냐”(히9:14)

양심이 율법에 의해 자아를 죽게 하였을 때 복음을 듣게 되면 역시 성령님의 역사로 거듭나게 되어 양심의 포커스는 나의 행위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돌려지게 되고 그때부터 “행위에서 믿음으로” “종교에서 복음으로” “나로부터 예수님에게로” 영혼의 눈을 돌려놓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양심으로, 그 순간 양심은 가책이나 찔림에서 해방을 받게 되는데, 죄가 처리된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돌아가는 진정한 회개(리펜트-repent)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깨끗한 양심은 곧 깨끗해진 ‘영’을 의미합니다.
“너희가 성령님을 통하여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양심)을 정결하게 하여...”(벧전1:22)

이 각성된 양심은 죄의 두려움이나 가책으로부터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자신을 맡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분명한 사실은 양심이 각성되어 정상적이고 건강한 양심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그 양심은 눈과 귀가 열려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 하고, 하나님의 선을 사랑하고, 느끼고, 지켜야만 한다고 믿게 되고, 성화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것은 즐거움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인데(마11:29-30) 억지적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순종과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 자매를 사랑하게 되며 양심은 민감하게 계발되어 조그마한 죄라도 금방 예민한 센서 역할을 하여 죄를 멀리 하게 되는 ‘신의 성품’으로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과 ‘신앙’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인데 선을 사랑하게 되고 그 선을 따른 후에는 양심은 즐거움이 있고 건강하게 되며 반대로 죄는 더욱 민감해지고 더욱 싫어지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나타내는 열매를 맺는 삶을 이끌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은 말씀에 의해 영(양심)이 하는 일입니다.

다시 요약한다면 율법에 의해 죽은 양심은 예수님의 복음에 의해 살아나게 되어 하나님 앞에 티끌만큼도 걸리지 않게 되었으며, 양심이 신분상 깨끗해져 있을 뿐 아니라 완전 새로운 피조물(고후5:17)로서 현실적으로도 깨끗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에 맞추려고 노력하며 청결한 양심이 더욱 청결해지며 하나님의 성품에 까지 발전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제 양심이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여 성령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갈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의 열매(갈5:22-26)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았다고 어떤 죄도 예수님의 보혈에 맡겨버리고 계속해서 현실적으로 죄를 범하고도 깨우침이나 고통이 없다면 구원을 의심해 보아야 하고 그 양심은 분명히 신경세포가 살아있는 것같이 살아있는 양심이 아니라 나환자의 죽은 신경같이 죽어있는 양심이란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매일 매일의 삶에서 체험되고 경험되는 일이 됩니다.

양심은 율법을 초월한다.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내어버려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1:19)

비울 사도는 선한 양심을 내어버린 상태를 믿음에 관해 파선한 것이라고 합니다. 선한 양심은 하나님의 선을 사랑하고 거기에 맞추려고 애를 씁니다. 성령님에 의해 살리심 받은 성도의 양심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합니다. 그는 악에는 아이가 되고 깨닫는 데는 어른이 되며(고전14:20)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 받은(엡2:10) 것과 선한 일에 열매를 맺어(골1:10) 선한 일에 온전케 되려는 걸음을 걷게 되는 것(딤후2:21, 3:17, 딛3:1)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의 유대인에게 주신 의문(儀文)화된 율법(고후3:6)을 지켜야하느냐? 아니면 율법과는 무관한가? 하는 문제의 해답을 찾아봅시다.

율법은 도덕적인 법 말고도 유대적 규례, 절기, 안식일, 옷술을 다는 것, 수염 깎는 규례, 먹는 것과 먹지 말 것의 음식 등 도덕적인 율법과는 거리가 먼 율법이 수없이 많이 있지만 그것은 죄를 깨닫게 하는데 필요한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을 주신 분이 같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유하는 율법(약1:25)이 있는데, 그것은 고도의 도덕적인 하나님의 선의 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선은 곧 하나님의 선이고 구원 이후의 우리의 양심은 곧 하나님의 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 주의, 골로새 주의, 은혜에 율법을 추가하는(행15:1-5) 것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데, 있어 양심은 기능을 발휘함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초월하여 이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은 곧 율법(롬13:9-10)의 완성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죽은 자에게 주어진 모세의 율법, 이방인의 양심은 하나님의 선에 대하여 죽게 하는 몽학선생으로서 주어졌고 그들은 죽었기 때문에 죄로 심히 죄 되게(롬7:13) 하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게 하시려고(롬5:20) 주셨을 뿐 아니라 죽은 자들은 하나님의 선을 행할 능력이 없어 율법은 오직 죽이는 일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는 그리스도인들은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말씀의 능력으로 죄를 이길 힘이 있고 하나님의 선(도덕적 율법)을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요13:34)는 새 명령 속에 성도의 모든 율법이 들어있고 성도는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위해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빛을 비추는 것이요 향기를 뿜는 것이며 소금의 삶이요 열매를 맺는 삶인 것입니다. 그럴 때에 양심은 더 깨끗하여지고 양심의 선을 순종할 때에 그 능력이 더욱 강화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는 그리스도인이 양심을 거슬러 죄를 범했을 때는 어떤가요? 서커스 단에 가면 공중곡예사들이 높은 공중에서 밧줄 한두 개에 생명을 걸고 공연을 하는데 전혀 두려움 없이 줄넘기, 그네 타기, 밧줄 갈아타기 등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곡예를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실수로 떨어져도 생명을 지탱해주는 그물망이 밑에서 튼튼히 보장해주기 때문입니다. 성도들 역시 하나님의 선을 쫓아가다가 어느 날 옛 본성의 유혹이나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양심의 소리를 거슬렀을 때 밑에 그물보다 안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보장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구원을 잃어버리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강한 책망을 받고 다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선을 찾아 공연(?)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순수한 양심인데 순수한 양심이란 죄를 전혀 범하지 않는 다기 보다는 의지가 불순종하여 혹 죄를 범하였을 때 자기 양심이 자기를 책망하게 되고 그것을 합리화나 핑계하기 보다는 달게 받아 재도전의 기회로 삼고 양심의 소리에 다시 복종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양심을 순수한 양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않는 양심은 죄를 심상히 여기고 그것을 쫓아가며 가능하면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려 하지만 구원받은 양심은 할 수 있으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귀울이려 하고 최선을 다해 완전한 삶을 찾아 하나님의 선에까지 도달하려하고 혹이 실패하였을 때 즉각 자책과 자백, 그리고 회개를 하는 성격이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죄에 대해 고도로 민감해진다는 것입니다. “민감한 양심은 성도의 귀중한 방패”입니다. 그 양심이 조심스러운 성도를 만들고 주님 앞에 또 양심 앞에 떳떳한 상태로 있게 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게 됩니다. 그렇게 자란 성도의 영적 상태를 바울 사도는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순수한 양심에 믿음의 신비를 가진 자라야 할지니라”(딤전3:9)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을 구원시키시는 하나님의 사역도 양심을 깨워서 하시고 성도의 죄를 이기는 경건생활도 살려주신 양심을 통하여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깨끗한 양심, 깨끗한 영을 유지하는 삶이야말로 성도의 승리하는 삶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하리라”(히12: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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