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딤후2:15)

그리스도의 복음

종교에 기독교 옷을 입힌 기독교종교

  • 관리자 (ehompy0429)
  • 2014-05-23 14: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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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바울이 마르스의 언덕 한가운데 서서 말하기를, 너희 아테네 사람들아 내가 알고 보니 너희가 모든 일에 있어서 지나치게 미신에 사로잡혀 있도다.”(행17:22)
  종교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구속이며 속박(束縛)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나면서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선을 행할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전혀 무능자인데 하나님의 표준에 완전한 도덕적 의무를 지우는 것이 종교임으로 사람은 감당을 못 할뿐 아니라 그 무거운 짐 때문에 신음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결국 종교라는 폭군에게 노예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심히 괴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11장 28절에 있는 “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인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들이 있는 중에 가장 혹독한 괴로움을 주고 있는 종교적 기독교 즉 사람의 본능에 있는 종교에다 기독교 옷만 입혀둔 기독교종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지 못하시는 일반 기독교 성도들 중에는 다소 부정적인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귀중한 영혼구원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도 일반적으로는 종교라고 인정하며 종교의 일종이라고 생각지 않을 수는 없으나 사실 내용을 깨닫게 되면 종교에서 해방을 주는 것이며 종교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바로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신비이며 깨닫고 생명을 가진 자만 알 수 있는 자유의 비밀입니다. 그러나 만일 기독교가 이 비밀을 깨달아 자유를 가지지 못한다면 이 세상 어느 종교보다 가혹한 폭군으로서 죄인들에게 군림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 새로운 생명에 접하지 못하는 한 기독교는 가장 엄한 종교가 되고 있으며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이 있어 행하는 신앙생활은 자신이 아니요 자신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으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며 자신은 참된 평안과 자유 속에 되어지는 것이지만 생명이 없이 아직도 생명은 미래의 것으로 바라보면서 하는 것은 자유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행하려고 하니 괴로움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죄인으로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가 선을 행하려고 하니 결국 하나님과는 상관도 없으며 고통중에 만들어진 종교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민족들은 장구한 역사 속에서 각종 종교적 배경 밑에서 사상과 습성이 굳어져 왔습니다. 한 때에는 불교신도로서 불교를 열심히 믿던 사람이 불교에 대한 소질을 가지고 있다가 기독교가 새로이 들어오니 쉽게 천국에 간다는 매력적인 말에 끌려 들어와서 간판을 기독교로 갈아 붙혀서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신봉하면서 살 것이라며 사상이 전환이 되고 기독교신자로서 열심히 교회당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그 기독교는 불교식으로 열심히 공을 닦는 식으로 믿게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하여 인정을 하고 있지만 결국은 내가 열심히 닦아야 기독교적인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분이 있습니다. 미쳐 중생이란 계단을 거치지 못하고 보면 기독교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다는 관념적 신앙에 머물러 열심히 기도하며 새벽마다 참회와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무엇이 되며 금력이나 지력이나 육체적인 힘까지 소모하면서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희생적인 생활을 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기는 하지만 심령에 다소간의 안도감은 있을지라도 참된 평안이 없이 그냥 세월을 보내는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간판만 바꾸어 달고 옷만 갈아입은, 즉 사실은 기독교종교인 것입니다. 또는 수 백년 동안이나 이 민족의 사상과 습성과 모든 생활 의식까지 지배하여온 유교가 있어 철두철미한 도덕적 관념과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자부하는 골수에 사무친 예의도덕 관념이 뿌리를 박은 대로 살다가 기독교라는 신사조와 함께 끌고 들어온 신문명에 접하자 쉽지는 않지만 서서히 기독교문명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으나 이미 오래 묵은 습성과 생활관이 너무나도 오래 동안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변화되지를 못하고 결국 믿기는 예수님을 믿으나 생활은 유교의 도덕이 그대로 남아있어 유교적인 기독교가 되어 가다 보니 거기서 생겨나는 것은 기독교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기독교로 점차 옷을 갈아입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 왔을 때에는 그러나 생명이 있었지만 점차 피전도지구의 기존 사상인 도덕과 의식 관념과 타협해서(토착 종교와 혼합된 기독교) 변질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너무나도 순수한 것이어서 결코 종교와 섞이면 성령님께서 역사를 하실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질 않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 보다는 차라리 오직 도덕적 관념이 앞을 서서 도덕적 방면으로 달려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 땅에는 유교식 기독교가 생겨났고 이런 것은 정신적 내면의 문제 이지만 외면적으로 들어가면 장례의식 같은 경우에도 입에서 나오는 말 외에는 그 모습은 거의가 유교식을 그대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내면적인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 가정에서도 윤리의 개념은 유교식이 많고 복음적인 면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 한국민족의 정신을 장구히 지배하여온 미신이 있어 지금도 서울 남산 길 주변에서도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곳에 가보면 공손이 예를 갖추고 운명감정이나 사업 감정을 하고 있거나 성명감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굿을 하면서 신을 불러와서 신의 음성을 들으려 하거나 이상한 환상이나 무엇을 본다거나 하는 관념이 떠나지 않고 있는 실정이여서 그렇게 하던 사람들이 그의 소질 그대로 기독교에 들어와서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간다는 관념적 신앙을 가지고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 동안 다녀도 이상한 신비체험이 없으니 너무도 따분하여 좀 더 이상한 체험이 있을 것을 바랄뿐만 아니라 성경에 신비적 체험이나 기사나 성령님의 불같은 기사도 있고 환상이나 신비한 음성도 듣는 기사도 있으니 이것을 오해하고서 자신도 받아보기 위해서 산중에 들어가서 수십일 동안 금식을 하는 중에 정신적 변태 아니면 이것을 이용하는 사탄은 이상한 체험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수많은 군중들이 와글와글 몰려다니면서 기도원이나 산에서 입신을 한다, 불을 받는다, 환상을 본다, 방언을 한다 고 하면서 산으로 천막으로 어데로 하면서 그 마음상태가 허공에 떠서 부흥 집회에만 찾아다니던 전성기가 있었습니다.
  기독교인이 되기 전까지 미신을 가지고 있던 이 미신의 소질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본 소위 신령적 영웅들(기독교 심령부흥사들)은 또한 군중 심리를 이용하여 물론 자신도 진실인줄로 알면서 무엇인가 속고 있지만 그 군중들에게 만족을 주기 위하여 신비적인 형태를 나타냄으로 많은 인심 뿐 아니라 물질까지도 잘 요리하여 먹으며 거부가 된 자들도 없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자들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 사악한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들과 거짓 이적들과 불의 의 온갖 속임수로 멸망하는 자들에게로 오리니 왜냐하면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라‘(살후2:9-10)
“그러나 뱀이 자기의 간계로 이브를 속인 것 같이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변질될까 내가 두려워하노라. 이는 만일 누가 와서 우리가 선포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선포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그를 잘 용납 하는도다.”(고후11:3-4)
  이러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진정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자복하고 중생의 문을 진정으로 통과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 안에 생명의 만족과 내주하신 성령님을 통한 평안을 얻었기 때문에 더 이상 목말라하지 않으며 여기저기 부흥회나 기도원이나 산으로 이상한 것들을 찾지 않게 되는 것은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체험입니다. 기록된 성경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이 있는데 성경을 떠나 어디 가서 무엇을 보아야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렇다고 성경에 나타난 신령한 은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신비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증거 합니다. 거기에다 기존 사상과 정신에 뿌리박은 변질된 기독교 외에도 신문명이 가져다 준 신사조에 의하여 소위 기독교를 철학적으로 해석하려는 철학적인 기독교도 있습니다. 이것은 일찌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 울타리를 뛰어 넘어 들어온 가장 오래된 기독교의 생명을 훔쳐간 도적으로서 서기 백년 경에 벌써 기독교안에 들어 와서 기독교를 철학과 접목해버린 그리스 신화에서 발생한 세력입니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기독교를 이해하고 머리로는 하나님의 존재나 모든 신조들은 이해를 하지만 생명은 얻지 못한 점에서 볼 때에 복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현주소는 사람의 심령이니 곧 마음속인데 철학적으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현주소가 마음에서 옮겨 머리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엄격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질하지 못하도록 조심하라. 이것은 사람들의 유전을 따르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니..”(골2:8)
  하나님의 말씀은 심령이 가난한자에게 향해서 계시되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머리로 기도교의 전체를 이해하고 통달한다고 할지라도 생명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기독교신앙을 가진 자는 기독교사상가는 될지언정 새 생명의 소유자인 하나님의 아들은 될 수가 없습니다. 서기 100년경부터인가 기독교가 그리스 철학과 타협하자 기독교는 마음에서 머리로 옮겨지기 시작하였으니 헬레니즘은 그 시대의 유명했던 웅변술을 타고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이기를 모았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웅변적인 , 그리고 사색적인 머리의 지식에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갈급한 심령을 통해서 게시되는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에 성령님의 역사로서 마음에 기록되지 않으면 않되는 것입니다. 헬레니즘은 기독교와 입을 맞추어 기독교안에 들어와서 성경을 웅변으로 연설하여 사람의 심리를 사로잡기 시작하니 계시는 중지될 수 밖에 없고 성령님의 역사에 의존하지 않고 사람의 웅변적 기술에 의존하니 당시부터 기독교는 변질되기 시작하였다고 서양의 어떤 신앙인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다만 성경의 진리는 성령님의 게시로만 알아질 수 있고 심령에 깨닫는 것이지 지식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나무에 달려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때문이니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나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들에게나 그리스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곧 하나님의 권능이시오, 하나님의 지혜이니라.”(고전 1:22-24)
  예수님의 골고다 희생의 도(道)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되며 그리스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 뿐입니다. 오직 성령님으로 심령에 깨달아지는 것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철학화 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며 기존의 종교로 되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가지 위험한 것은 기독교가 민족적인 종교화가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한 부류는 기독교를 민족사상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동족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민족사상운동의 기구로 사용되고 있는 현실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특히 근세 한국에 그런 일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한국민족이 성경의 단 지파라느니 또는 예수님께서 한국 땅에 재림하신다느니 하면서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일부가 순수한 복음 보다는 한국민족은 특수한 민족이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의 어떤 특별한 계획속에 있는 것같이 떠들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과 같은 성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6-8절에 보면 주님께서 승천 직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묻기를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라고 그들은 복음보다도 자기들의 민족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성령님을 받으면 복음 전하는 자가 될 것으로 땅 끝까지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가장 확실한 답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나 한국인을 특수한 존재로 보시지 아니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중생 자들만 보시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되지 않은 것에 감사들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방인의 때에 살면서 피로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다는 아니지만 종교적 기독교를 형성하여 참된 복음과는 상관도 없는 현실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면 성경에도 종교의 전성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종교를 명령하신 기록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그 두 사실을 분명히 구별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곧 구약과 신약인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표면적인 뜻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의무를 명령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구약은 율법이란 것으로 사람과 맺은 행위의 약속입니다. 거기에는 내면적이며 영적으로 복음의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지만 외부적인 뜻은 엄한 종교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심사숙고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의 기독교는 많은 형태의 세상종교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각 개인이 거듭나기 전에 가지고 있던 기존 사상에 기독교라는 옷만 입혀서 알맹이는 종교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분들은 참으로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에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오해하여 참으로 누려야할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생명 없이 허송세월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사실 말하기를 조심하기 때문에 기독교 지도자들이 말하기를 싫어하겠지만 영혼에 관한 문제라서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밝혀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살펴보고 너희 스스로 자신을 입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 자신이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는 버림을 받은 자들이니라.”(고후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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