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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종교재판

  • 관리자 (ehompy0429)
  • 2014-05-26 13: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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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종교재판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살던 사람들에게 닥쳐진 공포로 알려져 있다. 원래 종교재판은 이단들로부터 국가를 정화하고자 세워진 것이지만, 그것은 점차 단순한 정화보다는, 보다 유물론적이고 인종주의적이고 정치적인 동기를 지닌 실체로 변질되어갔다. 일반적으로 종교재판의 시작은 페르디난드(Ferdinand) 5세와 이사벨라(Isabella) 여왕의 통치 때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전에 이미 세워져서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가 죽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종교재판과 그 뒤의 내막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발생시킨 배경적 문제들을 먼저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유대인들은 종종 부(富)와 관련되어 있거나 그들이 속한 사회에 재앙을 가져다 주는 존재로 여겨져 왔다. 14세기의 스페인에서도 다를 바가 없었다. 세빌레라는 도시에 마르티네스라는 이름의 한 보좌주교가 있었는데, 그는 계속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더러운” 유대인들을 숙청하도록 선동하고 다녔다. 스페인 추기경과 교황에 의한 여러 차례의 망신 끝에, 결국 마르티네스는 성공하게 된다. 슬픔의 수요일에(1391년 3월 15일), 그는 군중들로 하여금 폭동을 일으키도록 선동했다. 폭도들은 떼를 지어 유대인 거주지역(쥬데리아)으로 몰려갔다. 폭동에 참여했던 몇몇 사람들은 치안대에 잡혀서 채찍질을 당하거나 매질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폭동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비록 그들이 그 날 유대인들을 없애버리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마르티네즈가 불어넣은 감정은 여전히 폭발할 기세에 있었고, 결국 6월 6일에 폭도들은 세빌레의 유대인 거주지역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당시 수천 명은 아니더라도 수백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여겨진다(C. Roth, The Spanish Inquisition, 1964). 그 때의 사건 및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다른 몇몇 사건들 이후에, 유대인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그러나 상황은 그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페르디난드 5세와 이사벨라가 결혼했을 때,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은 합쳐지게 되었다. 이 두 왕국은 스페인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들이었다. 당시 스페인은 그 시대의 가장 부유한 국가가 되려는 찰나에 있었다. 그 중 상당 부분은 유대인 공동체 덕분이었다. 보좌주교 마르티네스(Martinez)로 인한 시련 이후에, 많은 유대인들이 학대를 모면하기 위하여 자신들은 앞으로 카톨릭교 신앙을 가지겠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개종자들 중 상당수가, 알려진 바와 같이 실제로 개종했던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그러나 이들 개종자들은 부유하게 되었고 아마도 스페인 사회의 많은 부분들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을 것이다(Roth, 1964). 문제는 비유대인들인 카톨릭 신자들이 원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유대인들이 가져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유대인은 개종한 새로운 신자들로서 부와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카톨릭교도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손도 쓸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어쨌거나 그들은 카톨릭 신앙을 고백한 신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 카톨릭 교회의 교권 조직은 이러한 새로운 신자들 중 몇몇 이단들에 대한 기록과 관련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1478년, “진짜 카톨릭교도들”이 기대하던 일이 벌어졌다. 한 유대인 여인을 연모하던 어느 젊은 기사가 그 여인을 만나러 왔다가 신비스런 의식을 거행하고 있던 유대인들 집단 사이에 개종자들도 함께 하고 있음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그 날은 유월절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이를 경축하기 위해 모였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때가 또한 카톨릭 교회의 성스러운 주간과 겹쳤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급속히 알려졌고 재앙은 불가피해졌다. 불과 몇 달 뒤에, 스페인 카톨릭 교회 지도자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인해 교황 식스투스(Sixtus)는 종교재판을 허가하는 교황 칙령을 공포한다. 그러나 실제적인 권위는 스페인의 국왕에게 주어졌다. 이것은 국왕이 주교들로 하여금 그들이 종교재판을 완수하도록 지시 내리는 꼴이었다. 그래서, 결국 스페인 종교재판은 국가를 이교도로부터 정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세워지게 된 것이다(Roth, 1964). 비록 정화작업이 종교재판의 본래적인 의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점점 유물론적이 되고, 인종주의적인 색채를 띠게 되어 하나의 정치적 움직임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결국 파렴치한 테러였다.

 

스페인 종교재판은 이사벨라 여왕의 요청으로 집행되었다. 그녀는 카톨릭 신앙에 매우 헌신적인 여자였다. 그녀의 조언자들 중 후에 최초의 종교재판소장이 되는 인물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토마스 드 토르케마다(Thomas de Torquemada)였다. 일설에 의하면, 토마스가 아직 어릴 때의 이사벨라를 돌보던 시절에, 그는 그녀로 하여금 후에 그녀가 왕위에 오르면 이단을 근절시키고 유대인들을 없애버리겠다는 서약을 하도록 했다고 한다(Roth, 1964). 그 때가 언제가 될지는 분명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자기가 서약했던 바를 실행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그 외에도, 그녀는 이미 자신이 “하나의 국가, 하나의 통치자, 하나의 신앙”을 추구하고 있음을 밝힌 바 있었다(N. Dirksen and M. Johnson, The Spanish Inquisition's Effect on the Church, 1996).

 

카톨릭 통치자들은 연합 국가를 소유하도록 결정되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통치 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단 하나의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은 자신들의 야망이 성취될 수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이 결정했던 이러한 사항들은 가능하다면 설득을 통해서, 그렇지 않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이루어지도록 만들어야 했다.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드 치하의 스페인은 종교재판을 집행할 만큼 충분히 무르익은 상황에 있었다; 잔인했던 종교재판이 그토록 성행하고 19세기까지 계속되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J. Plaidy, The Spanish Inquisition, 1967, p. 86).

 

아마도 이사벨라 여왕은 정말로 카톨릭 신앙 안에서 이단들을 척결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페르디난드는 그의 아내만큼 신앙에 헌신적이지 않았고 보다 부유해질 궁리만을 했다. 스페인의 해외 원정을 통한 수익들이 아마도 본국의 종교재판에 자금을 조달해주었을 것이다. 세금을 거두지 않고도 자금을 얻을 수 있는 이러한 아이디어는 본래 마키아벨리즘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자신의 주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지우게 해서는 안 되고 또한 자신의 자금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군주는 자신의 왕국을 유지하기 위한 자금을 조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N. Machiavelli, The Prince, 1965). 그러나, 마키아벨 리는 “카톨릭 군주들”이 자급자족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스페인의 종교재판은 그 지닌 특성상 특별히 무시무시했다. 피고소인은 결코 자기를 고소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한번 붙잡히면, 그의 이단적 특성은 반드시 실토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한 이단적 특성들은 처음엔 군주들에 의해 처리되었지만, 나중에 가서는 종교재판소장에 의해 처리되게 되었다. 이러한 점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이유로 혹은 이익을 취하기 위하여 누군가를 고소할 수 있는 빌미를 조장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어떻게 그토록 대대로 부유했던 사람이 지금에 와서 죄를 뒤집어쓴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 놀라워했다”(Roth, 1964, p. 60). 종교재판은 단지 유대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정화하는 데로만 그치지 않았다. 유대인의 피를 찾기 위하여 혈통까지 뒤져지면서 사람들이 고소당했다는 점은 특히 사실이다. 게다가 이제는 카톨릭으로 개종을 했다고 해도 그의 과거 경력 때문에 그토록 모질게 고통을 당해야 했다. 피고소인들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변호사나 상담가를 가질 수 없었다. 그리고 모든 증인들의 이름은 그에게 비밀로 부쳐졌다(Roth, 1964).

 

자백을 얻어내기 위한 고문과 처벌은 종교재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재판 자체는 영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기 때문에 로마 카톨릭 교회가 직접 재판을 담당했다. 그러나 처벌은 상당히 물리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은 국가가 직접 맡았다. 자백을 위해 가해지는 고문에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장 알려졌으면서도 지독했던 고문 방법 두 가지는 도르래 고문과 물 고문이었다. 전자는 사람의 팔과 다리를 밧줄로 묶고서 밧줄의 끝에 무거운 추를 매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들어 올려지게 되는데, 그때 갑자기 밧줄을 느슨하게 한다. 그러면 몸이 고통스럽게 팽팽해지는 현상이 일어나고 때로는 죽기까지 한다(그림 1을 보라). 후자는 사람을 모서리가 날카로운 받침목에 눕혀서 철로 만든 띠로 묶는 상황에서 가해지는 고문이다. 이 상황에서는 발이 머리보다 더 높이 들려있다. 그런 다음 날카로운 아마포 조각을 강제로 식도 안에 집어넣는다. 단지를 이용하여, 물을 입과 코 안으로 부으면 거의 반 질식 상태가 된다. 그리고는 이러한 과정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이렇게 하는 동안에, 사지를 묶고 있는 끈은 혈관이 터질 때까지 조여든다(Roth). 고문은 멈추는 법이 없지만 간혹 휴식 시간을 가지기도 한다. 만약 고문이 중단되면, 교회법에 의해서 그것을 다시 재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문이 잠시 동안만 중단된 것이라면, 후에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고문은 자백을 받아내고 공범자를 실토하게 하기 위하여 어린이나 어른을 막론하고 동일하게 가해졌다. 이러한 방식으로 스페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깨끗해질 수 있다고 확신하고자 했다. 한번 자백을 하게 되었을 때, 그것이 충분히 극악무도하다고 여겨지면, 죄인은 사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사형 집행은 하나의 신앙 행위로서 불 속에 던져짐으로써 실행되었다. 그러한 불에 던져지는 사형 집행은 자신의 이단 혐의를 인정하지 않거나 이단에 빠져든 사람들, 그리고 카톨릭의 반대자들에게 주어질 몫이었던 것이다. 카톨릭 교회는 자신들이 직접적인 피 흘림의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그들을 불태웠던 것이다. 피 값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하여, 카톨릭 교회는 죄인들을 세속 기관에 양도한다. 한번 양도되면, 교회는 은총을 베풀 것을 권고하면서도 만약 그가 죄인라면 죽여야 한다고 한정짓는다. 따라서 세속 권력이 그러한 양도된 사람들을 곧장 죽여버리는 것도 이해할만하다(Roth, 1964). 만약 죄를 뒤집어 쓴 사람이 다행히도 사형 집행에 넘겨지기 전에 먼저 감옥에서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와 그의 가족들은 여전히 안전할 수 없다. 그 시체는, 다른 지역으로 도망간 사람들을 본 따서 만들어진 인형과 함께, 사형수들과 더불어 불 속에 던져진다. 아직 그러한 집행이 실행되지 않았다면, 모든 도망자들은 자신들이 도망한 모든 지역에서 샅샅이 수색되어 잡혀간다. 스페인 종교재판의 광신주의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러한 것들은 분명 인종 청소 내지는 종교적 학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스페인 종교재판과 교황의 종교재판 사이의 차이점은 스페인 종교재판이 세속 권력에게 인계되었다는 점이다. 세속 권력은 이러한 종교재판의 유지와 보존을 담당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스페인 전제주의의 직접적인 도구였다. 더구나, 그것의 독립적인 지위는 부의 축적을 가능하게 했는데, 이는 반복적인 사유재산 몰수로 인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저절로 그것에게 국가적 사업으로 여겨지는 권력을 제공했다(Roth, 1964, p. 73).

스페인 종교재판의 활동으로부터, 그것의 행각이 인종 청소였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스페인 종교재판과 그것의 활동은 20만 명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 및 스페인 사람들을 떠나게 만들었다. 분명, 스페인 종교재판은 종교적 정화 그 이상의 무엇이었다.

 

스페인 종교재판 덕택에 스페인 군주는 여러 측면에서 이득을 보았다. 페르디난드와 그 후계자들은 죄인(이단)들을 전함의 노 젓는 사람(노예 사공)으로 기용했다. 또한 종교재판으로 인한 부의 축적 이외에도, 스페인 군주는 스페인에서 카톨릭 교회에 대해 상당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교황 식스투스가 스페인 국왕에게 권위를 주므로 말미암아 카톨릭 교회가 스페인에 대한 상당한 권위와 통제력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스페인에서의 종교재판은 1478년 시작되어 공식적으로는 1808년에 사라졌다. 그 기간 동안에, 323362명의 사람들이 화형을 당했고 17659개의 인형들이 불태워졌다. 이 기간은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였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재판이 이교도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있었다(Roth, 1964). 또한 가장 혹독하게 시련을 당한 경우들도 있었다. 물론, 박해를 받은 또 다른 소수 그룹들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종교재판은 명확히 인종적인 의미를 지닌다. 비록, 이사벨라 여왕이 신앙과 국가와 백성들의 정화를 위하여 종교재판을 이끌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귀족 정치의 유물론적 희망이 종교재판이 유지되었던 이유의 분명한 요인이었던 것이다.

 

종교재판은 또 다른 역사의 암흑기와 같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편견과 탐욕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사회 내의 어느 집단이 탁월해져서 소수 그룹을 형성하게 되면, 역사적으로 그들은 으레 사회 문제들의 속죄양으로 낙인찍히곤 했다. 르네상스 시대 역시 분명히 마찬가지였다.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가 아직도 우리의 사소한 질투심을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은 의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출처: Jason L. Slade (1996년 8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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