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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침례그리스도인의혀성역사

  • 관리자 (ehompy0429)
  • 2014-05-26 12: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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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침례 그리스도인의 형성역사  
나온곳: www.biblenews.net
 
재침례 그리스도인의 형성역사
 
[성경적인 교리, 교회관을 위한 글]
 
 
우리는 여기서 재침례파의 형성단계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졌던 반 니게아적 조상들의 형성과정을 중점으로 하여 공부하겠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 졌다하더라도 하나의 공통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이단과 역사학자 등의 성경을 배격하는 사람들의 구성원들로부터 행해진 침례 받기를 거부하였던 소수의 모임이었다.
이 시대에 우리가 근접할 수 있는 두 가지 잘못 알려진 오해를 거론해 보겠는데 첫째는 그들의 수가 아주 적은 소수(小數)였으며 둘째로 그들은 역사에서도 많이 재기되지도 거의 접해보기도 어려운 형태의 모임이었다. 둘 중에 어느 것이라도 사실인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또한 그들의 존재성은 역사학자들을 통해서 로마 카톨릭교회의 그들에 100만 명의 학살 만행을 통해서, 그리고 80만이라는 사람이 죽음을 피하기 위하여 피난 갔어야 했던 이런 사건들로 우리는 그들의 신앙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1400년 동안의 사도부터 개혁의 역사 중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복음 적인 모임들은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피난과 죽음을 면치 못했으며 이런 가장 많이 비밀로 덮여있으면서도 우리가 가장 알고싶어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당시 그들의 적으로부터 이러한 재 침례 그리스도인과 침례그리스도인들이라 불려졌던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은 증거를 가지고도 그들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고 거짓이 없었음을 증명할 수 있고 또한 육적인 삶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다시 말해두고 싶다.
몬타니스트(Montanists) 일부 그리스도인들
 
처음으로 몬타니스트들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보기로 하자. 그들은 프리지아 사람인 몬타너스(Montanus)의 이름 뒤에 부쳐진 이름이다. 그들은 약 150AD경에 살았으며 새로이 거듭났으면 새로운 침례를 받아야한다고 주장하였던 무리들이었다. "기독교의 새로운 형태가 아니라 예전에 있었던 기독교의 보건형태다."라고 쉐프 허족이 말하였다. 이 말에 의한다면 그들은 재침례파였다는 것이 된다. 쉐프 허족 볼륨2 427쪽에 보게 되면 그들의 움직임은 아시아를 거쳐 북아프리카에서 로마까지 전개되었다고 명기되어 있다. 많은 종교회의에서 수 차례 핍박을 받았어도 그들의 전개활동은 몇 백년에 걸쳐서 전개되었으며 나중에는 유세비어스(Eusebius)라는 이름으로 변모되어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299쪽 1번 노트참고)
그때 당시 722년 A.D.에도 데오핀스(Theophines)라고도 알려지게 되었다.(722쪽 참조)
 
노바티안스(Novatians)
 
노바티안스의 움직임은 서기 250년경에 생겨났으며 거짓에 더럽혀지지 않은 그들의 청결한 삶의 이유로 카타리(Cathari)로 불려 졌는데 이 단어의 의미 또한 역시 청결함이다. 카톨릭으로부터 나온 세례명을 모두 없애고 다시 침례를 받도록 하였다. (모쉼, 볼륨1, 203쪽 참조) 그들 또한 역시 나중에 재침례 그리스도인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로빈슨 연구소모임, 127쪽 참조)
오챠드는 말하기를 "이 교회들은 청교도의 진리와 거룩함을 본받아 충실한 성도의 관계와 도덕적으로 성숙된 모임이었으며 아직도 우리에게 그들이 이루어왔던 선교의 잔재들이 남아 그리스도교회에 가장 오래된 모임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금 알게 되는 것이다. 서기 254년이라는 아주 이른 시대에도 몇몇의 사람들이 프랑스에서 건너온 교리들과 접촉하는데 반대하여 불평한 적도 있었던 우리가 알비젠시안 교회에 대해서 공부하는데 아주 중요한 도움이 되는 그러한 모임인 것이다."(알릭스의 피드몽트 C 17, 176쪽 참조)
오차드는 더 나아가서 말하기를 "그 교회들은 타락한 정부 밑에서 60년 동안 사역할 수 있었으며 로마, 카르타고 등지에서 속속히 뿌리내린 그들의 반대파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무리이며 그런 상황에서 노바티안 교회는 아주 담대하였다. 우리 인간역사에 그들이 우리에게 주었던 많은 도움들의 가치를 세기엔 불가능하다. 그들의 도덕성의 바탕과 또한 교회의 뿌리가 여러 곳에 분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틴이 서기 306년경에 역임하였을 때에도 변함없이 그들의 움직임은 광활하였고 널리 퍼져나갔다.
4세기 말에 3개 아니면 4개의 교회가 콘스탄티노플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니세, 니고메디아, 콘티베터스와 페르지아 지방까지도 교회가 있었으며 웨스턴 왕국에서 수적으로 적지 않게 영향을 끼쳤던 그 당이 광활하고 수적으로 많았던 무리가 노바티안이었다. 5세기 경에는 알렉산드리아에 예닐곱개의 교회가 존재하고 있었다. 카톨릭의 수임받은 추기경이 역임하면서 노바티안 교회의 움직임은 점차 문을 닫게 되었다. 그들은 카톨릭에서부터 나온 세례명을 부정하고 다시 침례를 받도록 하였기에 카톨릭 교회의 잠자고있던 화를 치밀게 하여 많은 피해를 몰고 왔다. 413년경 데오도시어스(Theodosiu)와 호노리우스(Honorius)로부터 왕령이 내려와 침례를 다시 받았거나 다시 재침례를 주는 사람은 사형에 처하도록 법률을 규정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알바누스(Albanus)라는 열광적이었던 선교사도 재침례를 한다는 이유로 이들과 같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배경의 종교적 학살로 통해 많은 도시가 파괴되고 피난을 파드몽트로 가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월덴시스(Waldenses)라는 곳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도나티스트(Donatists) 그리스도인들
 
도나티스트 성도들은 서기 311년경에 누미다 지방에서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아프리카까지 전파되었다. 도나티스트 교인들과 노바티안 교회는 신앙적인 면과 규율적인 면에서 거의 동일하였다. 크리스핀(Crispin)이라는 프랑스 역사학자는 둘이 뭉쳐있는 단합적인 존재라고 표현하고 있다. "첫째로, 청정함을 중요시하여 진실한 믿음과 선교자가 아니었으면 교회에서 절대로 받을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둘째로는 그들의 규율적인 면에 동일하였고 셋째로는 각 교회의 독립성, 넷째로는 교회에 들어오기 전에 침례를 받은 것에 의심적인 부분이 있으면 다시 침례하도록 하였다." 이 두 가지 거의 동일한 교회는 다시 침례하는 교인들 즉 재침례파 그리스도인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오시엔더(Osiander)가 말하기를 재침례 그리스도인은 도나티스트 교회의 오래 전 모습의 원형이라고 했다. 퓰러(Fuller), 영국 교회 역사학자는 자신이 살고 있었던 시대에 영국의 교회들은 도테트시트 교회들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로빈슨(Robinson)은 그들에 대해서 말하기를 삼위일체를 중요시한 재침례 그리스도파였다고 말한다. 도나티스트 교회의 범위가 점차 넓어지고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어 콘스탄틴의 귀까지 들리게 되어 그들은 상대로 반박하고 피난 가도록 하게 되었다. 도네티스토 교인들은 "황제가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왕과 상관할 일이 무엇인가? 또한 법정에서 카톨릭 주교가 참여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라고 되물었다.
서기 337년 콘스탄틴의 죽음이후 줄리앙(Julian)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 당시 도나티스트 교인들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들의 번영은 너무나 빨리 전개되어 오차드(Orchard)에 따르면 한때는 카톨릭 교회의 숫자와 비슷할 정도로 많았었다고 밝히고 있다. 죤스(Jones)는 전도서에 관한 저서 볼륨 1 474쪽을 인용해 말하기를 "아프리카에 있었던 도시들 중에 도나티스트 교회가 없던 도시는 보기 힘들었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누미디아 도시의 멜라 주교 옵테터스(Optatus)라는 사람은 도나티스트 교인의 반박을 위해 책을 썼는데 그의 책에 의하면 카톨릭은 다시 참례하는 것을 이교도적인 성향으로 간주하고 있다. 또한 도나티스트의 견해를 상대적으로 서술해 "세상으로 태어나는 사람 중에 그리스도가 부모인 자녀들은 더러운 영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침례로 깨끗이 씻는다"고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오차드는 서(西)의 황제 호노리우스와 동(東)의 황제 데오도시어스가 저지른 도나티스트에 대한 학살 만행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의 말은 이러하다. "두 황제는 왕령을 내려서 침례를 받았던 사람이 다시 받거나 다시 침례를 주는 사람은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그러한 얼토당토 말도 되지 않는 이유를 내세운 결과는 잔인한 학살뿐이었던 것이다. 기본(Gibbon)은 말하기를 300명의 목사가 그들의 교회로부터 추방당하였고, 몇몇은 섬으로 추방당하였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은 빼앗겨 버렸다. 또한 아프리카에서 그들의 활동의 재개를 막기 위해 더 이상 교회를 만들지 못하도록 제재를 가했다.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 교회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나티스트 교회인은 모두 침례를 다시 받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단적이다. 침례는 하나님의 권한으로 행해져야하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교회에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해서 침례를 하는 것은 어긋난 것이다."
5세기경 도나티스트 교회는 카톨릭 교회와 심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단지 이방인들을 받아들인 것만이 아닌 그때당시 생기기 시작했고 거짓 교리로부터 출발된 유아세례에서도 서로 맞물린 견해를 가지고 대립한 위치에 있었다. 이에 관해 역사학자 롱(Long)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나티스트 교회에 오는 어른들만 침례를 하지 않았으나 어린이들의 침례하는 것은 카톨릭교회가 하는 것임으로 하기를 거절했다." (도네티스토 교회역사, 103쪽 참조)
서기 415년에는 어거스틴이 92명의 사제들을 회의로 불러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하였다. "우리가 선언하기를 새로 태어난 아기는 영생을 얻을 권리가 있으며 어머니의 태로부터 태어난 어린이들은 죄를 안고 더럽게 태어나기 때문에 그 원죄를 없애기 위해서 모든 아이들은 세례를 받도록 규정한다."
카데그에서 같은 때 다시 열린 회의에서 또 다른 선언을 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우리는 유아세례를 받은 어린이는 자유로우며 영원한 생명을 얻었음을 확인한다."
이러한 왕권을 통한 선언으로 인하여 도나티스트 교회들은 갈기갈기 찢겨져 나갔으면 많은 인적 피해와 죽음을 맞아야 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스페인과 이탈리아로 이민하여 피신했고 어떤 사람은 아프리카에 머물러 있으면서 변질되어있는 이단무리들에 맞서 오직 하나의 진리를 갖고 끝까지 투쟁하기도 하였다.
 
파울시안스(The Paulicians) 그리스도인들
 
이 교회들은 사도교회들의 근원이며 1세기에 아르메니아 지방에서 생겨서 나아가서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로 퍼지게된 교회이다. 그들의 신앙은 기독교의 고전적인 형태였다. 파울시안스 교회가 쓴 진리의 열쇠라는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명기하고 있다. "우리는 거룩한 교회 앞에 항상 겸손하며 주님과 사도들로부터 배운 진리를 통해 완전한 믿음으로 굳게 나아가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진리를 통해 인도하는 중요한 사명과 침례를 주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
역사학자 에드니(Adeney)가 이에 대해 말하기를 "그들이 말하는 것으로 보아 고전적인 기독교교회의 신앙을 지키기 위한 모습의 대부분이 이러하였음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다른 어떤 무리들과 교제를 가지는 것에 대해 교회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침례교회의 견해가 그들로부터 시작된 경우가 많은데 사람은 무조건 회개하여야 하며 믿고 나이가 차면 침례를 받도록 교회에서 규정하였다. 유아세례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완전한 죽음을 의미하는 침례를 하였으며 다른 무리로부터 온 성도는 다시 침례를 하도록 하였다. 그 당시 이 교회들의 숫자와 영향으로 많은 나라로 교회가 전파되었는데 서기 690년경에 그들의 선생이었던 콘스탄틴은 황제의 명령 하에 돌로 쳐죽음을 당했으며 나중에는 데오도라가 학살을 거행해 그레시안 아르메니안 사람 약 100,000명이 죽음을 당하였다. 9세기경에 그들은 미셀 3세 황제에 반대하여 아르메니아로 이주 자유로운 독립 주를 만들었는데 그 이름은 테프라이스(Teprice)였다. 여기에 살고 있는 여러 무리들은 양심적인 자유를 얻었으며 이 지방을 통해서 불가리아, 보스니아, 세르비아까지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유럽 곳곳에 교회가 형성되어 불가리아에서부터 남쪽 이탈리아와 프랑스까지 퍼지게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롬바드 교회와 연합하였으며 프랑스에서는 알비젠스(Albigenses)라고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또 다른 형태의 재침례파 교회였다.
크리스챤 박사가 그들에 관해서 말하기를 "기본과 무라토리 그리고 모세힘을 비롯한 많은 역사학자들이 파울시안스 교회는 알비젠스교회 즉 재침례파의 또 다른 형태라고 믿었는데 사실은 모두다 같은 사람이었다."
파울시안스 교회에 역사학자중에 가장 권위있는 코니베어(Conybeare)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경적인 침례를 도용하려고 애를 많이 썼는데 유아세례를 시작함으로부터 성경적이 아닌 이단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사도 요한을 통해 받으신 침례의 중요성을 카톨릭 교회는 점차 불신화시켰으며 나중에 오더독스 교회를 통해 완전히 중요성을 소멸시켜 버렸다."
"중세 시대 여러 부분의 교회들은 크리스천으로 알리게 되며 침례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유아세례의 교리를 완전히 배격하였는데 이러한 이유는 오더독스 교회로부터 받아야했던 많은 고통과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 그들은 절대 그들의 진리보전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전적으로 옳았다. 오래 전에 침례의 중요성을 배제시켜버린 교회는 말도 할 필요 없이 더 이상의 전도도 선교도 더 나아가서 크리스천도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다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길 원한다면 스스로 고쳐야 하는데 로마나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것이 아니라 동쪽에 주로 있었던 침례의 중요성을 오랫동안 그 상태 그대로 보전시킨 교회 무리를 통해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이들이 아르메니아의 파울시안스 교회인 것이다. 보고밀에서 모스코바 둘러 시리아와 티그리스 지방까지 또한 유럽의 침례교회까지 진리의 선봉자였던 것이다."
코니베어 박사는 단지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가? 로마 카톨릭 교회는 침례가 없다는 것이다. 재 침례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것같이 로마의 잔재를 가지고 나와서 세례를 행하는 세속적인 무리 침례(Paedo-Baptist)교회는 절대로 진정한 침례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더 이상 어떻게도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세례에 관해서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 누군가 어디에서도 이것이 거짓임을 증명할 수 있다면 충분히 설명을 할 여지가 있다. 우리의 진리의 아버지들 그들은 1400년이란 개혁 이전의 역사동안 많은 눈물과 피, 희생, 진리의 보전, 침례의 보전을 위해서 평생을 바쳤으며 이 모든 것은 주님이 지으신 교회 안에서 주님의 말씀으로 지키고 이루어 나간 것이다.
1세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우리는 파울시안스 교회 신앙이 점차 일어서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시간이 흘러 나중에는 유럽의 전 지역까지 이 교회가 전파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1세기와 12세기 암흑시대에도 그들의 영향력은 점차로 커져서 멀리 영국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관하여 오챠드는 서술한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확실한 것은 파울시안스 교회의 가장 움직임이 많았던 시대는 암흑의 11세기경이였으며 롬바디, 인수브리아 그리고 밀란에 정착하였고 프랑스, 독일, 그리고 많은 여러 나라에서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페트리니(Paterini)와 카타리(Cathari)로 불리워졌고 프랑스에서는 불가리안 사람들보다 많은 수를 차지했었으며 파울시안스보다 퍼블리칸으로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한 이름들 중에서도 알비젠스라는 이름으로 가장 많이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었다.
크리스천 박사는 영국에 있었던 이 교회의 형성에 관한 서술한다. "서기 1000년 이후 영국에서 퍼블리칸스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1154년에는 독일인들이 영국으로 이주하였는데 독일에서 이루어졌던 강제 추방에 의해서 온 경우가 많았다. 그들 중에 소수의 무리가 옥스퍼드에 정착하게 되었고 저하드(Gerhard)라는 그들의 지도자격 목사와 그들 무리가 윌리암 뉴베리(William Newberry)에 의하면 아주 끔찍한 형벌을 받기도 하였다.
6년 후에 또 다른 파울시안스 교회의 무리가 옥스퍼드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헨리 2세는 그들의 머리에 불로 붉게 달군 철로 살을 태우며 문신을 하도록 하였고 길거리에서 채찍질하며 온 전신이 보일 정도로 옷을 찢어 사람들에게 내보이게 하였다. 살고있던 마을은 어떠한 음식도 거처도 없었으며 추위와 굶주림으로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하고야 말았다.
결과적으로 오차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도적인 신앙은 모두가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어떠한 물질적인 도움도 또한 그들 사회의 도움도 받지 않고 수도 없이 거절당하면서도 파울시안스 교회는 유럽의 막강한 벽을 뚫고도 모자람이 없었으며 한 손과 한 눈으로 양손의 사람들과 생기는 여러 교회적 문제를 스스로 잘 해결해 나갔던 것이다. 예닐곱 가지의 증거를 들 수가 있는데 그들은 속죄자의 진리를 알기 위해 죽음의 희생을 각오하였다." 모세힘, 기본, 로빈슨, 존스, 그리고 많은 다른 역사학자들은 그들의 믿음과 그들 조상의 증거를 통해 또 그의 피를 통한 간증을 통해 우리는 알게되었지만 아직도 몇 백 부분의 파울시안스 교회의 사역을 우리는 다 알지 못하는 것이며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 그들은 진정한 주님의 교회이며 복음전파를 위한 사역자였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금 깨닫게 될 것이다.
 
알비젠스(Albigenses)와 월덴시스(Waldenses)
 
우리는 이 두 교회에 관해 함께 배워보겠는데 그 이유는 두 교회가 절대로 나뉘어질 수 없는 중요한 관계에 있고 신앙적으로나 근원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같은 교회 무리로 공부하겠다.
프랑스의 남부지방은 피레니스(Pyrenees)로 인해 북쪽 스페인으로부터 갈라지게 되었는데 대서양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메디테리니안 해안까지 약 200마일 정도로 되어있었다. 큰 산맥과 깊은 계곡이 200마일 평원 중간부분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여행자들에겐 그이상의 볼거리가 없었으며 계곡과 언덕에 면과, 포도주, 그리고 기름 등이 그 지방을 풍요롭게 하였다.
스페인쪽 지방은 카탈로니아의 지성국이었다. 그리고 프랑스쪽의 지방은 개스코니와 랭코독의 지방이었다.
앞서 거론한 것에서는 노바티안, 도나티스트, 파울리시안스 교회들에 대해서 배웠는데, 콘스탄틴이 행했던 그들에 대한 학살과 추방으로 죽음을 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여러 나라로 피신을 가야만 했었다. 그런 와중에 피난을 위해서 거처할 곳이 깊은 산중이 아니고 어디겠는가? 바로 그 장소가 페리니스 지방과 알프스 지방이었던 것이다. 오차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서 젤트 사람은 거처를 찾았고, 고스 사람들은 사라센이 스페인을 정복할 때 피난하였던 장소이다."
프랑스쪽의 페르니스 지방은 아주 작은 알비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알비지어스의 관리국이었다. 여기에 노바티안 교회와, 도나티스트, 그리고 파울레시안스 교회가 피신했으며 나중에는 월덴시스 교회도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그 당시 각기 교회의 이름은 달랐어도 로마 카톨릭교회의 진리를 배격하고 믿음을 같이 함으로서 완전한 하모니를 이루게 되었는데 이 모두를 합한 교회가 알비젠스로 불려지게 된 것인데 그들이 살고 있던 장소와 환경에 따라서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들에 수에 관해서 오차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탈리아에 있었던 건덜푸스와 아놀드 또 베린저와 피터 데 브루이스 또 프랑스에 헨리 등 이러한 사람을 따르는 제자들과 신봉자들이 수적으로 많아지면서 로마 카톨릭교회가 경계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각자 다른 왕계를 조성하였고 다른 이름과 다른 시대에 있게 되었다.
알릭스 박사는 그들의 수에 관하여 또다시 말한다. "우리가 80만이라는 사람을 알비젠시안 믿음으로 선교하라고 그런다면 이 모든 수를 합하면 약 300만 명이 되며 20만 명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은사가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들은 카톨릭 교회를 절대로 그리스도의 교회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카톨릭에서부터 오는 사람은 침례를 다시 받도록 규정하였다. 또한 유아세례의 교리를 배격하였으며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 외에는 절대로 침례를 하지 않았다.
월덴시스에 관해선 우리가 무엇을 배우는가? 이들 또한 역시 알비젠스 교회들의 무리와 너무나 비슷하여 달리 꼬집어 나눌 일이 없으나 한가지는 확실하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역사학자들의 견해와 그들의 적을 상대로 하였던 대담함과 용감성으로 인해 리온스에 피터 왈도 앞에서도 몇 백년간을 지속적으로 진리를 보전시켜왔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앞서 콘스탄틴이 서기 331년경에 노바티안 교회에 행했던 만행을 배웠다. 그들의 책은 없어지게 되었으며 교회는 불타게 되었고 비밀로도 모임을 모일 수가 없이 폐쇄되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그들은 알비젠스 교회 무리 중에서 보편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진리를 보전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지 않았던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항상 진리와 의를 지키기 위해서 고통을 받았던 사람은 언제나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는 그들의 수가 많이 적었을 때도 있었고 한때는 수가 많이 불어 복음전파에 큰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콘스탄틴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고 살인하고 잔인한 만행을 일삼을 당시 그때의 진리를 보전하고 침례를 지키는 사람의 수는 극히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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