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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은 세계정부의 전략

  • 관리자 (ehompy0429)
  • 2014-05-26 13: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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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세계 질서 파일       -

 

한국이 무너지다

 

1910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일본 식민제국의 일부였다. 세계 2차 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군은 한국이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협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미국이 북위 38도의 남쪽 지역을 관리하였으며, 한편 북쪽 반은 소련연방이 점거했다. 단일화된 한국 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은 실패했으며, 1948년에 서로에게 적대적인 정부가 세워졌는데: 북쪽에 있는 김일성의 공산주의 정부와 남쪽에 있는 이승만 치하의 친 서방 정부가 그것이다.

 

남한의 장교 훈련 학교와 소규모 무기 공장이 미국에 의해 지어졌다. 그들은 96,000명의 남한군을 무장시키기 위해 1억불 상당의 군사 무기를 남한에 제공했다. 1949년 7월 17일에 오웬 라티모어(Owen Lattimore)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해야 할 일은 남한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서두르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국무부에 보내는 메모 가운데,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미국은 남한에 대한 연루에서 가능한 한 신속히 벗어나야 한다.” 1949년에 미국군은 남한에서 철수했으며, 1950년 1월 12일자 연설에서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G. Acheson)은 남한이 “(미국의) 방어 한계 밖”임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러시아에 의해 중무장한 북한은, 애치슨의 발표를 공산주의 하에 나라를 통일하기 위한 공격 초대로 간주했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챨스 윌로그비(Charles A. Willoughby) 장군으로부터 북한이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는 군사정보 보고서를 받았고, 국무부의 존 덜레스(John Dulles)가 ‘조사’를 위해 떠났는데 그는 그가 북위 38도에서 목격한 움직임을 은폐했다.

 

6․25 남침

 

1950년 6월 24일, 북한군들은 떼를 지어 38도선을 넘었으며 남한을 쳐부수기 위해 진격했다. 이승만은 미국에 호소하였으며,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수도인 서울을 포위하자 유엔에 도움을 청했다.

 

트루먼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즉각적인 모임을 요청했으며, 그 다음날 회의가 소집되어 그 공격을 “평화 위반”으로 명명하고 북한에게 국경 밖으로 물러날 것을 명령했다. 이틀 후, 안전 보장 이사회는 유엔 회원국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미국은 즉시 지상군을 파병했으며 공습을 시작했다. 7월 7일, 안전 보장 이사회는 그 중 15개국에게 그들의 군대를 유엔군 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에게 맡겨 미국이 마음대로 하도록 촉구했다.

 

9월 15일 인천항에 맥아더의 상륙 작전이 있은 후, 유엔군은 서울을 탈환할 수 있었으며, 북한군은 국경 너머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10월에, 그들은 북한의 수도인 평양을 점령했으며 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은 만주와 러시아로 후퇴했다. 자국의 안보가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한 중공은 1950년 11월 26일 국경을 넘어 돌진했으며, 유엔군을 압록강에서 저지했다.

국제연합이 전쟁에 연루되면서, 미국의 모든 전투 계획은 승인을 얻기 위해서 사전에 정치 안보 위원회 사무국 부총장에게 제출되어야 했다. 1945년에 국무장관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Edward Stettinius)에 의해 체결된 비밀 합의에 의해, 그 자리는 언제나 동유럽 출신의 공산주의자로 채워졌다. 전쟁 기간에 그 자리는 러시아의 콘스탄틴 진첸코(Constantine Zinchenko)가 채우고 있었다. 러시아의 군사 고문들이 북한의 전쟁 노력을 실제 지휘하고 있었다는 것이 후에 밝혀졌으며, 그와 같은 고문 가운데 한 명인 알렉산드르 바실레프(Alexandre Vasiliev) 중장이 사실상의 공격 명령을 내렸다. 바실레프(Vasiliev)는 유엔 군사 참모 위원회의 의장이었는데, 그는 부총장 및 안전 보장 이사회와 함께 유엔의 모든 군사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바실레프는 공산주의자의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그의 직무에서 휴가를 내야만 했다. 그리하여 결국 공산주의자들이 전쟁의 양측을 통제하게 되었으며, 러시아는 한국에서 유엔군 내부의 모든 군대 이동에 관한 극히 중대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이 북한과 중공에 전달되었다.

 

대만의 본토 탈환 방해

 

대만 정부는 중공에 대한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트루먼은 장개석에게 고국 탈환을 시도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트루먼은 어떠한 형태의 침공이라도 막을 수 있도록 미국 제7함대가 대만 해협에 들어가도록 명령했다. 이것은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을 용이하게 해주었다. 장개석은 북한을 대항해 33,000의 선발대를 보낼 것을 제안했지만, 국무부는 이를 거절했다. 그들은 유엔의 회원국이었으나 미국은 그들이 싸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었다.

 

때때로 한국 전쟁, 한국 분쟁 혹은 국지적 군사행동(Police Action)으로 불리는 그 전쟁은 정전 합의의 파기라는 궁지에 다다랐으며, 맥아더는 중공에 대한 대규모 보복 계획을 세웠다. 그는 탄약과 연료의 임시 집적소, 보급 기지, 중공과의 통신선(압록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을 폭격하기를 원했으며, 중공 해안 주변에 봉쇄망을 배치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1950년 12월 5일, 트루먼과 다른 정부 관료들은 그와 같은 성격의 행위가 러시아를 분쟁에 끌어들여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것이라고 판단했다. 맥아더는 그의 어떤 계획도 진행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합동 참모 총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맥아더 장군이 촉구한 행동은 어떤 확실하고 타당한 이익을 약속하지 못하며, (미국의) 안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참전한 중공군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전모를 밝히는, 어느 하원 의원에게 쓴 맥아더의 편지가 의회 의원석에서 낭독되었다. 그러나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중공군 사령관인 린 파오(Lin Piao) 장군은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맥아더가 내 보급선과 통신선에 대해 충분히 보복적인 대책을 세우지 못하도록 워싱턴이 제지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그 공격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내 병사들과 군대의 명성을 위태롭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것도 승리를 대신해줄 수 없으며 공산주의에 맞선 한국 전쟁에서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고 강력히 주장한 맥아더의 경우, 외교 위원회 (CFR) 성원인 Matthew B. Ridgeway 장군에 의해 1951년 4월 11일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

 

공군 사령관인 죠지 스트레트메이어(George Stratemey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압록강 반대편에 있는 그들의 모든 보급품 및 비행장을 무력화시키기에 충분한 공중 폭격을 할 수 있었고 전투기와 정찰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나는 압록강과 봉천(Mukden)사이의 적을 포격할 수 있었으며 철도 운영을 저지하여 교전 중에 있는 중국인들이 보급을 받지 못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수많은 미국인들의 피가 한국의 전쟁터에 쏟아졌다.

 

스트라트메이어 장군은 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여러분은 이기려고 전쟁에 참여합니다. 여러분은 정전하고 지기 위해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쟁에서 지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기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매트 클락(Matt Clark) 장군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적이 수시로 트럭과 군수품과 살인자들을 건너보내는, 다수의 압록강의 다리들을 폭격하도록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의 비통

 

맥아더는 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나의 공군의 가능성을 크게 축소시키는 워싱턴이 내린 일련의 명령들에 고민했다. 우선 나에게는 우리 소유를 공격한 적기에 대한 ‘월경’ 추격이 금지되었다. 만주와 시베리아는 그곳으로부터 어떠한 약탈이나 습격이 자행되더라도, 모든 적군의 그리고 적의 모든 목적으로부터의 공격을 받지 않는 보호의 성역이었다. 더구나 나는 압록강을 끼고 있는 수력 발전 시설을 포격할 권위도 거부당했다. 그 명령은 만주와 시베리아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북한의 모든 시설을 포함하기까지 확대되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만주와 시베리아가 아니라 국경에서 수 마일 떨어져 있으며 북한군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로부터 보급품이 전달되고 있는, 라친(Racin)의 주요 보급 센터를 폭격하는데 대한 거부였다. 나는 나의 무기들이 내게서 단계적으로 제거되고 있음을 느꼈다...”

 

“정보에 다소 허점이 있었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명백하다. 월톤 워커(Walton Walker) 준장은 작전이 워싱턴의 정보통을 통해 적에게 미리 알려지고 있다고 나에게 계속 불만을 표시했는데... 압록강의 다리는 성역의 지위를 계속 누릴 것이며, 그들의 기지가 온전할 것이라는 보증을 해주는 정보가 그들에게 중계된 것이 틀림없다.     

 

미국인 33,000명이 그들이 이기도록 허락되지 않은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 대신, 1953년 7월 27일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한국인은 2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 역자 주)

 

 

제 2차 한국전쟁은?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한국을 포기하지 않았다. 중국, 러시아, 동유럽 공산권 국가에 의해 지원을 받고 있는 북한의 경우, 그들은 군사력을 증강시켰으며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1960년대 후반기에, 그들은 한국의 재통일을 위해 대화를 시작했으며 1972년에는 그들의 유대를 더욱 발전시키는 쌍무 회담이 개최되었는데,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외교적 접수를 시도한 것이었다.

 

내각의 고위직을 점하고 있는 공산주의 스파이에 대한 정보가 표면화되었기 때문에, 미국 국민들은 투표에서 그들의 실망을 드러냈다. 아이젠하워의 표어는 “워싱턴의 혼란을 깨끗이 하자”였다. 그는 한국에서의 “명예로운 강화(講和)”를 약속했으나 휴전은 400명의 군인을 공산주의자의 감옥에 남겨두었다. 1952년의 공화당 정강은 트루먼의 계획을 “적과의 수치스러운 거래”라고 불렀으나, 실제로 아이젠하워의 계획이 오히려 더 많은 양보를 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아이젠하워의 거친 수사적 표현은 미국에 애국심이 갱신되는 길잡이가 되었다. 철의 장막 뒤의 사람들은 자극을 받았으며 1956년 가을에 헝가리의 자유 투사들은 소련 점령에 종지부를 찍으며 러시아인들이 그들의 고국으로 떠나게 만들었다. 미국은 무슨 일을 했는가? 1960년 8월 31일자 의회 기록에 의하면, 미국 국무부는 소련 연방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미국 정부는 소련 연방의 국경에 대하여 소련 연방에 비우호적인 정부를 호의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1956년 12월 4일에 그 전보를 받은 지 얼마 후, 흐루시초프는 헝가리를 되찾기 위해  러시아 군대를 그 나라에 다시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젠하워는 폴란드와 유고슬라비아의 공산주의자 정부들에 대해 대외 원조 계획을 시작하였는데, 그 나라들은 1961년까지 식량, 산업 기계, 제트기, 기타 군사 장비를 30억불 가량 지원 받았다.

 

1956년 6월,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는 미국이 마샬 티토(Marshal Tito)에 대한 그들의 원조를 중단한다면,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의 우리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2주전에 티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쟁에서처럼 평화가운데서도, 유고슬라비아는 소련 연방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나아가야 한다.” 9월 17일, 티토는 소련의 외교 정책에 대한 그의 온전한 지지를 표명했다. 한편, 미국의 원조는 유고슬라비아가 세계의 후진국에 공산주의를 보급하기 위해 그들 자체의 대외 지원 계획을 시작한 1961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아이젠하워의 두 번의 임기가 끝나갈 무렵, 공산주의자 및 ‘중립주의자’ 국가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원조 금액은 70억불에 달했다. 1961년 2월 25일판 사람들의 세상(People's World)과 1961년 3월 10일자 타임(Time)지에서 반공산주의자 존 버치 협회(John Birch Society)의 창설자인 로버트 웰치(Robert Welch)는 아이젠하워 정부가 공산주의자들의 도구였다고 비난했다.

 

[6․25 전쟁은 해방직후부터 ‘공산화 통일 한국’을 만들기 위한 의도된 전쟁이었고, 맥아더 장군은 중공까지 폭격하여 북진통일을 하려 하였으나 미국 내 세계정부주의자들(배후는 제수이트)에 의해 저지당하고 전격 해임 당했었다. 미완성의 ‘공산화 한반도 통일전략’은 이제 불원간 또 다시 시도되려 하고 있다. - 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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