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분별

진리를 알게 하리니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요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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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

  • 관리자 (ehompy0429)
  • 2014-05-26 12: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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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 of God)
 
‘The Idea of Revelation in Recent Thought(최근의 사상 안에서의 계시에 관한 개념)’이라는 자신의 뛰어난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고(故) 존 베일리(John Baillie)는 어떤 사람에 의해 베일리 교수에게 주어진 불평에 대해 동감하여 말하였다.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께 경배하며 또한 우리의 마음을 그분께 향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의 응답이 없음에 대해 애통해한다. 그것은 사람이 “매사에 편견적임”을 말해준다. 베일리는 사람이 어떤 판단에 의해서도 의롭다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떠한 고통으로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는 아직 하나님으로부터 진리의 말씀을 찾지 못한 수백만의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이것은 지(Jie)가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을 찾는 가능성에 대해서 말했을 때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느낀 그 요구에 대한 것이었다. 존 웨슬리는 ‘나는 하늘에 이를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길, 행복한 해변에 안전히 상륙할 수 있는 방법을 알기 원한다’라고 호소하며 이러한 요구를 생생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환희에 넘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그 길을 가르치시기 위해 내려오셨다; 그분이 하늘로부터 오시는 바로 그 종말을 위하여. 그분은 그것을 책에 쓰셨다. 오, 내게 그 책을 다오! 어떤 값을 치러도 좋으니 하나님의 책을 내게 다오”(Preface to Standard Sermons, edited by E. H. Sugden, London, 1746; Epworth Press Reprint, 1955 pp. 31, 32).
 
 
 
하나님은 말씀해오셨는가?
 
 
 
그 책을 들고 그것을 잠시 살펴보자. 그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낸다고 주장하는가? 단호하게 말해서 그 대답은 확고하다. 성경은 바로 그 진리 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지적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그의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라고 시편 기자는 서술한다(시 33:9). 그리고 이러한 선포는 그분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그분의 말씀으로써 이루고야 마시는 하나님 말씀의 역동적인 특성을 설명해주고 있다. 심지어는 우주의 창조도 그분의 말씀에 의한 것이었다. 성경은 이러한 창조의 장엄한 서술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확실히 그것은 장엄하다. 창세기 1장에 관하여 제임스 오르(James Orr)는 이렇게 썼다: “창세기 1장이 어떻게 해서 그곳에 자리잡게 되었든, 이 장은 분명하게 뒤이어 등장하는 모든 것에 대한 도입부로서 적절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모든 문학 작품들 가운데 이만한 것이 어디 또 있을까? 그 어느 곳, 바빌론 전설이나 그 어떤 다른 곳에도 없다”(The Fundamentals, VI, c.1910, p.85).
 
창세기 1장은, 삼단 논법이나 신의 존재에 대한 이성적인 방어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성경 전체의 도입부로서 알맞다. 그것은 활동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다.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창 1: 27) 사람을 창조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사악한 반역 가운데서 오로지 당신의 신적 형상의 창조물을 찾기 위하여 “서늘할 때에” 에덴의 “동산을 거니시며” 오셨던 분이 바로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바로 그곳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은 훗날 “여자의 후손”이 악을 정복하게 되리라고 선포하심으로써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를 명백히 보여주셨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씨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하나님의 잃어버린 아담의 자손의 구속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하나님께서 매달리신 행위에 이어지는 모든 일들을 대한 구속을 말해주는 붉은 밧줄이다. 일찍이 창세기 6장에서 우리는 주권을 지니신 창조주이시자 구원자를 발견한다-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사람 노아와 그의 가족과 더불어 은혜로운 언약을 세우셨다. 두드러진 역사의 압축과 함께, 이야기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2000년 전인 아브라함의 시대로 건너뛴다. 그와 함께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자비롭게 이러한 은혜의 언약을 새로이 갱신하심으로써 주도권을 잡으셨다. 그 언약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가나안 땅의 소유와 거대한 자손을 약속하셨고,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인하여 모든 민족들이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게 말씀하셨다. 창세기 12장에서 50장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바로의 노예가 되기까지 애굽에서의 이스라엘과 관련된 족장 이야기에 할애되어 있다.
 
 
 
성경의 두 번째 책은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탈출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 사건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강하고 권능하신 팔에 의해 택하신 백성들을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주신, 국가적인 구속 사건이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역할을 위해 놀랍게 예비 된, 율법 수여자이자 선지자였던 모세라는 강력한 지도자의 영도 아래 이뤄진 사건이었다.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은 한번 더 은혜 안에서 주도권을 잡으셨고, 그들에게 거룩한 율법을 주시면서, 피로써 거룩한 언약을 비준함으로써,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 더불어 엄숙한 언약을 맺었다. 후에 모세가 죽자, 가나안을 처음으로 정탐했던 사람들 중 하나였던 여호수아에게 지도자의 역할이 주어졌다. 사실, 선지자 사무엘의 시대가 오기 전까지 몇 세기 동안 가나안에 살던 이스라엘의 부족들은 단지 군대를 통솔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지방 재판관들의 인도를 따를 뿐이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의 요구에 의해, 그리고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이스라엘 국가의 첫 번째 왕으로서 사울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 후, 왕위는 그에게로부터 그의 사위였던 다윗에게, 그리고 다윗으로부터 그의 아들인 솔로몬에게 이어졌다. 솔로몬이 죽고 나서는, 왕국이 남 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로 분열되었다. 이스라엘은 주전 931년부터 722/21년까지 존속했고 그 후에 그들은 앗수르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서 결코 다시는 공동체를 이루어 돌아오지 못했다. 유다는 주전 931년부터 586년까지 국가로 존속하였다가 그 후에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다. 오로지 몇 세대가 지나서, 우상 숭배하던 습관을 완전히 고친 혼쭐난 사람들만이 귀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주전 5년에 그토록 오래 고대하던 ‘여자의 후손’, 즉 세상의 모든 죄를 위해 죽기로 정해지셨으나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셔서 성령의 선물을 통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그의 생애는 대략 주후 30년까지의 일이다.
 
가장 깊은 의미로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데, 이는 그분이 하나님의 살아 계신 성육신이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성육신하신 완전한 사람이셨다. 하나님께 해당되는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된다. 성육신하신 하나님 아들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었고(골 1:15), 하나님 안에 거하는 “모든 충만”이었다(골 1:19). 그분은 “그 본체[하나님]의 형상”이시다(히 1:3).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
 
 
 
그러나 구약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특별한 계시를 받는 선택된 자들을 고르실 때, 그 표현은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다: 야웨[YAH-way라고 발음하고 일반적으로 Yahweh라고 표기함]의 말씀이 이 사람, 혹은 저 사람에게 임했다. 근원적인 의미에서 야웨의 말씀은 쓰여진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나 족장들에게 주어진 살아있는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창세기 15장에서는 “야웨의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환상으로 임했다.”
 
야웨의 말씀을 받은 가장 뛰어난 선지자는 다른 누구보다도 바로 모세였다. 70차례 이상 성경은 “야웨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라고 기록한다(약 10번 정도는,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과 모세가 얼마나 친밀했는지를 “사람이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야웨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는 표현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출 33:11). “야웨의 말씀”이라는 그 표현은 오경 전체에 걸쳐서 모세와 하나님의 선택된 다른 종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살아있는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표현은 기록된 두루마리에 대해 사용되지 않았다.
 
히브리 성경의 두 번째 부분은 예언서로 알려져 있다. 예언서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네 권의 전기예언서(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그리고 열왕기서)와 네 권-유대인들이 세기에-의 후기예언서(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열 두 소선지서)로 나뉜다. 다시 한번 그 말씀의 용법은 율법이 담겨진 오경과 공통되다: 야웨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들과 대화하시는 살아있는 메시지를 위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호수아서에서 “야웨께서 명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여호수아의 모습을 읽을 수가 있다(수 8:27). 아이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수아는 “야웨의 명령대로”(19:50) 가나안의 유산을 넘겨주었다. 사무엘이 어렸을 당시에는 “야웨의 말씀이 희귀하였다”(삼상 3:1). 주의 선지자로서 사무엘은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네게 들리리라(9:27)”고 말하면서 사울에게 그분의 말씀을 듣도록 기다리게 했다. 후에 선지자는 불순종하는 왕에게 야웨의 말씀(15:23)으로 책망하였다. 그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전하신 것이었다. 사무엘하 22장에 나타난 다윗의 찬양시는 시편 18편과 병행을 이루는데, 거기서 다윗은 “야웨의 말씀은 신뢰할만한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즉 하나님에 대한 경험 안에서 그것은 참된 것이라 입증된다. 후에 우리는 아비아달이 쫓겨나는 장면을 읽게 되는데, 이것은 야웨께서 “하나님의 사람” 즉, 선지자를 통해 엘리에게 선언하셨던 실로의 엘리 가문에 대한 말씀(왕상 2:27)이 성취된 것이었다. 그리고 열왕기상 12장에서 우리는 유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 스마야에게 어떻게 임하였는지, 그리고 유다가 어떻게 그 말씀에 순종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12:24). 전기예언서에서의 이러한 용법은 율법에서의 그것과 정확하게 같다: 야웨의 말씀이란 선택된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메시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두루마리에 적혀진 말씀을 지칭하지 않는다.
 
후기예언서(다니엘서를 제외한 이사야서에서부터 말라기까지의 문서 예언서 전체)에서, 그 용법은 같은 맥락을 유지한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는 귀 기울여 듣는 자에게 “야웨께서 말씀하시기를”(1:2)이라고 시작되는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야웨의 말씀을 들을찌어다”(1:10)라고 호소할 수 있었다. 다시금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다(40:1). 그리고 그 예언자는 소리쳐서 알렸다(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즉,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그 선지자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전적으로 믿을만한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백성들 중 일부가 말씀을 듣는 데 있어서 생겨나는 영적인 고통으로 인해 슬퍼했다: “보라, 야웨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6:10). 하나님의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 사이의 차이점이 주목되어져야만 한다. 전자는 야웨로부터 진실로 말씀을 받았음에 반해 후자는 사실상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야웨가 메시지를 주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예레미야 23장에서 그러한 차이들이 굉장히 풍부하고 명쾌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야웨의 말씀을 용감하게 선포하는 또 다른 야웨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에 등장한다. “갈대아 땅의 그발강가에서 … 야웨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1:3), 호세아에게(1:1), 요엘에게(1:1), 그리고 그 외 등등에게도 임하였다. 아모스가 예언한 최악의 심판 중 하나는 양식과 물이 없는 기근이 아니라 “야웨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8:11) 기근이었다.
 
“야웨의 말씀”이라는 어구의 용법은 시편과 히브리 성서의 세 번째 부분에 해당되는 책들에서도 동일하게 유지된다. 하늘은 야웨의 말씀에 의해 만들어졌다(시 33:6). 다니엘 9:2는 다소 특이하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서책에 의하여” 포로의 기간이 얼마나 지속될 것이지를 “야웨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대로 읽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먼저 선지자들에 의해 구전된 메시지가, 야웨의 선지자들의 많은 예언들의 경우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것처럼, 나중에 문서로 기록되는 것이다. 역대상은 사울이 야웨의 말씀, 곧 사무엘이 완고한 왕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전한 말씀에 불순종한 것에 때문에 그가 죽었다고 기록한다(10:13). 같은 방식으로 다윗의 즉위식도 야웨의 말씀에 의한 것이었다(11:3). 웃사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에 다윗 왕은 “모세가 야웨의 말씀을 따라 명한 대로” 레위인들의 어깨에 언약궤를 들게 해야한다는 교훈을 배웠다(15:15). 얼마 후에 야웨의 말씀이 밤에 나단에게 들려왔다.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17:4). 시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귀한 특징들에 대한 많은 언급들 역시 근원적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메신저인 선지자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다양한 상황에서 주시는 여러 가지 약속들, 경고들, 그리고 위안의 말씀들을 다루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어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선포에 대한 의미로서 가장 많이 공통적으로 사용된다. 가령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서”(1:1-8) 낳으셨다고 기록했다. 이는 즉 복음 메시지의 초청에 응답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가 거듭남을 얻는 것이다. 야고보가 말한 “마음에 심긴 도”(1:21)는 거듭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인 치시는 방법을 언급하는 것이다. 단지 듣는 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행위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주님의 종이 우리를 향한 주의 뜻을 선포한 대로 우리가 배운 것들을 실행에 옮김을 의미한다.
 
바울의 용법 역시 동일하다.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은 “많은 환란 가운데서 도(말씀)를 받았다”(1:6). 그들은 전파되는 복음을 듣는 데 있어서 억압과 박해의 상황 아래 있었다. 그들로부터 “주님의 말씀이 들렸다”(1:8)는 것은 그들이 복음을 선포함에있어서 신실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들은 바울로부터 “하나님의 말씀”(2:13)에 대해서 들어왔다.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2:17)하는 자들은 순전함으로 복음을 전파하지 않았다. 바울은 실제로 “복음 진리의 말씀”(골 1:5)이라는 충분한 표현을 사용했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엡 5:26)라는 표현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서 얻게 되는 영적인 깨끗함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부르는 것은(엡 6:17)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성령께서 복음 전도를 사용하신다는 의미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맛보는 자들”, 곧 복음 전파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아는 경험적 지식을 얻게 된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공관 복음과 사도행전에서도 역시 동일하게 말씀은 주의 성도들이 전파하던 복음의 메시지를 의미한다. “씨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막 4:14). 믿는 자들은 “말씀을 인하여”(마 13:21) 핍박을 경험한다. “말씀을 들은” 많은 자들이 믿는 자가 되었다(행 4:4). 일찍이 그리스도인들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행 4:31).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떠나 “공궤”(행 6:2)를 일삼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복음의 말씀이 퍼지면서 교회가 어떻게 점점 활동적이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에서, 누가는 이렇게 전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다”(행 6:7; 17:13; 18:11).
 
베드로의 서신들도 유사한 용법을 사용한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 안에서 그들에게 나타내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너희가 거듭난 것이 …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 복음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 … 너희에게 전한 복음 곧 이 말씀이니라”(1:25).
 
요한 문헌은 때때로 말씀이란 용어를 구약적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용되며, 단지 이러한 경우에서는 그 선지자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 그 자신이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요 17:14). 유사하게,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14:24). 사도들을 거룩하게 만든 말씀은 분명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전하신 말씀이었다(17:17). 수십 년 전 하나님의 아들의 발치에 앉았던, 그리고 이제는 나이든 장로가 된 사도 요한은 사랑 안에서 살도록 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옛 계명”(요일 2:7)이라 불렀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계 1:9),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하기 위해 밧모라는 곳에 유배되었다. 거기서 요한은 계시록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 그는 천사로부터 그것을 받았고 [천사가 그에게 보여준]“하나님 말씀의 기록을 드러냈다”(계 1:1,2). 그 책에서 우리는 다른 이들과 함께 복음을 나누는 활동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죽음에 처하게 된 성도들에게서 가르침을 얻는다.
 
 
 
성육신하신 아들
 
 
 
그러나 요한은 또 다른 특이한 형태로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어구의 가장 중요한 용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 의미심장한 이름을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적용시킨다. 그러므로 그는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시작되었고 또한 이 “말씀”이 하나님이었다고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요 1:1). 더 나아가 이 영원한 “말씀”이 육신이 되었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요한은 거기에다 그가 가지고 있던 생생한 기억을 덧붙였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그는 그의 첫 번째 서신의 시작 부분에서 이 성육신하신 말씀을 묘사했다. “태초로부터 있는” 그분이 어떻게 사람들 가운데 계시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사도들은 그분을 보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으며 그분께 주목하였다-이 언급은 의심할 바 없이 그분이 육신을 입으셨던 당시 그분께서 사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던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요일 1:1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의 손으로 그분을 만져보았기 때문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정말로 육신이 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아니면 그 책이 스스로를 이름짓고 있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요한은 악의 힘과 하나님의 신앙을 가진 자들을 괴롭히는 세력을 본 환상을 묘사했다. 그것들은 죽음으로 이끄는 정말 끔찍하고 괴상한 박해의 장면의 연속이다. 그러나 우리는 계시록에서, 보좌에 앉으셔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 인을 떼시며 그의 진노의 잔을 쏟아 부으시는 분, 죽음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신 분을 떠올리게 된다. 19장에서 요한은 정말로 영광스런 광경을 기록하였다. 요한은 하늘이 열리고 백마와 그 위에 탄 자를 보았다. 19장에서 싸우는 분의 첫 번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었다. 그의 눈은 불꽃같았고 그의 머리 위에는 많은 면류관이 있었고 또한 그는 피(갈보리의 피) 뿌린 옷을 입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복음 곧 그의 입에 나오는 “검”으로 인류에 대한 영적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의 두 번째 이름은 바로 우리의 연구에서 주목하고 있는 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모든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말씀하셔야 할 모든 것들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로 충분히 표현하셨다. 철학자들이 “숨겨진 하나님”을 deus absconditus라고 표현했지만,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을 deus revelatus(계시하시는 하나님)로 묘사했다. 요한이 말하고 있는 이 계시적인 하나님의 말씀은 다름 아닌 계시록 19장에서 우리 주님의 세 번째 이름으로 나타난 왕의 왕, 주의 주이다. 그래서 계시록은, 성경의 많은 다른 부분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세 가지 직분으로 묘사한다: 신실한 대제사장, 완전한 선지자, 그리고 전능하신 왕. 그분은 그의 연약한 성도들에게 신실하신 대제사장이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육신이 되셨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진실한 말씀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하늘과 땅에서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며 이 세계와 앞으로 올 세계 모두에서의 모든 이름들 위에 뛰어나신 이름을 가지셨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말씀 기록된 성경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성서 안에 나타나는 “말씀”이라는 용어의 탁월한 용법들을 확인했다; 그것은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인 선지자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과 대화하시려는 다양한 메시지를 지칭한다; 두 번째로는, 선포되는 복음의 메시지를 지칭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인격을 지니신 하나님의 말씀, 즉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지칭한다. 그런데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어구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바로 이 네 번째 용법은 주 예수께서 만드셨다. 그분은 옛 언약이 담겨진 기록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언급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모세가 기록한 것을 무시하고 또한 이스라엘에서 지켜져 온 구전 율법 아닌 다른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너희의 유전으로”(막 7:13)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 일에 대하여 그들을 책망하셨다.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 기록된 성경이 동시대 유대인에 의해 무시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계시다는 사실, 그리고 모세의 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부르셨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어떤 점에서는 이는 말씀이란 용어의 첫 번째 용법-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대화하시려는 메시지-과 대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준 교훈을 하나님 안에 그 궁극적인 원천을 지닌 것으로 여기셨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담겨진 새로운 것은 구전된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 쓰여지도록 위탁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기에 그 율법의 내용 역시 충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아! 너희의 행위를 시험해 보라(출 20:12). 그리고 부모에게 져야할 자녀의 의무가 무엇이라 되어있는가 살펴 보라. 그것이 그들을 존귀케 하는 것이 아니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의 다른 부분을 보라(출 21:17). 그리고 부모를 거역하는 결과가 어떠한가 보라. 어찌 너희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지 않는 너희의 전통을 가지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폐할 만큼 그토록 눈이 멀었느냐? 예수님께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된” 것이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본래 말씀하셨던 것은 예수님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요 10:35)을 통하여 쓰여진 것으로써밖에 알려질 수 없었다.
 
 
 
우리의 연구 주제와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의 두 번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불렀다는 이유로 불경스러운 자가 되었다는 비난과 함께 연결하여 말해진다. 이에 대한 그분의 대답에 나타나는 사유의 흐름은, 하나님의 기록된 율법에 익숙해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실로 이상한 논증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거룩한 성경에서, 재판관들처럼 막중하고 신성한 임무를 가졌던 자들이 때때로 “신들”로 불리지 않았는가?(출 22:8,9,28의 히브리 원문을 보라)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들여다보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재판관과 같은 일을 하는(시 82:6의 맥락을 연구하라) 인간을 엘로힘[신들]이라는 존경할 만한 용어로 불리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내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는 것에 대해 화를 내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요 10:35-36) 여기서 그리스도는 히브리 경전의 세 번째 부분(성문서-역자 주)을 끌어들여 그것을 “율법” 그리고 “성경”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그 저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라 부르셨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서두에서, 그분은 거의 임의로 말씀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근거에 확신을 가지고 계셨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예수님을 그들의 거룩한 주님으로, 그리고 틀림이 없으신 선생으로 받아들인 자들에게는 이것이 분명히 확실한 증언이 되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주님에 의한 구약성경의 가치 평가는 표준에서 모자람이 없었다.
 
 
 
사도 베드로 또한 유대인의 기록된 성경을 신적인 권위를 지닌 것으로서 언급한다. 그는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아버지의 증거를 그의 귀로 직접 들었었던 변화산에서의 경이로운 장면을 언급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말하기를, 우리는 귀로 직접 들은 그 증거보다 더 위대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들은 바로 선지자들이 기록한 성경, 그리고 우리 유대인들의 정경인 거룩한 문서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예언서의 말씀들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 어두운 세계를 비출 것이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벧후 1:19). 베드로는 왜 거룩한 성경이 신적인 신뢰성을 소유했는지를 계속해서 설명한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1:20). 성경은 개인적인 판단에 기초한 것이 아니고 성경 저자의 관점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사적인 해석 아래서 기록하지 않았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요-여기서 더 정확한 헬라어의 번역이 나타난다-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1:21). 선지자들이 기록한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성령의 “해석”이었고, 그것들을 “더 확실한 예언”으로 확립시킨 것은 바로 성경의 신적인 근원이었던 것이다(RSV의 벧전 1:10-12와 1:25를 비교해 보라).
 
우리는 이미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께서 고상한 용어인 “율법”을 시편의 기록에 적용하셨다는 사실을 관찰했다-요15:25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정확하게 같은 방법으로 바울도 구약 전체-시편, 이사야, 창세기-를 두루 걸쳐 인용한 본문들을 고상한 용어로 “율법”이라 불렀다(예로 고전 14:21; 롬 3:19; 갈 4:21f를 보라). 따라서 정확하게 같은 방식으로, 베드로와 바울은 구약의 기록들을 하나님의 권위 있는 성경으로서 인용했던 것이었다. 우리는 이미 베드로가 “더 확실한 예언”이란 표현-보다 문자적으로, “보다 확실하게 만들어진 예언의 말씀”-을 썼음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또다시 다른 곳에서 “성경의 모든 예언”이란 어구를 사용했다(헬라어로). 베드로의 어구는 주목할만하게 바울의 선언,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와 유사하다. 즉 그것의 기원은 성경의 기자들을 “지탱”하고 계신 하나님께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영감의 교리는 19세기 바우어와 리츨(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선도했던 독일의 신학자들-역자 주)을 논박하기 위해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발명된 것이 아니다; 이 교리는 그리스도의 증언과 그의 영이 이끄셔서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도 된 목격자들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또한 구약의 기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긴다. 4장에서 그는 시편 95:11을 인용한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이 텍스트로부터 히브리서의 저자는 두 가지 요점을 제시한다: (1)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될 때 즉시 영적 “안식”에 들어가게 된다; (2)만약 우리가 이스라엘 민족이 믿지 못함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가나안 땅의 의미와 상응하는 최후의 안식처인 하늘 나라로 들어가기를 사모한다면 반드시 믿음의 길을 따라야만 한다. 만약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가 반드시 소유해야하는 지혜를 가진다면, 우리는 시편 95편에서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고 또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신앙으로 인해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다짐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불신앙[혹은 불순종]의 대가가 어떠한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다윗의 경고에 진지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헬라어역 구약성경의 시편 95편에는 “다윗에 의한 찬양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이 경고는 무엇인가? 시편 95편의 말씀은 경고한다: “오늘날 우리가 그의 음성을 듣는다면, 너희 마음을 딱딱하게 하지 말라”(헬라어역 구약성경). 그리고 나서 히브리어의 저자는 우리에게 이러한 경고를 마음에 받아들여야 할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4:12). 그리고 그는 우리가 영적으로 방심치 말아야 할 추가적인 근거를 덧붙인다: 왜냐하면 널리 만물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이 또한 우리의 마음도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이다(4:13).
 
요컨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했던 메시지를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 그것은 초대교회에서 전파되었던 주 예수의 거룩한 가르치심과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의미한다; 또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성경을 의미한다; 그리고 가장 뛰어난 의미로서 그것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아들 그 자체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어떻게 계시하셨는가?
 
 
 
우리의 논의를 위해 아직 두 가지의 물음이 더 남아있다. 첫 번째 물음은, 하나님께서 과거의 선지자, 당신의 종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계시의 도구였던 율법수여자 모세에게, 그리고 이후의 다른 선지자들에게, 과연 어떻게 당신의 말씀을 계시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B. B. 워필드는 신현현[모세가 떨기나무에서 경험한 것과 같은,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족장 계시의 전형으로 간주했다. 또한 주께서 다니엘을 일으키시고 그와 대화하시기까지 그가 빠져들었던 “깊은 잠”과 같은 꿈과 환상도 있다(단 8:18); 그리고 엘리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를 하기 위해 음악가에게 음악을 요청한 것(왕하 3:15); 주께서 사무엘의 귀에 “폭로”하신 것(삼상 9:15); 기타 등등. 그러나 성경은 일반적으로 말씀을 받기 위한 방법들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고 대화의 사실을 단순하게 보도하고 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또한 당신의 대변자인 선지자들에게 당신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입증해 보이실 수 있으셨다. 거짓 선지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렘 23:21ff):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그리고 나서 다음과 같이 덧붙이셨다: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쇠망치 같지 아니하냐
 
구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위해 행동하시는 하나님인 동시에(애굽에서 그들을 구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후에도 많은 사건 속에서 그들을 도우신) 당신의 거룩하고 강하신 말씀을 선지자들에게 전달하신 하나님이셨다는 점은 분명하게 보여짐에 틀림없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졌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적인 은혜로써 자신의 소유로 삼으신(신 7:6-8) 백성들은 하나님의 행동에 대하여 개인적인 해석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나님의 행동은 그분의 말씀에 의해 이전에도 이후에도 늘 함께 하셨다. 하나님의 행동은 선지자들이 보고서 거기에 자신들의 사운드 트랙을 삽입하는 무성 영화 필름과 같은 것이 아니다.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택받은 백성을 위한 구원의 행위를 수행하실 때, 선지자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해야할 해석까지도 계시하셨다. 실제로-이러한 것이 계시에 대한 현대의 이론들과 대조적이든 어떠하든 상관없이-선지자들은 야웨가 그들에게 보이신 말씀이나 메시지를 정기적으로 증거하였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사 1: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바벨론에 대하여 받은 경고라”(13:1);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암 1:1); “오바댜의 묵시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옵 1:1);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1:1);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 …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나 1:1);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합 1:1).
 
확신하건대, 현대의 많은 연구가들은 계시와 같은 하나님의 많은 행위들을 부인했다. 어느 한 기록자는 논평하기를, 아담으로부터 사무엘까지 “개인적으로나 천사를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귀로 들은” 많은 사람들의 사례는 그저 우리가 즉석에서 생략할 수 있는 “경건한 전설”에 불과하다고 했다(R. H. Pfeiffer,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Harper, 1948, p. 50.). 그러나 신적 계시에 대한 이러한 거부는 우리 주님 자신의 증언을 포함한 성경 전체의 증언과 상충된다.
 
구약은 시드기야가 고뇌 속에서 애처롭게 요청했던 기록을 담고 있다: “여호와께로서 받은 말씀이 있느뇨?”(렘 37:17) 하나님의 종 예레미야의 대답은 명확했다: “있나이다.” 선지자의 이러한 주장이 가장 인상적으로 확인되는 본문 중 하나가 신약성경의 본문에 나타난다(히 1:1,2). 그 본문은 다음과 같다.
 
옛적에
 
여러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 날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저자와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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