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딤후2:15)

그리스도의 복음

제31회 하계특별수양회 자료

  • 관리자 (ehompy0429)
  • 2014-08-19 11: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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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러기 복음

제31회 하계특별수양회 자료

 

“그러나 주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개들에게 던지는 것은 옳지 아니하도다, 하시니 그 여자가 말씀드리기를, 주여 참으로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자기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들을 먹나이다, 하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너의 소원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녀의 딸이 그 시각부터 온전해 지니라.”(마15:27-28)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셔서 계실 때에 일어난 사건이다. 갈릴리 북쪽 시리아 베니게 지역의 해안 항구로 사렙다 북쪽 지역은 시돈이고 남쪽 항구는 두로 지역이다. 주님은 엘리야가 시돈 성읍 사렙다 과부에게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눅4:26) 거기에 가나안 여자가 주님께 나와서 마귀 들린 자신의 딸을 치료해 달라고 간청을 한다. 마가는 그 여인을 그리스(Greek) 사람이며 종족으로는 수로 보니게(Syrophenician)사람이라고 밝히고 있다.(막7:26) 당시 그리스사람들은 이방인의 대표였고(고전1:23절 참조) 특히 수로 보니게 사람들은 유대교로 개종할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그 여인은 저주받은 민족으로 상징이 되는 가나안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일지기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누워 있던 현장을 목격하고 셈과 야벳에게 고자질 하였던 함의 아들 즉 손자 가나안에게 “가나안은 저주를 받으리니 그가 자기 형제들에게 종들의 종이 되리라.”(창9:25) 는 역사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가나안 여자가 사랑하는 자신의 딸이 당시에도 보기드믄 사악한 마귀가 들려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어 비록 이방인이지만 용기를 내어 자신의 딸을 치료해 달라고 간청을 한 것이다. 어디서 소문을 들었던지 예수님께서 이방땅인 시리아 시돈, 두로 지역에 오신 사실을 알고 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참으로 절박한 심령으로 소리 질러 주님께 간청을 하였는데 그의 실수는 이방인 더러운 여인이 자신의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고 마치 이스라엘 자녀처럼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데 있었다.

우리가 성경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 가나안땅은 바알숭배로 유명한 우상숭배 백성들이었고 예수님 당시에도 태양신 우상을 숭배하는 민족들이었다. 그러한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돼지에게, 개에게 던지지 말라”(마7:6) 는 말씀과 같이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가나안 사람들을 ‘개들’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한 현실을 그녀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유대땅까지 찾아오지는 못하고 예수님께서 이방 땅에 오신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주님’이라고 불렀다.

“오 다윗의 아들이신 주님이시여,”(마15:22)

“주님, 저를 도와주소서,”(마15:25)

“주여, 참으로 옳소이다마는 ,..”(마15:27)

 

그녀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결코 아니었고 태양신 우상을 숭배하는 더러운 죄인으로서 감히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러서는 아니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 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는 것을 본 제자들이 귀찮게 여겨 ‘저렇게 소리를 지르오니 고쳐서 보내시지요, 라는 어조로 건의를 드리자 주님께서는 냉정하신 어조로 말씀하시기를, 주님께서는 자신은 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내심을 받으셨다고 하시면서 그녀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고 선을 그으셨다.

 

“주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마15:24)

 

가나안 사람들과 개들(dogs)

 

“그러나 주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개들에게 던지는 것은 옳지 아니하도다, 하시니.”(마15:26

 

주님께서는 그 여인을 단순히 거절하시려는 뜻은 아니셨다. 자신의 위치가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낮아지지 않으면 은혜가 임하지 않는 다는 진리를 가르치시고 그녀의 마음을 죄인의 위치로 끓어 내리시려는 의도이셨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도 자신의 위치를 알지 못하고 마치 정당한 이스라엘 자녀같이 제자들의 훈수에 힘입어 이제 예수님 앞에 까지 당당하게 찾아와 비록 엎드렸지만 또다시 “주여”라고 간청을 하였다.

이미 주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부르셔서 이스라엘 촌으로 보내시면서 절대로 이방땅이나 사마리아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먼저 이스라엘 백성 그것도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먼저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신 말씀이 있다.

 

“예수님께서 이 열둘을 보내시며 그들에게 명령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방인의 길로도 들어가지 말고 너희는 사마리아인의 어떤 성읍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가라.”(마10:5-6)

 

이렇게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라, 하신대로 부드럽게 거절하셨음에도 여인은 아직도 “주님”하고 부르면서 당당하게 졸라대었다. 여기서 주 예수님은 여인의 미련함과 높은 마음을 낮추고 고통 중에 울부짖을 그녀의 딸을 생각하시어 결정적으로 여인의 콧대를 꺽고 자존심을 깨버리는 파격적인 대답을 하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개들(dogs)에게 던지는 것은 옳지 아니하도다, 하시니.”(마15:27)

 

개들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개들도 하나님께서 창조 하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러한 피조물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하시고 계시는데 성경에 더러움을 비유 할 때에는 돼지와 개를 교훈으로 언급한다. 돼지는 굽은 갈라져 있지만 새김질은 못하니 먹어서는 아니되고(레11:7. 신14:8) 이스라엘은 돼지고기를 먹는 죄를 범하고 있다고 책망도 하셨다.(사66:17) 이미 게르게스 사람들이 돼지목장을 가지고 돼지들을 길렀는데 군대마귀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쫒겨 날 때 그들이 돼지 때들을 택하여 들어갔고 돼지들은 호수에 빠져죽은 사건도 있었다.(마8:28-34)

개들은 어떤 짐승들인가? 주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단수로 너만 ‘개(dog)’라고 하지 않으시고 “개들(dogs)”이라고 복수로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너뿐만 아니라 나를 모르는 모든 세상 사람들, 아니 앞으로 나를 배반할 유대인들 까지 다 개와 다를 바가 무엇이냐?‘ 라는 어조로 말씀하셨다. 당시는 가나안 사람들만이 개들이었지만 나중에 예수님을 거절하고 나무위에 달아 못 박으라고 하나님의 아들을 배반 한 유대인들도 개들에게 합류했다. 그리고 개는 모든 동물 중에 가장 더럽고 추한 상징으로 비유된다.

 

“이는 개들(dogs-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나를 애워싸고 사악한자의 무리들이 나를 둘러쌌으며.”(시22:16)

“개들(dogs)을 주의하며 악한 일꾼들을 주의하며 살을 베어 내는 자들을 주의하라,”(빌3:2)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의 헌데를 핥더라.”(눅16:21)

“그러므로 참된 잠언대로 개가 그 자신의 토해 낸 것에 다시 돌아가고..”(벧후2:22)

“그러나 개들과 마술사들과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거짓말을 좋아 하고 지어내는 자마다 다 그 도성 밖에 있으리라.”(계22:15)

 

개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개는 우선 자신이 토한 것을 다시 먹는다(잠26:11) 사악한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능력에 이끌리어 죄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양심을 달래기 위해서 회개 하는 척하고 용서를 빌면서도 그 죄는 사랑하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어느 정도 용서가 되었다 싶으면 다시 죄를 범하는 행위를 성경은 개라고 말씀하고 있다. 개(dog)의 특징 중에 다른 하나는 더러움과 거룩함의 감각을 상실하였다는 것이다. 선을 악하다, 하고 악을 선하다, 하는(사5:20) 무디어진 양심, 그 죄악의 독에 취하여 중독되어 양심이 그 기능을 상실하고 선에 대한 개념이 잠들어 버린 상태를 개들이라고 부를 수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개들은 사람들의 배설물을 먹는다. 똥이 더러운 줄을 모르고 가장 더러운 것을 먹으면서도 그 더러움을 모르는 것이 바로 개와 같은 것이다. 과거 가나안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다. 가나안 사람들은 온갖 잡신들 특히 태양신 바알을 숭배하였고(출23:24) 가나안의 성생활은 근친상간으로 오염되어 있었고(레18:1-30) 마법술이 넘쳤으며(레19:26,31) 자기 자식들을 불태워 몰렉에게 희생물로 바치는 최악의 악습이 있었다(레20:2.왕상11:7) 성적인 죄가 극에 달하여 수간(獸姦)도 서슴치 않는 악습과(레20:15) 남색(동성연애)도 서슴치 않았다(왕상14:24.왕하23:7) 이러한 죄로 물들어진 바로 그 가나안 지역 두로와 시돈 지역 이고 태양신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시리아 지역의 여인이 감히 하나님의 아들을 ‘주여, 라고 부르는 신성 모독죄를 범하고 있었으니 주님께서 그 여인에게 개들(dogs)이라고 부르신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개는 구약에서도 더러움의 상징이고 가장 낮은 동물 즉 가치없는 동물로 비유가 된다. 개 같은 자의 소득은 받지 말게 하셨고(신23:18) 개처럼 물을 핥아 먹는 자는 기드온 삼백용사에 들지 못하며(삿7:5) 골리앗은 다윗이 자신을 개처럼 여긴다고 욕을 했으며(삼상17:43) 다윗은 사울왕에게 자신은 한낮 개와 같다, 고 표현하였고(삼상 24:14) 므비보셋은 자신이 개중에서도 죽은 개 같은 자신을 돌아보는 다윗왕에게 감사하였고(삼하9:8) 이스라엘을 가장 타락 시킨 이세벨을 저주를 상징하는 개들이 시체를 먹었다.(왕하9:36)

자신을 낮추는 데 가장 낮추는 마음은 ‘죽은 개’로 여기는 마음이며 그나마 산자의 행복을 비유할 때는 죽은 사자보다 살아 있는 개가 행복하다고 솔로몬은 말하였다.(전9:4)

오늘 날 자신이 더러운 죄인이면서도 그 삶이 하나님이 없는 지옥에 속한 삶이며 자신의 죄가 예수님의 머리위에 가시넝쿨을 쓰게 한 죄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마음이며 자신의 손과 발로 범한 죄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손과 발을 나무위에 달아 못 박은 죄라는 사실을 모른 것이 바로 개들이며 만물보다 더럽고 사악한 자신의 마음에서 온갖 죄가 나와서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마치 배설물을 먹으면서도 그 배설물이 더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개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가나안 여자뿐만 아니라 오늘도 회개하지 않는 모든 죄인들이 더러운 개들(dogs)인 것이다. 이스라엘 풍 습에서 개들은 집에서도 키워서도 아니 되고 집안에 들어와서는 더더욱 아니 되고 개고기를 먹어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었다. 오늘 당신은 겉모습은 사람이라 할 지라도 속 중심은 죄로 얼룩진 개와 같지는 아니한가? 차라리 동물인 개들은 더럽게 살지언정 영혼도 없고 양심도 없어서 행복할 지로다!

 

부스러기라도 주옵소서

 

“그 여자가 말씀드리기를, 주여 참으로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자기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들을 먹나이다, 하매”(마15:27)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냉정 하게도 자신을 멸시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인 이스라엘 사람들 위에 차려진 생명의 빵으로 이스라엘의 구주이시지만 이렇게 야비할 수가 있을까? 이방인여인으로서 참아 성지 이스라엘 땅으로 갈 수 없어서 모처럼 이곳 두로 시돈지방에 오신 예수님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어 찾아와서 사정을 하고 애걸을 했음에도 그냥 거절이나 하시지 ‘개들’이라고 경멸하시면서 상처를 주시다니, 생각 같아서는 온갖 욕을 다 퍼붓고 침을 뱉고 돌아서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참으로 모정(母情)이란 것은 죄인들의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로서 지금도 울부짓고 신음 하는 내 사랑하는 딸을 저대로 죽게 할 수는 없다. 개라고 하신들 어떠하며 쓰레기라고 모멸하신들 어떠하랴? 차라리 구데기라고 하신다 해도 내 딸만 고쳐 준다면, 어떠하리, 하는 심정이었지만 그녀는 “개“라는 말씀에 비로소 정신을 차린 것이다. 아 내가 태양신을 숭배하고 온갖 우상을 섬기면서 얼마나 더러운 개같이 죄를 밥 먹듯이 하면서 살아 왔던가? 울고 싶고 부끄러워서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자신이야 말로 진정 개 같은 죄인이었다.

 

“그러하나이다. 저는 개 중에도 ’똥개”이옵니다. 아니 죽은 개와 다를 바 없나이다. 내 딸이 흉악한 마귀가 들린 것은 전부 저의 죄 때문이고 불순종 탓이옵니다. 사실 저의 어린 딸이 무슨 죄가 있사옵니까? 제 양심이 저를 고발하고 있나이다. 네 저는 하나님 앞에 정말로 더러운 죄인이옵나이다! 그 뿐만 아니라 제 마음속에는 죄를 사탕같이 입에 머물며 죄를 사랑하면서도(욥20:12-14) 그 죄가 제 딸을 고쳐주지는 못했는데도 지금도 저의 마음은 숨은 죄를 사랑하고 있고 단지 주 하나님의 아들,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주님의 전능하심만을 이용하려고 왔나이다.“

 

그녀는 속으로 울고 있었고 주 예수님은 그녀의 마음을 알고 계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는 개들을 기르지 않지만 이방인 두로, 시돈 지방 사람들은 개들을 기르고 있었다. 여인은 개들도 그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사오니 주님의 말씀처럼 자녀의 빵을 개들에게 주실 수 없으시다면 개만도 못한 제가 개를 길러보아서 알듯이 주인의 식탁에서 부스러기는 늘상 떨어지고 개들은 그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그와 같이 이스라엘을 다 먹이시고 부스러기라도 있다면 그 은혜로 저의 가엾은 딸을 고쳐 주옵소서. 여기서 여인은 두 가지 마음을 가졌다. 우선 어떻게든 자신의 딸의 마귀를 쫒아내서 고쳐야만 하겠다는 일념과 주님께서는 반드시 그 능력 있는 일을 하실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자신은 비록 개 같은 죄인이지만 부스러기 은혜라도 천부당만부당 감사하다는 믿음이었다. 그녀가 주님의 마음을 움직여 응답을 받은 것은 바로 개같이 낮아진 마음이고 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떤 수모를 겪더라도 고쳐야 하겠다는 집념과 예수님은 고쳐주시는 분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녀는 개라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주여’라고 불렀던 것은 개들이라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부스러기를 받아먹는 피조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자신의 위치를 낮추면서도 개라도 부스러기 은혜를 받는 존재라고 시인하였을 때에 그녀에게 응답하셨다. 부스러기들(crumbs)은 그리스어로 프시키온(psikion-ψιχίον)이라고 하는데 일부러 쪼개어 만든 것이 아니라 먹다가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말한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정말 가치 없는 부스러기였던 것이다. 오늘도 세상 사람들이 그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 까지도 삶에서 그렇게 여기고 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너의 소원대로 될 지어다, 하시니 그녀의 딸이 그 시각부터 온전해 지니라.”

(마15:28)

 

주님께서는 갈릴리 호수 근처에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데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면서 구원의 복음을 듣고 있었다. 그렇게 삼일 동안을 말씀을 듣다가 그날 저녁쯤에 군중들은 굶주리기 시작하였고 그들에게 큰 이적을 보여 주셨는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여자 아이들을 제외한 남자만 오천 명이나 먹이시는 기적이었다. 여기서 어린아이가 간식으로 먹는 보리빵 두 개 그리고 피레미 같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명이나 되는 군중을 먹이시고 그 빵이 너무나도 많아서 여자와 아이들까지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빵 조각만 열두 바구니에 가득하였다.

 

“..그분께서 축복하시고 빵을 떼시어 자신의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매 그들이 다 먹고 배불렀으며 남은 조각들을 모으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고 먹은 사람들은 여자와 아이들 외에 남자만 오천 명쯤 되었더라.”(마14:19-21)

 

이스라엘 백성들은 음식을 사먹을 겨를도 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주님은 한 어린아이의 음식을 받으시고 축복하시고 그분의 손으로 그 빵을 찢으셔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제자들은 다시 빵을 쪼개서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데 부스러기 조각들은 본래 주님의 뜻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기들인데 그 빵은 정식으로 막는 고운 밀가루 빵이 아니라 배고프고 가난한자들이 먹는 가난한자들의 보리빵(요6:9)이였다. “그 분께서 축복하시고 빵을 떼시어..”(마14:19) 배부른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이란 의에 배가 불렀으며 천덕한 보리빵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배불리 먹었으며 삼일간을 굶었으면서도 귀중한 음식을 낭비한 것이다.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영생의 만나 예수 그리스도이신 생명의 빵을 구원의 식탁에서 소홀이 다루고 가치 없는 보리빵 같이 여겨 부스러기 취급을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버리고 쪼개고 여기저기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은 버린 것이 없게 하라고 거두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들이 배부른 후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남은 조각들을 거두어 잃어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니.”(요6:12)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스러기를 버렸고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부스러기들을 주워 모았다. 한번은 열두 바구니에, 그리고 사천 명을 먹이실 때에 일곱 바구니에 모았다. 그 부스러기는 아무나 받아먹지 않는다. 오히려 왜 줄려면 좀 좋은 것을 주지 나를 뭘로 알고 이따위 부스러기를 주느냐? 고 화를 낸다. 율법의 의에 취한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다. 그 율법 종교인들이 버린 천박한 보리 빵 부스러기들은 식탁아래 쪼그려 앉아 눈을 뜨고 혹시 떨어지는 한 톨이라도 받아먹으려는 준비된 죄인들의 몫이었다. 그것이 바로 가나안 여인이었고 오늘 하나님 앞에 회개한 죄인들의 믿음인 것이다. 율법에 배가 부른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보리빵 부스러기 취급해서 발로 차버리고 짓밟아 버렸기에 오히려 훗날 의에 주려 지옥으로 떨어졌다.

 

“배부른 너희에게 화가 있으라! 이는 너희가 굶주릴 것임이요, 지금 웃는 너희에게 화가 있으라! 이는 너희가 애통하고 울 것임이라.”(눅6:25)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천대하고 나사렛 땅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요1:46)멸시하고 나사렛고향에서 성읍 밖 낭떠러지로 밀어서 살해하려고 하였으며(눅4:29) 군대마귀 들린 돼지 때들을 잃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요구하였고(마8:34)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은 발 씻을 물도 드리지 아니하고 그 흔한 감람유도 드리지 아니하고 주님을 보리빵, 그것도 부스러기 취급을 했다. 사마리아 사람들까지도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성취하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고 하니 주님을 배척하였다.(눅9:51-53) 제자들이 열두 바구니에 남은 부스러기 조각들을 천박하게 여겨 버려두고 온 것처럼(마16:7)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실 때에 그들 역시“그때에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려두고 달아 나니라.”(마26:56)는 말씀 같이 주님을 부스러기 취급하고 버렸다. 술 관원장이 요셉을 2년 동안이나 입어 버렸던 것 같이(창41:1) “..우리도 그분을 귀하게 여기지 아니 하였도다.”(사53:3)

병자들을 고쳐주시면 바알세붑을 통해 고친다고 비방하고 안식일에 환자들을 고쳐주시면 율법 계명을 파괴하는 자라고 비판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가나 환영받지 못하고 심지어 육친의 동생들까지도 멸시하고 비웃으며(요7:3-5) 보리빵 부스러기 취급을 하였다. 끝내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를 나무에 달아 못 박으소서”(눅23:21) 하고 발로 짓밟고 배척해 버렸다. 이것이 가인의 종교를 따르며 율법을(롬9:30-33) 따른 자기 의에 배부른 자들의 횡포인 것이다.

 

찢겨지신 예수님

 

“제자들이 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취하셔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받아서먹으라. 이것은 나의 몸이니라...이는 이것이 죄들을 사함받게 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이기 때문이니라.”(마26:26-28)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찢겨진 내 몸이니 받아먹으라...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유언이니..”(고전11:24-25)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사53:5)

“..그분께서 체찍에 맞으심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벧전2:24)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고(레17:11) 피 흘리심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보혈은 반드시 흘리셔야만 하셨다. 피를 흘리시려면 주님의 몸이 먼저 찢겨지셔야만 한다. 그러므로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을 행하실 때에 주님께서는 먼저 하늘에 감사와 축사를 하신 후에 빵을 손으로 찢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주님의 몸이 찢기심을 당하실 예표였다.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부스러기라도 감사합니다” 라는 믿음으로 응답을 받은 때가 보리빵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시고 난 후였고 다시 갈릴리호수 근처 산에서 복음을 전하시고 두 번째로 사천명을 먹이시는 사이에 있었던 사건이다.(마15:32-39) 두 번씩 이적을 행하실 때에 모두 빵을 떼어서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 두 번 다 남은 부스러기 조각들을 버리지 않게 하시고 바구니에 담게 하셨다. 그 남은 바구니에 담긴 빵들은 다 부스러기 조각들뿐이다. 그 부스러기 빵 역시 의에 배가 부른 사람들은 결코 먹지도 않고 먹으려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 이후로는 빵의 기적 사건은 없었다. 그것은 앞으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자들은 열 두 바구니와 일곱 바구니 안에 있는 부스러기 조각 빵들을 먹으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 즉 죄 때문에 사무치게 의가 그리운 자들은 탕자같이, 세리같이 가나안 여인같이 옳소이다, 부스러기라도 천부당만부당 감사하옵나이다. 하고 믿음으로 먹어 영생을 선물로 받을 것이다. 피가 흐르려면 먼저 살이 찢겨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만찬에서 먼저 빵을 떼신 것이다. 목적은 피를 흘리시기 위함이다. 왜냐면 피가 생명이기 때문이다. 유월절 어린양도 육고기는 안에서 가족들이 만찬으로 먹었지만 문설주와 양 기둥에 살고기는 붙이지 않고 어린양의 피만 뿌리게 하셨다.(출12:13,23) 육은 무익하기 때문에(요6:63) 육은 부숴져야만 하고 찢겨져 죽어야 피를 흘리게 되는 것이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마음이 부서지셨고 찢겨지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 들어오실 때에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을 포기 하실 때에 찢겨지셨고(빌2:6-8) 가장 가난하고 이름없는 목수의 집의 가정으로 오시고 구유에 뉘이실 때에, 그리고 나신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으시고 피를 흘리실 때에 처음으로 우셨으며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시키셨으나 세 번이나 부인한 배드로를 볼 때에, 삼년 육개월 간이나 따라 다녔던 가롯 유다가 발꿈치를 들 때에(시41:9) 그리고 베다니 나사로가 죽어 사람들이 울어 주님도 함께 우실 때에,(요11:35) 장차 멸망할 예루살렘을 보시며 슬피 우실 때에(눅19:41) 유월절이 임박하여 이방인 그리스인이 주님을 찾아왔을 때에 도 그분의 마음은 부서지시고 찢겨지시어 부스러기가 되셨다.

 

“지금 내 혼이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리요?”(요12:27)

 

겟세마네 동산에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외롭게 홀로 세상 죄악의 쓴잔을 마실 때에 피땀이 흐르시는데도 철없는 제자들은 남의 일같이 깊은 잠에 떨어져 있을 때에,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옵소서”(마26:39)

 

주님께서 세우신 율법 앞에 스스로 어린양이 되셔서 그분의 율법 앞에 정죄 당하실 때에, 율법을 이루러 오신 주님께서 율법에 따른 대제사장 앞에 순종하는 어린양같이 죄인으로 심문을 받으실 때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태양신을 숭배하는 이교도 구역인 빌라도 법정 앞에 서실 때에, 병고쳐주고 배고플 때에 빵을 주시고 암탉이 날개아래 병아리를 품듯이 그토록 사랑 하셨던 자기의 백성들이(요1:11) 침을 뱉고 얼굴을 주먹으로 치며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겠다는 자여, 그 십자가위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할 때에, 주님의 마음은 고운 가루로 소제(素祭)가 되셨으며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유향(乳香)이 되셨다(레2:1) 그리고 마지막 나무위에 강도들 같이 취급당하시고 영혼을 아버지께 의탁 드리며 운명하시기까지 주님의 마음은 율법의 맷돌에 희생의 고운가루 부스러기가 되시고 찢겨지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부스러기 복음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나의 모든 뼈들은 어그러졌고 나의 심장은 밀초(蜜炒)같아서 나의 내장 중심에서 녹았나이다.”(시22:14)

“많은 사람들이 너를 보고 놀랐듯이(그의 얼굴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의 아들들보다 더 심히 상하였도다)”(사52:14)

 

⦿ 예수 그리스도는 그 거룩하신 육신 또한 부서지고 찢겨지셨다.

 

주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 요셉의 장자로 오셔서 헐벗으시고 가나하신 삶을 살으셨고 아버지를 도와 열심히 가정을 섬기셨으며 공생애 시작하실 때에 성령님으로 인치심을 받으시고 사십 일간을 물 한모금 마시지 아니하시고 심한 굶주림에서도 마귀의 유혹을 이기셨다. 하루도 쉬지 못하시고 이스라엘 지역을 다니시며 수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제자들을 교육시키시고 최후의 유월절에 다락방에서 유월절을 성취하시되 밤새워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피곤하신 중에 골고다의 고뇌어린 기도를 드리셨으며 어둡고 음산한 새벽녘에 횃불과 창칼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어제까지도 제자였던 가롯 유다가 군인들을 이끌고 가증한 입맞춤을 하여 체포되셨지만 제자들을 먼저 피신하게 하시고 가늘고 질긴 노끈으로 두 손을 뒤로하여 손가락 마디사이로 결박당하시어(막15:1.요18:12)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흐르고 있는 상태로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 앞에 세상죄를 짊어지신 수소, 염소, 어린양 희생 예물로 서시고 심문을 당하셨다. 거기서 대제사장 앞에서 불손하게 말씀하셨다는 것 때문에 대제사장의 종의 손바닥으로 빰을 맞으셨다.(요18:22) 신성모독이라는 대제사장의 선동에 답하여 군중들은 사형에 합당하다고 판결하고 서로 앞 다투어 주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종들은 손바닥으로 때리기도 했다. 성난 군중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오자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 예루살렘에 와있던 갈릴리 분봉왕 헤롯에게 보낸다. 헤롯은 주님을 경멸하고 화려한 예복을 입혀 다시 빌라도에게 보낸다. 빌라도는 놓아주려고 애쓰다가 유대인들이 로마황제 카이사르 외에는 왕이 없다는 말을 듣고 결국 나무위에 달아 못 박도록 내어준다. 먼저 예수님의 몸을 벌거벗기고 돌기둥에 매어 달고 가죽 손 자루에 15-25가닥의 가죽끈이 달린 채찍으로 내리치기 시작하였다. 그 가죽 끈에는 뼈다귀조각이나 돌조각 그리고 유리조각등 날카로운 꼬챙이 같은 것들이 매듭으로 묶여 있었고 분노한 로마 병사들이 사정없이 내리칠 때마다 채찍 가닥들은 얼굴, 목, 팔 다리, 등허리, 앞가슴 할 곳 없이 몸에 바싹 달라붙었다가 다시 잡아 챌 때 마다 그 부드러운 살점들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피가 사방에 튕기고 채찍질하는 병사의 얼굴에도 튀고 주님의 얼굴에서부터 목으로, 그리고 가슴에서 배로, 등허리로 뜨겁고 붉은 보혈이 주루룩 주루룩 흐르기 시작하였다. 채찍이 살점을 파먹을 때마다 단말마적인 비명을 지르셔야 하지만 입술을 굳게 다무시고 “지금 온 세상 죄인들의 지옥형벌이 내게 내려지고 있다! 나는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어린양이로다!” 는 심정으로 참고 참으신 주 예수님 털 깍는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않으신 주님(사53:7) 이스라엘은 신명기 말씀대로 40대(신25:3.고후11:24)만 맞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노예들에게 내리치는 세배의 채찍 120대의 채찍에 주님은 기진하시기 직전이셨다.

총독의 병사들이 주님을 총독관저 안으로 끌고 가서 쓰리고 아픈 상태로 피로 얼룩진 옷을 벗기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홍색 옷을 입히고 손가락만큼 길이의 날카로운 가시들이 달려 있는 넝쿨로 왕관을 만들어 예수님의 머리위에 눌러 쒸우니 머리에서 붉은 피가 이마로 얼굴로 눈을 가리우고 흐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침을 뱉으며 주님의 손에 쥐어주었던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치고 조롱을 다 한후 다시 피로 얼룩진 옷을 벗기고 그 쓰리고 고통스러운 몸에 살아 있는 나무에 달리시기 위해 우악스럽고 울퉁불퉁한 통나무를 주님의 어깨로 메시고 히브리어로 해골의 처소 곧 골고다로 걸어가시다가(요19:17) 쓰러지시고 또 쓰러지시다 결국 구레네 시몬에게 그 통나무를 강제로 지고가게 하여 골고다 살아 나무 밑에서 예수님을 눕히고 양 손목을 통나무위에 얹더니 손가락보다 더 길고 녹슨 대못을 대고 망치로 내리쳐서 못을 박더니 서 있는 나무위에 올려서 주님께서 못 박힌 채로 통나무를 못 박아 고정시키고 다시 주 예수님의 발목을 포개더니 손가락 두배 길이의 녹슬은 대못으로 발목위에 망치질해서 나무위에 못 박히셨다. 머리에서, 얼굴에서, 가슴에서, 손목에서, 온몸으로, 그리고 발목에서 발등으로, 발가락에서 떨어지고 흐르는 피투성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세상 죄인들의 저주를 대신 내리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대속하셨으니 이는 기록된바 나무 위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라, 하였기 때문이라.”(갈3:13)

“예수님께서 큰 음성으로 부르짖으시며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여, 내가 나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하시고 영이 떠나가시니라.,”(눅23:46)

 

십자가위의 일곱 말씀은 가장 빛나는 보석 같은 말씀이다. 그 고난의 나무위에서도 오른쪽 강도의 영혼을 구원하신 주 예수님, 아침부터 흐르는 피는 심한 갈증을 유발하였지만 진통제로 올린 쓸개 탄 식초를 입에만 대시고 마시지 않으신 이유는 마지막 한사람의 고통까지 다 담당하셔야 다 한사람의 형벌도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셨다. 그리고“그것을 다 이루었다”(요19:30) 하시고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시고 영혼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셨다. 양쪽 강도들의 무릎을 꺽은 다음 로마병사 롱기누스가 주님의 옆구리에 창을 찌르자 피와 물을 쏟으셔서 의에 주리고 배고픈 죄인들의 생명이 되어 주셨다. 이제 나무위에 달리신 주님은 두 팔을 벌리시며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기다리시며 부활 하셔서도 손목 발목 옆구리에 상처를 가지고 계셔서 열두 바구니에 가득 담기신 복음으로, 일곱 바구니에 가득 담기신 생명의 빵 조각으로 여전히 의에 굶주린 영혼을 초청하신다.

 

상한 심령의 양식

 

“하나님의 희생물은 상한 영이라. 오 하나님이시여, 주님께서는 상하고 죄를 뉘우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리요?”(롬7:24)

 

백성들이 다 배불리 먹고 부주의로 남은 부스러기들은 우선 보리빵 부스러기들이다. 원래 유대인들은 아주 가난한 사람들을 지칭 할 때는 ‘보리빵 먹는 사람’이라고 비웃는다. 거기다가 부스러기들이다 개들만이 먹는 부스러기 조각빵은 아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기 의에 배부르고 자신은 지옥에 떨어 질만한 죄가 없다는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부스러기 빵 이다. 그 빵 부스러기들은 탕자 같은 죄인의 눈에 들어오고 세리 같은 심령의 눈에 보인다. 주님께서 남은 부스러기빵 조각들을 잃어버린 것이 없게 하라, 고하신 뜻은 신약시대에 두고두고 죄인들이 엎드려 감사하게 먹고 영생 얻을 복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영혼, 자신의 죄 때문에 자신이 미운심령, 자신의 죄를 살피느라 다른 사람의 죄는 미쳐 생각할 틈이 없는 사람들, 심판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이라도 달게 받아야한다는 책임을 통감하는 죄인들, 어떻게든 죄를 핑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꾸미지 아니하고 두 손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릎 꿇고 회개하는 심령, 주 예수님께서 갈기갈기 찢겨지시고 부서지시고 부스러기가 되신 것은 나를 위하신 지극하신 사랑 때문이라고 믿고 나오는 심령들에게 보이는 복음이다. 부스러기 빵은 부스러기 심령의 눈에만 보이고 부서지고 찢겨지신 예수님의 보혈은 역시 자신의 죄 때문에 부서지고 찢겨진 심령에만 필요하고 보리빵이라도 감사하오며 부스러기 보리빵이라도 감사하기 그지없다는 감사와 찬양을 가진 심령들에게만 달고 오묘한 복음이 되는 것이다.

 

“신실하도다, 이 말이여,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하니,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도다, 한 것이라. 죄인들 중에서 내가 우두머리로다.”(딤전1: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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